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무겁게 다 들고 다녀. 어차피 다시 올 건데.
그 애는 말했다.
어차피 다시 올 거잖아? 옷도 한국 가면 많을 텐데.
그 애는 말했다.
그럴 텐데 뭐 하러 다 들고 다녀.
그 애는 말했다.
나는 무어라 대답했던가. 아마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대답하지 않고, 거대한 가방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각종 생활용품과 책과 서류 외에도 묵직한 겨울옷이 잔뜩 들어있는 남색의 이민 가방을. 그 가방은 떠나기 전, 남대문에서 산 거였다. 이민을 가는 것은 아니었는데. 내게 필요한 것이 이민 가방이며, 이민 가방은 남대문에서 사는 거라고 누가 말해줬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출국 직전, 아마도 새벽 세 시쯤에야 가방을 꾸렸던 기억만이 생생하다. 비행기를 타려면 일곱 시에는 나가야 했는데.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즉흥적이었다.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고, 눈을 감으면 바로 잠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어쩌면 반대다. 지금의 나는 어쩌면 그때의 그 애 같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그 애는 이제 그때의 그 애가 아니겠지. 지금의 그 애는 이제 그렇게 말하지 않을지 모른다.
왜 그렇게 무겁게 다 들고 다녀.
……
어차피 다시 올 건데.
……
어차피 다시 올 거잖아, 그런데 뭐 하러 무겁게……
……
묵묵부답인 한 사람을 향해 세 번이나 질문을 하는 사람. 질문으로 그를 감싸는 사람. 느리고 억양이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담담하고 담백한 목소리. 바로 그 담담하고 담백한 목소리로 그 애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누가 그러는데 내가 너무 담백하대.
……
그런데 연애하려면 좀 찐득거릴 필요가 있대.
……
그때도 나는 묵묵부답으로 거대한 가방을 바라보았던가. 아니면 펼쳐진 가방 속 수북한 겨울옷들을. 다양한 색감과 재질의 니트와 스웨터, 스커트와 바지, 그리고 갈색 겨울 코트를.
그 코트는 쁘아띠에(Poitiers)의 한 아웃렛 매장에서 산 거였다. 학교와 아웃렛은 가까웠고, 점심시간마다 나는 아웃렛에 가서 통조림을 까먹고 옷을 입어보았다. 점심에 옷을 사러 오는 이는 거의 없었기에 의류매장 내의 드레스 룸은 늘 비어 있었다. 작고 폐쇄된 공간에 들어가면 마음이 편했고, 매장에서 옷을 고를 때 따라붙는 직원이 없었기에 나는 그곳에서 평소에는 입어볼 용기를 내지 못했을 옷들을 한껏 입어보았다. 그러나 구입까지 이어지는 건 역시 평소의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옷들이다. 그 갈색 코트는 라인이 여성스러우면서도 귀여운 데가 있었다. 몸에 붙는 니트나 클래식한 셔츠를 받쳐 입을 때와 넉넉한 후드 티나 맨투맨 티를 겹쳐 입을 때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조금은 얄팍한 합성 원단이긴 해도 카디건이나 조끼까지 겹쳐 입는다면 한국의 매서운 겨울도 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물론 한국에도 두고 온 코트가 많지만, 나는 이 갈색 코트를 그곳에 가서도 입고 싶었다. 이 코트뿐 아니라 아웃렛에서 산 니트 여섯 벌과 스웨터 다섯 벌, 스커트 세 벌과 바지 네 벌, 목도리 세 개까지 다 가져가는 건, 그래서 이민 가방에, 캐리어에 배낭까지 끌고 오게 된 건 ― 물론 이 중 두 개의 가방 정도는 쁘아띠에의 C에게 맡겨둘 수도 있었을 테지만 ― 한국에 가서도 입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대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암막 커튼처럼 새카만 머리칼 사이로 입을 다물고, 어쩌면 그 애의 가방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애가 가져온 가방은 하나였다.
길쭉한 등산용 배낭 하나.
진회색 몸체 앞면에 주머니가 여러 개 달려 있고 주머니 지퍼와 고리 부분만 형광 연두색을 띠고 있는, 눈에 익은 배낭이었다. 강의 시간에 그 애가 종종 매고 오던 것. 왜 등산 배낭을 메고 왔냐고 물으면 그 애는 산악부에서 방과 후 야간 등반을 간다고 했다. 그런 날이 꽤 잦았던 것 같다. 내성적으로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그 애는 동아리 활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나도 그 여행에 따라가 본 적이 있다. 야간 등반이나 몇 박에 걸친 긴 여행은 아니었고 일요일에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일정이었는데 그때 떠난 곳이 저 멀리 남쪽의 무슨 산이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장기자랑이 펼쳐져 몹시 불편했던 기억만이 생생하다. 마이크를 든 사회자가 맨 뒷좌석부터 한 사람씩 지목했는데 모두에게 익숙한 일인 것 같았다. 심지어 그 애 역시 전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가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마법의 성>과 <기억의 습작>을 연달아 불렀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사회자는 신입회원이라 소개하며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나는 나가지 않았다. 사회자가 뭐라 다시 소개했고 사람들이 손뼉을 쳤지만, 나는 나가지 않았다. 흥겹던 분위기가 일순 싸늘해지자 사회자는 서둘러 다음 사람을 불렀고, 다음 사람은 분위기를 만회하려는 듯 그 누구보다 신나는 노래를 부르고 좁은 통로를 오가며 춤까지 췄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산을 오르고, 김밥과 사이다를 먹고, 다시 산을 오르고, 유명하다는 봉우리에 닿아 단체 사진을 찍고 다시 산에서 내려오기까지, 나는 그 애 외에 다른 누군가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서서히 해가 질 무렵, 봉우리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오전에 버스에서 사회를 보았던 아이가 못마땅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너는 대체 여기 왜 온 거냐? 나는 그 애 때문이라고 말했다. 뭐? 그 애가 등산을 하니까 따라와 본 거라고. 그게 다야? 응, 그게 다야. 사회를 봤던 아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거친 손놀림으로 담뱃불을 끄고 자리를 떴다. 나는 누군가 손에 쥐여 주었던 젤리를 천천히 씹으며 다시 진회색 배낭을 찾았다. 아무튼 이 배낭은 그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산악부 활동에서 내가 시선을 놓치지 않고 졸졸 따라다녔던 바로 그 진회색 배낭이었다. 네팔의 에베레스트에도 메고 갔고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에도 메고 갔었다던 그 배낭. 그걸 메고 그 애는 나를 만나기 위해 이곳 파리에도 온 것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애를 만나기 위해 파리로 왔다. 내가 살던 쁘아띠에에서 파리까지는 열차로 두 시간 거리. 그 애와 파리에서의 짧은 여행 후에는 잠시 한국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렇다, 잠시…… 구정까지 딱 한 달만 한국에 머물고, 그 애의 말대로 다시 쁘아띠에로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왕복에 필요한 비행기와 열차 티켓은 모두 준비되어 있었고, 앞으로의 일정은 그 티켓들에 인쇄된 날짜와 시간만큼이나 확고하게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정이란 언제나 틀어질 수 있고, 예정이 확고하다고 해서 틀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지 않은가? 즉 예정과는 다르게 내가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지 않거나, 돌아오는 비행기를 탄다 해도 돌아오는 열차를 타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그것이 몹시 미미한 가능성일지라도, 그 가능성이 불가능할 확률이 절대적이라 할지라도 만에 하나의 가능성, 그 미미한 가능성에 나는 늘 주목했다. 그 미미한 무수한 가능성을 나는 버릴 수 없었다. 이 미미하고 무수한 옷가지들을 버리고 올 수 없는 것처럼. 물론 두고 오는 거지, 버리고 오는 게 아니다. 그런데 두고 올 때, 버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있잖아 나는, 무언가를 두고 올 때 버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그렇게 그 애에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 애에게 말했다면,
그건 그런 게 아니야, 언니.
라고 천천히 그리고 다정하게 그 애는 설명해 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이해가 되고 안심이 되어 다음부터 좀 더 가벼운 가방을 꾸릴지도 모른다.
그 애처럼.
실내복 한 벌과 양말과 속옷 몇 벌, 카메라 한 대가 전부인 그 애의 가방처럼.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던 사람.
그 애는 내 입술이 아픈 것처럼 붉다고 했다.
너는 머리를 잘랐네.
그렇다. 나는 곧바로 그 말을 했다. 내 붉은 입술을 지우기 위해. 내 붉음을 덮어버리기 위해 내가 했던 그 말이 기억난다. 그런데 그 말은 어쩌면 그 시간을 기억하는 글쓰기 속에서 했던 말일 수도 있다.
너는 머리를 잘랐네, 소년처럼.
* 계간 <대산문화> 2025 봄호(통권 95호)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