글밭단상
밤이 점점 짧아진다

  • 글밭단상
  • 2025년 봄호 (통권 95호)
밤이 점점 짧아진다

어제저녁부터 희끗희끗 날리던 눈이 잠에서 깨어 내다본 아침에는 제법 진용을 갖춘 듯 본격적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바람까지 불어서 평시에는 쌓이지 않던 부분에마저 눈발이 앉고 또 동시에 눈은 녹으며 그 장소로서는 ‘모처럼 하늘의 맛을 보는구나!’ 인간처럼 기쁘기도 하려나 하는 감상을 갖게 된다. 제법 오래 쏟아질 기세였으나 두어 시간이 지나니 해가 나고 처마 아래에서는 눈 녹은 물이 줄줄 쏟아져서 튄다. 마당은 색다른 리듬을 갖는다. 얼마든지 내려봐라 나는 녹이련다, 하는 두 세력 간의 밉지 않은 다툼 같다고나 할까? 한 편은 물러가는 겨울의 것이고 또 한편은 이미 와버린 대한(大寒) 절기 이후의 기운을 머금은 그것.

제법 시간이 나는 일상을 맞아 오랜만에 동네 체육관엘 간다. 오후의 정해진 과정을 끝내고 나오는데 당연히 어두워야 할 현관 바깥이 눈에 띄게 훤하다. 한동안 어둡게 맞이하다가 어느 순간 왜 저리 마당이 밝지? 매우 낯설다. 낮이 길어진 것인가? 오늘이 며칠이지? 그렇게 하면서도 심정은 매우 섭섭해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긴히 할 일이 있었으나 놓쳐버린 무엇이 있었던 듯. 그러나 그럴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각해 보니 나는 밤의 예찬론자였던 모양이다. 밤의 시간이, 어둠의 하늘이 줄어든다는데 그게 심히 섭섭했다면 그 무의식 속의 나는 야간형 아닌가. 야간형. 나는 싫지 않다. 모든 사상은 밤을 먹고, 밤하늘을 호흡하며 자라는 것이 아닐는지. 소설가 이병주 씨의 꽤 상쾌한 잠언(?)에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라는 인류의 과거를 조망, 구획한 안목에 손뼉을 친다.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는 그의 문학관에 대입해 보면 나는 ‘달빛’ 혹은 ‘골짜기’의 한 주민이 분명하겠다(그의 호는 그래서 어떤 숲 혹은 골짜기라는 의미의 ‘나림(那林)’이라 한 모양이다). 더불어 ‘골짜기’의 한 옹달샘에 비유될 만한 한 정서의 기록자로서 나는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깊디깊은 겨울의 그야말로 뼛속까지 얼 듯한 빈집에 들어서 본 사람은 알리라. 바깥보다도 훨씬 더 차가운 냉기, 정수리에 쏟아지고 어깨와 옆구리로 밀고 들어오며 코끝에는 마치 물체처럼 닿는 냉기의 밀도. ‘아 이런 것이구나!’ 인간의 온기가 없다는 것! 금방이라도 되돌아서 나가고 싶게 하는 것이 겨울의 빈집이다. ‘집’의 본질을 온전히 배반하는 공기가 그 시공에는 서려 있는 것이다.

달빛 찬란한 겨울밤 골짜기를 걸어서 오래 비운 시골집에 닿은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러한 사태를 모르지 않건만 왜 그 냉기가 골수에 박히는 듯한 한겨울 집을 찾아들곤 했는지 그것도 스스로 모를 일이다. 서둘러 불을 피워 온기를 갖추면 숨어들었던 귀신들도 물러나는 듯하다. 마당 불을 켜면 저편 잣나무 숲 여기저기에는 지난 폭설에 부러진 팔뚝 굵기 나뭇가지 상처가 짐승 뼈처럼 허옇게 드러난다. 참담한 겨울 골짜기인 것이다.

마른 나뭇가지를 꺾어 난로에 불을 넣고 불에 두 손바닥을 펴 널면서 생각하는 것이 있다. 지난 ‘12·3 계엄’이 지금까지 지속되었다면 나와 같은 좀팽이와 실감으로서의 내가 아는 여럿은 이런 ‘빈집’에 유폐되지 않았겠나. 좀 더 목숨을 연장해 보겠다고 비굴한 처신을 모색하며 추위에 사지는 점점 오그려 붙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후일 또 나를, 우리를 소재로 누군가는 소설을 썼을까? ‘산맥’이 아닌 패배자, ‘골짜기’ 기록자의 소재가 되었을까?

오늘도 또 눈이 내린다. 여러 겹의 감상으로 눈발을 바라본다. 단풍나무 가지 끝에 어른 주먹만 한 검은 뭉치가 걸려 있고 그 위에도 소복이 흰 가루눈이 쌓여 올라간다. 무얼까 하고 다가가 보니 새의 둥지다. 낮이 길어지면 다시 올까? 저 둥지의 주인은? 그러나 나는 밤이 짧아지는 것이, 사색의 시간이 생산의 시간보다 조금씩 줄어든다는 사실이 못내 섭섭하다.

장석남
시인,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965년생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뺨에 서쪽을 빛내다』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