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신춘 유감

  • 단편소설
  • 2025년 봄호 (통권 95호)
신춘 유감

그는 최근 이 년 동안 자신이 발표한 작품들 – 삼백 페이지 분량의 장편소설 한 편, 단편소설 두 편, 인터넷사이트에 게재한 에세이 세 편 – 이 독자의 관심을 끄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평론가나 출판사 편집자 역시 그의 작품을 더 이상 반기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의 예술 세계엔 문맹의 작가만 덩그러니 남았다.

독자가 없는 글을 계속 쓰는 게 작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그는 또다시 자문했다. 이런 고민은 등단하기 전부터 그를 괴롭혔고, 등단 직후 잠시 줄어드나 싶더니 일 년쯤 지난 뒤부터 다시 커졌다. 등단하지 못했으니 독자를 얻지 못한 건 당연하다고 자위했으나, 등단하고도 상황이 거의 달라지지 않는 걸 보면 작업실 밖에 독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소수의 유명 작가가 책을 출간하면서 독자를 임시로 만든 뒤에 유효기간이 지나면 폐기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반복되는 실패와 허탈감을 용케 견뎌낼, 또는 무시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작가 이외의 직업을 지녔다는 것이다. 순서로 따지자면 그에게 작가는 두 번째 직업이다. 첫 번째 직업은 두 번째 직업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명예를 가져다주진 않아도 실리를 챙기는 데엔 유용하다. 이는 인간의 도리를 지키고 시민의 권리를 요구하는 데 적합하다는 뜻이다. 그게 없었더라면 그는 작가가 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작가는 영원한 명예를 위해 기꺼이 가난과 무명과 멸시를 덤덤히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직업 덕분에 그럭저럭 생계를 해결하던 그가 마흔 살의 나이에 작가의 자격을 인정받았을 때, 자신은 글 쓰는 것 이외의 사명엔 관심이 없으므로 미래의 도서관을 채우는 데 여생을 매진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자신마저 흡족할 단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즉시 작가 활동을 중단하겠다는 말까진 덧붙이지 말아야 했다. 한 권의 책으로 도서관을 채울 수 없고, 작가라는 정체성은 거부하거나 포기할 수도 없다. 그리고 자기 작품을 정식 출간한 자뿐만 아니라 글을 쓰려고 애쓰는 자까지 작가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그는 등단 뒤에야 겨우 이해했다.

그의 발언은 물심양면으로 돕던 자들을 적이 실망하게 했을 수도 있다. 출판사 직원들은 새로 출간한 책이 독자를 피해 도서관에 숨는 걸 원하지 않을 것이고, 도서관 직원들 역시 독자의 검증을 받지 않은 책이 무작정 찾아오는 걸 반기지 않을지 모른다. 독자의 눈과 혀에 적당히 닳은 책만이 모두에게 환영받을 수 있다. 다양한 상대와 스파링은 하지 않은 채 링 아래에서 체력 단련만 하는 권투 선수가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듯이, 독자를 피해 다니는 작가에게 전작을 뛰어넘는 신작을 기대할 순 없는 노릇이다.

저조한 판매 실적 때문에 사장의 질책을 받은 편집장은, 작가가 무례하게 맡긴 원고를 매몰차게 돌려주지 못한 채 상품성이 없다는 직원들까지 일일이 설득해 가며 출간을 강행했던 걸 몹시 후회했을 것이다. 미래의 베스트셀러를 확보하기 위해 미리 투자하고 관리해야 할 작가의 목록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면서, 물류 창고에 쌓인 재고를 처리할 묘수를 고민하고 있을지 모른다. 매년 국가가 구매해서 군대나 교도소로 보내는 책들 속에 끼워 넣을 수 없다면, 낡은 책을 화학 처리해서 곤충 사육용 사료로 만든다는 업자에게라도 헐값에 넘길 수도 있다.

그러니 독자가 새 책을 구매하는 데 주저하지 않도록 작가는 좀 더 사려 깊게 대응해야 했다. 가령, 자신의 책은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천천히 늙어가면서 이따금 수다한 말동무가 돼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이미 역사 속에서 잊힌 사건과 등장인물을 다룬 만큼, 마치 유물학자나 생물학자가 미증유의 대상에 열광하듯, 눈 밝은 사서가 유구한 도서관의 역사에 어울리는 구색으로 그의 책을 선택해 주길 희망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의 일생을 글 쓰는 것 이외의 목적으로 소진하고 싶지 않다는 고백만큼이나, 작가라는 직업 하나만으로 생계를 해결할 자신이 없다는 실토 또한 그가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고 싶은 진실이다.

한때 그도 혁명의 실마리가 될 책이 자신에게서 태어나길 바랐으나, 지금은 자기 작품이 생필품처럼 빠르게 소비되길 선망한다. 다만 생필품이라고 해서 대충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겠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것만이 소비자의 기대를 빠르게 충족시킬 수 있다. 하지만 서점에 진열된 책들을 훑어보다 보면 출판 산업이 패션 산업을 닮아간다는 생각이 스며든다. 책이든 옷이든 너무 대충 만들어서 너무 많이 유통하다가 너무 잔인하게 폐기한다. 그는 자신의 책을 재활용 쓰레기 수거장에서 발견할 때마다 자신의 속옷을 되찾은 것 같아 몹시 민망해졌다.

사랑하는 이의 이마 한가운데 솟아오른 사마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아도, 증오하는 자의 목덜미에 찍힌 점은 부꾸미처럼 크게 보이는 법이다. 그의 책을 구매하지 않았거나 구매했지만 읽지도 않은 채 내다 버린 독자들도 열 가지의 장점보다 한 가지의 단점에 압도당했을 것이다. 등단한 지 십여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발견되는 흠결은 결국 두 가지의 직업을 병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진단했다. 첫 번째 직업이 두 번째 직업을 훼손하고 있는지, 아니면 두 번째 직업의 불완전함이 첫 번째 직업을 강요하는지 명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독자에게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요소를 스스로 제거하지 못하는 한 그가 전업 작가로 성공하는 사건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독자를 만들고 배양할 만큼 유명해지진 못하더라도 이 년마다 책 한 권씩 출간할 만큼 성실한 작가로 그는 기억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스마트폰의 알람이 울리는 즉시 노트북의 전원을 끄고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수돗물처럼 쏟아지던 이야기는 글 대신 말로, 일단 옮겨서 스마트폰에 녹음하면 된다. 새벽 세 시에 깨어났으나 세 시간 동안 단 한 문장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을 때 들려오는 알람은, 감옥의 모든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다름없다. 밤새 독방에 갇혀 심신이 눅진해진 죄수는 운동장 햇빛 아래로 나가 생의 기쁨을 충전할 수 있다.

직장 동료들은 평소에 말수가 적고 낯을 많이 가리는 그가 여섯 권의 책을 출간한 작가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가 이따금 하리망당한 표정으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거나 회의 도중에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도 자식이자 가장으로서 도맡아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짐작했을 뿐, 설마 그처럼 유약한 자가 겸업을 허락하지 않는 취업규칙까지 무시해 가며 돈벌이하고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물리적, 윤리적, 신체적 제약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 필명으로 작업한다고 두 번째 책의 후기에 적었다.

그가 이 년 전부터 점심시간마다 공장 안팎의 유리창에 동전 크기의 반투명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면서 동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하루에 이만여 마리의 새들이 유리창에 충돌해 죽어가는 현실을 인간은 자신의 잘못으로 선뜻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새의 목숨보다는 유리창 파손에 의한 손실을 강조함으로써 시설 관리팀장에게 자신의 취미 활동을 허락받았지만, 미관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스티커도 자비로 구매해야 했다. 그마저도 공장을 드나들던 비둘기들이 학살당한 뒤에는 한참 동안 멈춰야 했다.

뜨거운 유리를 다루는 공장은 열기와 습기를 적절히 조절하기 위해서 천장을 높이고 창문을 열어두어야 했는데, 비둘기들이 공장 안으로 드나들면서 그것들의 깃털과 분변이 섞인 불량품이 많이 늘어났다. 시설 관리팀장은 새의 생태에 관심이 많은 직원 – 나중에 그는 A로 호칭할 것인데, A는 예술가(Artist)이자 알렙(Aleph)을 의미한다 - 의 조언에 따라 맹금류 모빌을 매달아 두고 그것의 울음소리를 들려주었으나 효과가 없자 A의 반대를 물리치며 천장 곳곳에 방조망(防鳥網)을 쳤고, 금요일 저녁 퇴근 시간에 맞춰 천장 곳곳에 독약과 덫을 설치하더니 일요일 오후 사체를 모아 불태운 뒤 기둥과 들보마다 십 센티미터 간격으로 쇠못을 용접했다. 점심시간마다 공장 한쪽에서 배드민턴이나 족구를 즐기던 직원들은 그 조치 때문에 다른 소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상반기 영업실적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비둘기 이야기를 들은 사장은 자신이 아버지를 대신해 그 자리에 오른 게 고작 석 달 전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아버지뻘의 팀장들에게 육두문자를 날렸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연말까지 이십 퍼센트의 인력을 감축하라고 인사팀장에게 지시했다. 저역량자 또는 저성과자로 지목받은 직원은 단 한 명도 남겨서는 안 된다고 명토 박으면서, 공장 안에서 비둘기가 또다시 발견된다면 시설 관리팀장까지 교체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이 소식은 수백 개의 입과 귀를 통해 직원들에게 알려졌고, 당연히 노동조합은 조직적 대응을 준비했다. 하지만 사장의 의지가 너무 완강한 데다가 불명예퇴직자에 대한 보상 조건이 파격적이어서 직원들은 – 심지어 노조의 간부들까지 – 마치 마지막 시내버스가 지나가는 시간을 앞두고 술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취객처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발로 회사를 떠나는 자의 정의감이나 실망감은 전혀 보상하지 않고, 회사가 저역량자 또는 저성과자로 지목한 자가 불명예를 순순히 받아들일 때만 위로금을 지급하겠다는 방침을 비공식적으로 확인한 직원들은 혼란스러웠다. 역량과 성과를 인정받는 직원들이 팀장을 은밀히 찾아가 자신을 불명예퇴직 대상자로 분류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대상자 선발 기준이 알려지면 동종업계로 재취업이 불가능해질 수 있었는데도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한 달여 동안의 설왕설래 끝에 열 명의 대상자가 발표됐다. 회사가 그들을 첫 번째 정리 대상자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두 번째 정리도 계획하고 있는 게 분명했는데, 언제까지 몇 명의 직원들을 쫓아내야 구조 조정이 마무리되는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첫 번째 대상자로 분류되지 않았다고 해서 긴장을 풀 수 있는 직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인사팀장의 귀에도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다는 격언이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불명예퇴사자에게 지급되는 위로금이 한 달 전 소문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는 사실 때문이라도 열 명의 직원은 회사의 결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팀장을 만나 발령을 취소시키려고 애썼다. 갑자기 팀원을 빼앗긴 팀장들 역시 인사팀장에게 해명과 조치를 요구했다. 하지만 인사팀장은 아무도 사장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말로 상황을 간단히 정리했다가, 사업에 중요한 인재들마저 동반 사퇴를 결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히 사장을 찾아갔다. 사장은 대상자의 숫자를 유지하는 조건에서 이름만을 바꿀 수 있도록 허락했고, 일주일 뒤에 새로운 발령 문서가 공지됐다. 원래의 부서로 간신히 되돌아간 세 명은 이후 궂은 업무도 솔선수범했을 뿐만 아니라 회사와 사장의 명예를 자신의 목숨처럼 여겼다. 반면 자진해서 대상자로 들어온 세 명은 위로금이 지급될 시기를 지루하게 기다리면서, 이직할 회사를 찾거나 자기개발서를 건성으로 읽었다.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 같았던 구조 조정 작업은 노조의 반발과 언론의 관심 때문에 사장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연옥에 갇힌 열 명의 직원은 하루 종일 회의실에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카메라를 통해 녹화됐고, 업무 시간에 전화 통화나 인터넷 서핑을 한 자는 퇴근 시간을 넘겨서까지 시말서를 써야 했다. 위로금을 챙기기 위해선 온종일 의자에 앉아 굴욕감을 견뎌야 했다. 지역 국회의원이 나서서 사업에 도움이 될 정책을 약속했지만, 회사에 적개심을 품은 자들은 언제든 저항 세력이 될 수 있었으므로 사장은 위로금 없이 그들을 말끔하게 처리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회사 직원 중에 유명 작가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고작 한 달에 한 번 정도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사장은 유리창에 붙은 반투명 스티커의 정체가 궁금해서 시설 관리팀장에게 물었다. 회사의 존립이 흔들리고 있는 마당에 하찮은 새의 목숨이나 걱정하는 직원이 괘씸하게 생각돼 관련자들을 두 번째 정리 대상자에 반드시 포함하라고 사장은 지시했다. 가까운 곳에서 식사하던 직원 하나가 시설 관리팀장에 다가가 귓속말했고, 사장은 그처럼 유명한 작가를 해고한다면 더 강력한 적을 더 많이 불러들일 위험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 직원이 A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까닭은 그 역시 오랫동안 작가를 꿈꿔왔기 때문이다. 그는 신춘문예를 홀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응모 마감 한 달 전까지도 흡족할 수준의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자 초조해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동네 서점에서 A의 책을 발견했다. 발판을 딛고 까치발까지 해서야 겨우 책꽂이에서 꺼낼 수 있었던 그 책은 삼 년 전 발간된 뒤로 증쇄된 기록이 없었고, 작가의 사진은커녕 약력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자비 출판을 하고 홍보조차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 같았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매력적인 구성이나 문장을 훔치고 싶은 욕망이 끓어올랐다. 왜냐하면 신춘문예에 당선되기 위해선 이야기의 기발함보다 문장의 안정감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충고를 오랫동안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 앞으로 표절자(Plagiarist)이자 제자(Pupil)라는 의미로 P라고 부르겠다 – 는 A의 책에서 찾은 문장을 자르고 뒤섞은 원고로 신춘문예에 응모했으나 최종심에서 낙방했다. 심사위원은 그의 작품이 A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정확히 지적했다. 그 뒤로 P는 A의 방해로 자신이 실패했으니, 그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으로 A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작품과 인터뷰 기사를 꼼꼼하게 읽고 여러 출판사에 직접 문의한 끝에 A가 세 개의 필명을 번갈아 사용한다는 것과 작년 말에 발표한 에세이 속에 유리 제조공장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도 설마 자신과 같은 공장에 근무하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A는 공장 안팎의 유리창에 조류 충돌 방지 스티커를 붙이러 다니는 사내를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켰다. 그리고 P는 그 사내를 직접 목격하고 자신도 모르게 환호했다. 복수심은 사라지고 연민이 자라났다. 표절을 정중하게 사과하고 등단을 도와달라고 간절히 요청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퇴근길에 A를 조용히 뒤따라갔다가 둘만 남겨졌을 때 A의 필명 세 개를 차례대로 불렀고, A가 놀란 얼굴로 뒤돌아봤다. 하지만 A는 곧바로 표정을 바꾸면서 자신은 작가가 아니라고 끝까지 잡아뗐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P는 모멸감으로 몸이 뒤틀렸다. 며칠 뒤에야 P는 A의 냉대가 겸업을 금지하는 취업규칙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자신 또한 작가로 등단하더라도 곧바로 회사를 그만두진 않을 테니 A의 비밀을 끝까지 지켜줘야겠다고 P는 다짐했다.

하지만 사장이 A의 정체를 추궁하는 순간, P의 내부에서 악마가 깨어났다. 자신과 일상을 공유하는 경쟁자가 사라져야 표절의 공포 없이 자신만의 작품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소문에 따르면 조만간 두 번째 정리 대상자가 발표된다고 하니, 결격사유 – 겸직, 벌금, 경범죄, 소송이나 이혼 등 – 가 있는 직원이 우선 선정되는 게 공평했다. 두 번의 광풍까지 지나가고 나면 사장은 국회의원과의 약속 때문에라도 망나니 칼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시체가 묻힌 전장은 옥토로 변할 게 분명하다. 그래서 P는 시설 관리팀장에게 A의 진짜 정체를 귀띔해 주었고, 나중에 메일로 증거 자료까지 보냈다. 관리팀장은 자신의 명예를 보호해 준 P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했다.

사장은 A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A가 출간한 여섯 권의 책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그것들 때문에 회사와 동료들이 입은 손실과 상처에 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배신자의 정체를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구조 조정까지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윽박질렀다. A는 차마 인질처럼 붙들린 자신의 책들을 모른 척할 순 없었다. 그래서 겸직 금지 조항을 위반한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자신은 회사나 동료들의 명예를 훼손할 만한 내용을 작품에 실은 적이 없으며 거짓으로 독자를 선동할 만큼 영향력이 대단하지도 않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사장은 탁자 위의 책들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퉁명스럽게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환(環)공포증에 시달리는 직원에겐 왜 한 번도 사과하지 않으셨나요?

다음날 열 명의 정리 대상자는 문예 창작팀으로 발령이 났고 A에게 팀장이 맡겨졌다. – 그러니까 A 역시 저역량 또는 저성과 대상자로 낙인찍힌 것이다. – 사장은 전 직원들에게 메일을 보내, 급변하는 시대에서 한 인간이 하나의 직업만으로 인생을 꾸려가는 건 손해라고 지적하면서 그동안 회사를 위해 헌신한 직원들이 퇴사 이후에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적극 돕겠다고 적었다. 그러고는 A의 정체를 폭로하면서, 작가라는 직업은 정년이 없고 세대와 국경을 뛰어넘어 존경받기 때문에 이것으로 전직하는 자들을 우선 지원하겠으며 이를 위해 A를 팀장으로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아홉 명의 직원은 연말까지 석 달 동안 회의실에 모여 오전에는 회사 홍보물을 만들거나 상품평을 조사하다가 오후에는 신춘문예에 응모할 작품을 각각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사장은 신춘문예 당선 결과와 상관없이 연말까지 열 명의 인력을 줄일 계획이었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자들은 주변의 칭찬과 명예욕에 도취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작품을 쓰려면 새장 같은 회사에서 당장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낙선한 자들도 어려운 회사 상황에서 특혜를 받았건만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로 괴로워하면서 – 사장의 지시에 따라 인사팀장은 낙선자들을 매일 모아놓고 명예로운 방법을 재촉할 것이다 – 도망치듯 퇴사하게 될 것이다. 글 쓰는 방법은 누구에게서 단기간에 배울 수 없고 혼자서 오랫동안 수련해야 한다는 A의 주장에 사장은 그럴 시간이 없다고 코웃음 쳤다.

A는 새로 받아 든 임무로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허방다리에 빠진 동료들에게 문학성이나 시행착오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글 쓰는 방법을 스스로 깨쳐야 한다고, 용케 등단하더라도 작가로서 주목받지 못할 것이라고 겁을 줘서도 안 됐다. 먼 미래에나 얻을 수 있는 명예 따위엔 전혀 관심 없고 현재의 직업을 지켜내는 데에만 절박한 그들은 뛰어난 작가인 A가 자신들을 위기에서 구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발령 첫날 A는 문학이나 작가에 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대신 열 명을 차례로 면담하면서 각자가 감지하고 있는 위기감의 규모를 가늠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것보다 자신만이라도 은밀하게 빠져나가길 원했고, 망각하는 능력과 파괴적인 시간이 모두를 용서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아홉 명은 각자의 역량이나 성과와 관련 없이 그저 개인의 희망에 따라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세 명은 이직할 의사가 없으니, 어떻게든 사장의 시험을 통과해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직을 준비하는 세 명 중 두 명은 위로금을 받는 즉시 사장의 얼굴에 대고 욕지거리를 퍼부은 뒤 아무런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날 테지만, 한 명은 이왕 이렇게 됐으니 신춘문예까지 도전해 보는 것도 재밌겠다고 판단했다. 나머지 세 명의 대답은 모호했다. 두 명은 여전히 대상자로 선정된 이유에 수긍할 수 없으니 신춘문예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고, 제 발로 퇴사하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부당한 처우에 저항해야겠다고 다짐한 그들은 노조의 조언을 동료들에게 전파했다. 마지막 한 명은 자신에겐 이직하거나 신춘문예에 당선될 역량이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시인하고, 적어도 오십 퍼센트의 성공 확률이 있는 시험 방법을 제안해 달라고 회사에 요구했다. 훗날 그는 P와 교체됐다.

처음부터 저역량자 또는 저성과자의 낌새를 풍긴 건 아니고, 회사에 다니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그들은 의욕을 잃고 실패를 거듭했을 뿐이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누군가 강제로 입혔거나, 너무 작고 무거운 옷 때문에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건강이나 가족 문제로 업무에 집중하지 못한 자에겐 인내와 배려가 더 필요했다. 이직을 부단히 시도했거나, 정년 보장 조건을 너무 유리하게 해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조직이든지 다양한 사람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그들이 조화롭게 지낼 수 있는 원칙과 제도를 만들고 합리적으로 운영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저역량·저성과의 직원들이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다. 좋은 회사는 직원의 역량을 따지는 대신 프로세스의 효율을 점검하고 성과보다는 전망을 중시하며 처벌이 보상을 뛰어넘지 못한다.

면담 결과, 세 명에게선 작가로 변신할 가능성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사장이 회사를 살리기 위해 열 명을 버렸듯이 A도 세 명을 버려야 나머지 일곱 명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장의 방식에 따른 성공은 양심의 가책을 해결해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사장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더라도 낙담하지 않고 또 다른 방식으로 생의 환희를 이어가도록 응원해야 할 임무가 A에게 주어졌다. 오랜 취미나 사업수완을 지녔다면 퇴직금을 털어 새로운 돈벌이를 시작할 수도 있다. 부당한 조치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당장 자신을 보호해 줄 순 없더라도 자식의 권리를 강화해 줄 것이다. 체념과 굴종으로 어제를 견뎌낸 자들 덕분에 오늘의 안락이 허락됐으니, 내일 그들도 어디선가 환영받아야 마땅하다. 적어도 아홉 명 중 두 명은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지녔으나, 자신의 영감을 허공 속에 발산할 줄은 알아도 그걸 백지 위에 가지런히 펼쳐 놓고 설명하는 데엔 무척 서툴렀다.

귀가한 A는 자신과 인연이 있는 출판사 몇 곳에 이메일을 보내 일신상의 이유로 올해 말까지 잠정적으로 절필하겠다고 통보했다. 마감일을 기다리는 출판사에 퇴고를 끝마치지 않은 원고라도 보내려 했다가, 그런 행동은 출판사의 직원들마저 정리 해고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뒀다. 그는 자신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재앙을 현명하게 수습한 경험으로 새로운 작품을 쓰겠다고 약속했지만,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한 작가가 출판계의 흉흉한 소문을 이겨내고 출간 기회를 다시 잡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절필 기간에 일기라도 남겨 알리바이를 마련해야겠다고 다짐했다.

A는 문학 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글 쓰는 법을 가르칠 순 없어도 글쓰기의 모범이 될 만한 작가의 책을 함께 읽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소설은커녕 일기나 편지조차 써본 지 오래된 팀원들에겐 A의 설명과 지시가 너무 어려웠다.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응모 마감일이 확정된 뒤부터 수업 시간은 작가와 독자를 향한 성토장으로 변했다. 팀원들은 뛰어난 작품을 읽거나 쓰는 것보다 그걸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법만 궁금해했다. 그들에겐 자신을 작가로 인정해 주는 공식 증명서가 필요했을 뿐이다. 수업을 시작한 지 두 주쯤 지나서 A는 자신의 생각과 교수법을 완전히 바꿨다.

다음날부터 A는 최근 삼 년 동안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작가들의 대표 작품들을 필사하면서 암기하도록 지시했다. 그건 운전을 배우는 방법과 같았다. 자동차의 구조나 기능을 이해하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정해진 시간에 규칙을 어기지 않고 자동차를 움직일 수 있는지 배우면 그만이었다. 퇴근에 앞서 팀원들은 자신이 기억한 문장을 백지에 옮겨적었고, 책에 등장하지 않거나 자의적으로 수정한 문장은 A에 의해 삭제됐다. 짜깁기된 글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걸 설명하는 자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그런 수업이 일주일 남짓 계속되자, 팀원들은 비로소 창작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했다.

A는 카페나 독서실로 퇴근해서 신춘문예 당선자를 가장 많이 배출시켰다는 유명 강사들의 인터넷 유료 강의를 수강했다. 유명 작가이기도 한 그들 역시 자신의 첫 번째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직업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그런 일을 한다면 – 마치 돼지를 사육하는 자가 도축 기술을 배운 뒤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잃게 되는 것처럼 – 부자가 돼 생의 조건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을지언정 위대한 예술가로서 미래의 독자들을 불러 모을 순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당장 A에게 필요한 건 등단에 유용한 정보와 그걸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었고, 그걸로 아홉 명 중 단 한 명에게라도 기적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편지지 한 장을 채우는 데에도 힘겨워했던 팀원 두 명이 A의 수업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원고지 오십 장 분량의 소설을 완성해서 제출하자, 다른 팀원들도 크게 고무됐다. 고작 중학생 수준의 작문 실력을 갖추었을 뿐인데도 그들은 자신이 저역량자 또는 저성과자로 분류돼 그곳으로 왔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은 채, 마치 자신이 관련된 뉴스로 문학계를 뒤흔들 수 있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면서 서로를 작가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자기연민이나 현학적 허세는 작품의 가치를 망가뜨린다는 사실을 A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의욕과 열정을 매몰차게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자기도취를 막기 위해서, 작가 자신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나 사실을 인용하는 것은 대인지뢰를 설치하는 행동과 같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A는 팀원들이 습작하는 동안 조용히 회의실을 빠져나와 공장 안팎을 거닐면서 반투명 스티커를 붙였다. 새들이 찾아들지 않는 곳에도 그걸 붙인 까닭은, 자신이 오랫동안 눈여겨봤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그를 알아본 직원이 다가와 며칠 전에 유리창 밑에서 찍은 새 사체 사진을 보여주면서 정체를 묻기도 했다. 새들이 천국과 천국 사이를 건너다닌다는 속설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토록 진기하고 아름다운 새들이 이런 곳까지 날아오는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A는 스마트폰에 깔아놓은 앱을 열어서 그것의 생태와 울음소리를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새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세상에선 인간도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새와 대화했다는 프란체스코 신부의 일화를 들려준 뒤로 A는 직원들 사이에 중의적인 의미에서 방조자 – 새를 풀어주는 자, 또는 사장의 범죄를 묵인하는 자 – 로 불렸다. 팀장으로 발령 난 뒤로 동료들의 태도가 우호적으로 급변한 걸 보고 A는 자신이 좀 더 일찍 커밍아웃했더라면 저역량자 또는 저성과자로 분류되지 않았겠다고 중얼거렸다.

새의 언어에는 명사가 없고 주어나 목적어도 없으며 소리 뭉치 하나가 상황 전체를 설명하는데, 시간의 흐름 없이 찰나만 담긴다. 프란체스코 신부의 중재로 새와 인간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부가 죽자마자 새들은 인간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신부에게 인간의 언어를 배우지 않은 걸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았고, 인적이 드문 산속으로 숨어들거나 계절을 따라 이동하거나 인간의 총알이나 화살이 닿지 않을 만큼 높은 곳에 있어야 했다. 세대가 바뀌고 이국의 언어까지 유입되면서 새들의 언어도 크게 변했다. 그러니 프란체스코에게서 새들의 언어를 직접 배운 성직자들조차 새들의 가련한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채널로 문예 창작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있던 P 역시 커밍아웃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시설 관리팀장과 사장의 신뢰를 얻은 만큼 안전한 직장 생활은 보장돼 있었지만, 작가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차마 못 본 척할 순 없었다. A를 뛰어넘는 작가이자 직장인이 되고 싶다면 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어차피 아홉 명의 직원 중에는 아무도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못할 것이고 실패의 책임을 물어 A까지 해고될 것이므로, 알량한 자존심 따위를 앞세워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시설 관리팀장을 찾아가, 반항심 많은 A가 아홉 명의 직원을 선동해 회사에 해악을 끼칠 행동을 모의할 수도 있으므로 자신이 그 팀에 합류해 그들을 감시하고 보고하겠다고 제안했다. 공을 세울 기회에 솔깃해진 시설 관리팀장은 인사팀장을 만나 즉각 조치했다.

하지만 P의 생각과 태도는 발령 다음 날부터 확 바뀌었다. 그는 자신 역시 글 쓰는 일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라면 현재의 직장을 당장 그만둘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 아내에게 이혼 소송을 당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고 –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될 때까지만이라도 A와의 인연을 원만하게 유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려면 사장이 파놓은 함정에서 A를 건져내야 했으니, P는 군기반장을 자처하며 수업 진도와 팀원들의 언행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A의 신변에 불리하게 작용할 내용은 감춘 채 그의 역량과 성과를 과장해 시설 관리팀장과 인사팀장에게 보고했다. 준비한 지 석 달 만에 신춘문예에 등단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내년까지 한 번 더 도전한다면 놀라운 성과를 거둘 것 같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그건 P가 자신을 진단하고 내린 결론이기도 했다. 나중엔 신춘문예의 권위에 버금가는 문예지 신인상 목록을 알리며, 그것들의 최종심에 오른 자들까지도 당선 작가로 인정해 준다고 주장했다.

P가 합류한 뒤로 A는 수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며 제 발로 연옥을 찾아온 P에겐 유감스럽게도 열정 이외의 재능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정체를 사장에게 고발한 자가 P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 P는 프란체스코 신부의 발밑에 내려앉은 검독수리처럼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면서 고백했다 – 그를 돕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도움으로 다른 이들 – 적어도 자신의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길 바라는 네 명의 팀원 – 을 재앙에서 구해줄 방법을 고민했다. 응모 마감일까지도 흡족한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A는 자신의 미발표 소설 네 편에 그들의 이름을 각각 붙여서 네 곳의 신문사에 인편으로 보낼 것이다. P에겐 소설 대신 시를 써줄 텐데, 자신이 소설가로 등단하기 전부터 시를 썼고 문예지 신인상의 시 부문에서도 두어 차례 최종심에 올랐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P가 시인으로 등단하더라도 전업 작가가 되려면 소설 쓰는 재능을 스스로 증명해야 할 테니, 소심하지만 적절한 복수가 될 것 같다고 A는 생각했다.

크리스마스이브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으므로, A가 팀원들의 이름으로 접수한 네 편의 소설과 다섯 편의 시마저 모두 낙선한 게 확실했다. A는 인사팀장을 찾아가 참담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신이 회사를 떠나겠으니 팀원 중 네 명만이라도 구제해달라고 읍소했다. 뒤따라온 P는 표절이나 중복 투고 등의 이유로 신춘문예 당선이 취소되는 사건도 종종 발생하기 때문에 자신 중 누군가가 그런 불운에 휘말렸을 경우를 가정해서 마지막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항변하면서, 주요 문예지의 신인상 수상자가 결정되는 내년 오월 말까지만이라도 팀을 유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인사팀장이 꿈쩍하지 않자 네 명은 A가 자신의 미발표작을 자신들의 이름을 빌려 응모했다는 사실까지 폭로했다. – 그 행동이 A와 사전에 논의된 것인지, 아니면 충동에 따른 것인지는 끝내 알려지지 않았다. – 그러자 P는 뒤늦게 자신의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밝히면서, 영광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A이고, 나머지 아홉 명의 팀원은 사장의 배려와 A의 헌신을 무시한 채 석 달 동안 무노동 고임금의 열락을 즐겼다고 소리쳤다. 인사팀장의 보고를 받은 사장은 A와 P를 제외한 아홉 명을 첫 번째 불명예퇴직 대상자로 확정하고 소문보다도 훨씬 적은 금액의 위로금을 지급했다.

P의 소설을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선정한 곳은 지방의 환경단체가 운영하는 신문사로 유리 제조공장 사장이 제시한 목록에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P는 매년 그곳의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작가를 찾아가 자신의 회사와 열 명의 직원이 처해 있는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작품을 당선시켜 준다면 금전적으로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 심사위원은 P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하찮은 뇌물로 명예를 잃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P가 자신의 이름으로 접수할 원고가 사실은 유명 소설가 A의 미발표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결심이 흔들렸다. 안 그래도 최근에 당선된 작품들의 수준이 너무 낮아서 비난받고 있었는데, A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다면 독자와 문단의 관심을 끌고 신문의 위상도 올릴 수 있었다. 낙점 이후에 도용이나 표절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그건 모집 요강을 어긴 참가자의 잘못으로 돌리면 그만이었다. 심사 당일 P 또는 A의 작품을 절반쯤 읽자마자 심사위원은 당선작을 결정했다.

A는 P의 당선작에서 자신의 문장과 구성을 발견하고 크게 분노했다. P의 쓸데없는 참견으로 작가로서의 영원한 명예가 파괴됐고 직장인으로서 수령할 위로금마저 빼앗겼다고 비난하면서, 신문사에 당장 연락해 표절을 고백하고 당선의 영예를 자진해서 포기하지 않는다면 지난한 법정 투쟁을 벌여서라도 정의를 바로잡겠다고 윽박질렀다. 글 쓰는 방법을 가르치고 배운 자의 작품에선 유사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겠지만, 이미 한 차례의 표절로 주홍 글씨가 새겨진 자신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고 P는 항변했다. 자신의 헌신을 폄훼한 A의 언행에 서운함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A가 적의를 누그러뜨리지 않자, 문단에서 이미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을지 모를 그에게 대항하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으므로 P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P에게서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신문사 편집장은, 누군가 미발표한 작품을 표절했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고 중복으로 투고한 것도 아니므로 신춘문예 당선을 취소할 수 없으니, 원작자와 원만하게 협상하라고 귀띔했다. 그 대신 원작자의 동의를 얻어 낼 때까지 당선작 전문을 인터넷상에 공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들의 대화가 녹음된 파일을 듣고 A는 P의 약력에 매번 등장할 자신의 미발표 작품을 영원히 폐기하면서, 죽을 때까지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대신 자신을 스승으로 소개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P에게서 받아냈다.

유리 제조공장 직원들이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신춘문예 공모전에 참가해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A와 P, 그리고 사장은 인터뷰로 바빠졌다. 졸지에 가난한 예술가의 든든한 후원자로 칭송받게 된 사장은 조직 문화를 개선하고 싶거나 구조 조정을 기획하는 회사에 특별 연사로 초청받기도 했다. 영업실적이 여전히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서 두 번째 구조 조정을 시작해야 하는 사장으로선 주변의 관심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결국 그는 설 명절에 앞서 전 직원에게 적은 액수나마 특별 보너스를 지급했고, 노동조합은 이 결정을 사장의 백기 투항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주변의 관심이 줄어들자, 신춘문예 응모 마감일을 석 달 남기고 사장은 자신의 공언대로 두 번째 문예 창작팀을 조직했다. 두 명의 소설가가 건재했으니 열 명씩 두 개의 그룹이 꾸려졌다. 아홉 명의 인력이 회사를 떠났는데도 여전히 저역량자 또는 저성과자가 남아 있다는 사실보다, 두 번째 구조 조정의 규모가 두 배로 커졌다는 것이 훨씬 더 놀라웠다. 그런데도 제대로 저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회의실로 끌려온 스무 명의 예비 작가들은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각자 살아남아야 할 당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에게 더 유익한 스승을 선택하기 위해 알력 다툼까지 벌였다. P가 A의 제자인 만큼 A의 능력이 훨씬 높게 평가됐으나 P는 사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으니, 사장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더라도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면 P를 택하는 게 유리했다. P의 중재로 스무 명의 팀원은 두 개의 반을 번갈아 오가면서 수업을 받아야 했다.

한 달쯤 지나 A는 인사팀장에게 퇴직 의사를 밝혔다. – 그는 더 이상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며, 새와 관련된 서점과 출판사를 조만간 열 계획이다. – 문예 창작팀에 소설가는 한 명이면 충분했고 연말에 또 몇 명의 소설가가 추가될 수 있으므로 선배는 후배를 위해서라도 자리를 비워줘야 했다. 예술가들의 후원자라는 칭송을 듣는 사장은 회사를 위해서 저역량자 또는 저성과자를 내쫓고 싶을 테니, 신춘문예 제도가 존재하는 한 문예 창작팀도 계속 운영될 것이다. 인사팀장은 겸직 금지 규정을 어긴 책임까지 들먹이며 협박했으나 이미 그런 반응을 각오했던 A는 퇴사 의사를 거둬들이지 않았다. 인사팀장에게서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 들은 P는 A에게 미발표 소설 두 편만 건네준다면 사장을 설득해 보겠다고 속삭였다. A는 스무 명의 승객을 갑판에 놔두고 난파선을 홀로 도망치고 있는 선장이라도 된 듯한 죄책감을 끝내 억누르지 못하고 미발표한 두 편의 소설과 네 편의 시를 P에게 넘겼다.

마지막 출근한 날 A는 인사팀장을 찾아가기에 앞서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하고 반투명 스티커를 나눠주었다. 자신을 대신해 새들을 지켜달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공장을 한 바퀴 돌면서 스티커 몇 장을 더 붙였다. 유리창에 부딪힌 새의 사체를 찾을 수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가, 새들마저 이곳으로 날아오지 않는 것 같아 쓸쓸해졌다. 프란체스코 신부에게 새의 언어를 배웠더라면, 제발 인간을 용서하지 말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사직서를 받아 든 인사팀장이 A의 책을 내밀면서 서명을 요청하자, 자신의 책이 마치 회사의 유리창에 부딪힌 철새의 사체처럼 보였다. A는 그걸 매몰차게 빼앗아 들고 이만 원을 건넨 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P는 신춘문예 당선자를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작가를 회사로 초빙해 특강을 맡겼다. 거룩한 대의에 이끌려 선뜻 동의했지만, 첫 번째 수업에서 수강생들의 수준과 기대치를 확인하자 그는 곧 자신의 허영심을 저주했다. 그들은 예술가로 거듭나려는 열망이 전혀 없었고 그저 퇴근 시간과 월급날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새로운 구세주가 자신들 눈앞에다 탈출구를 만들어 주길 덤덤히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자괴감을 참다못한 강사가 산만한 태도를 나무랐더니, 그들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자신들에게 절실한 건 감방을 나갈 열쇠이지 찬송가는 아니라고 소리쳤다. 강사는 자신이 마치 노예를 등에 싣고 걷는 노새라도 된 기분이 들었고 – 눈먼 호머는 노예였다 – 더 이상 그곳에 남아 있어야 할 책임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약을 파기하고 계약금까지 반납한 뒤 떠났다. P는 그 사건을 인사팀장에게 알리지 않는 대신, 신춘문예에 응모하지 않고 곧바로 실패를 받아들인다면 단 한 푼의 위로금도 챙길 수 없다는 사실을 수강생들에게 확인시켜 줬다.

P는 등단 후 처음 연락해 온 출판사에 A의 작품을 자신의 이름으로 보냈다. 독자와 평론가의 반응이 예상보다 뜨거워지자, 그는 문예 창작팀의 동료들을 위해 남겨 두어야 할 A의 소설 한 편마저 발표하고 말았다. 세 번째 원고 청탁을 받고 그는 덜컥 겁이 났다. 청탁을 완곡하게 거부하려면 거룩한 명분이 필요했다.

P는 유력 신문사와의 인터뷰를 자청해 유리 제조공장의 현실을 폭로하면서 스무 명의 직원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신문사들은 기존의 신춘문예 제도를 유지하고, 여태껏 그 제도를 운용하지 않은 신문사들마저 원고 모집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 참가자에게 중요한 건 상금이 아니라 상패이니 신문사들이 재정 상태를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 P의 기사가 알려지자, 사장은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비밀을 유출했다는 이유로 P를 즉시 해고하고, 문예 창작팀마저 해체했으며, 뻔뻔한 예술가를 후원하는 임무도 그만뒀다. 고객들의 불매 운동이 이어지고 공익 제보를 받은 국세청 직원들이 들이닥친 뒤로 사장은 선친이 물려준 사업을 접겠다고 선언했다. 직원들은 공장 유리창에 부딪힌 새처럼 버려졌다. 해고 명령 이후로도 출퇴근을 멈춘 적 없는 P는 노조원들을 상대로 ‘무기 같은 글을 쓰는 법’과 ‘말랑말랑한 글로 싸우는 법’을 가르쳤다. P의 변신을 지켜보면서 동료들은 공모하는 자와 행동하는 자 이외에도 기록하는 자가 왜 역사에 필요한지 깨닫게 됐다.

A는 자신과 회사에 일어난 사건을 장편소설에 담고 싶었지만, 해고당한 P에게 그 이야기는 밥이 되고 옷으로 변할 것 같아서 미련 없이 양보했다. 비록 등단 과정에서 표절과 도용으로 시끄러웠지만, 글을 쓰려고 애쓰는 자는 이미 작가이므로 그의 성공을 빌어주는 게 적어도 두 번째 문예 창작팀 소속 동료들에 대한 도리였다.

첫 번째 직업을 반납한 A는 퇴직금이 입금되기를 기다리면서, 그리고 두 번째 직업마저 생계를 책임져주지 못할 때를 대비해 그 돈을 온전히 지켜낼 방법을 궁리하면서, 매일 아침 조류 충돌 방지 스티커를 주머니 속에 챙겨 집을 나섰다. – 그걸 구매하는 비용도 점점 부담되기 시작했다. – 출근하는 자들이 급히 지나쳐갈 때마다 자신의 쓸모가 몸에서 새어 나가는 걸 감지했다. 이십 년 넘게 사는 동네 곳곳에는 새들의 선한 목숨을 앗아갈 위험이 널려 있었다. 스티커 대신 젖은 진흙으로 이웃의 유리창에 둥근 패턴을 그려 넣었다가 신고를 받기도 했다. 결국, 그는 이웃과 갈등하지 않고 마음껏 스티커를 붙이기 위해 주민센터로 찾아가 몇 개월째 공석인 통장직에 지원했다. 정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권리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래는 불 그리고 노동자의 땀과 숨결을 만나야 유리로 변신한다. 뜨거울 때만 말랑말랑해지는 유리를 잘 다루려면 화상 따위를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너무 차갑게 식혀도 깨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유리를 다루는 자들은 매사에 목소리를 낮추고 느리게 움직여야 하며, 감정이 쉽게 끓거나 식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미세 균열이 유리를 단숨에 깨뜨릴 수도 있다. 유리의 장점을 단점으로 오해한 자들이 플라스틱이나 철제 식기를 선호지만, 전쟁을 일으키고 학살을 서슴지 않는 것도 그들이다.

유리 제조공장에서 일어난 촌극 이후로 신춘문예 존폐에 관한 논쟁이 다시 번졌다. 위대한 작가는 태어났을 뿐 만들어진 적이 없는데도 공모와 심사를 통해 작가를 발굴해 내려는 시도가 계속되는 한 성실한 수험생만이 경쟁에서 이길 것이고, 합격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선생과 학교, 학원이 모여들면서 문학은 더욱 퇴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짜 천재들의 득세가 독자를 멸종시키고 있다고도 했다. 이를 반박하는 자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독자가 먼저 떠났고 그들의 일부가 돌아와 작가가 됐으며 작가와 독자는 책 이외의 매개체로 더욱 자주 만나 서로의 자리를 바꾸고 있으므로 작가 면허증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신춘문예가 당선자의 권위와 생계를 보장해 주지 않으면서 오히려 예술적 소명을 지닌 딜레탕트의 등장이 활발해졌으니, 신춘문예의 긍정적 부작용을 상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논쟁은 항상 독자는 어디에 얼마나 남아 있느냐는 질문으로 끝이 났다. 뛰어난 독자가 있는 곳에서 위대한 작가가 태어나는 만큼 독자는 유행과 가독성을 따지지 않고 과감한 모험과 지루한 순례를 병행해야 한다고 어떤 평론가는 주문했다. 어떤 독자는 혀를 차면서, 모국어로 쓴 소설에는 많지만 외국어로 쓴 소설에는 없는 것들 때문에 국내 독자가 사라지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게 무엇이냐고 A가 물었더니 AI는 ‘아버지, 또는 꼰대’라고 대답했다.

독서가 이미 죽은 자, 멀리 밀려나 겨우 존재하는 자, 연락할 수 없는 자, 그리고 아직 존재한 적 없는 자와의 대화라면, 독자는 고독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안내자의 조언과 감시 속에서 숙제하듯 독서를 한 자는 성인이 된 뒤에도 책을 읽다가 오독과 몰이해의 미궁에 갇히게 될까 봐 걱정한다. 그래서 함께 책을 고르고 이해한 내용을 점검하며 주제를 확정하는 과정을 독서라고 생각한다. 통독했는데도 줄거리나 주제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작품은 무능력한 작가의 실패작일 따름이다. 그러니 믿을 만한 자의 추천이 없는 책은 선택하지 않고,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추천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독서를 한 자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을 포함해 – 작가가 된다면 결국 편협하게 읽은 것만 겨우 쓸 수 있을 뿐이고, 독자의 사유와 상상은 지금보다 더 좁은 세계 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위대한 작가로서 영원한 명예를 얻고 싶다면 독자란 고작 책장 앞에서 영원히 서성거리는 유령 정도로 간주하는 게 낫다. 그런 존재를 위해 자신의 작품 속에 이정표를 세우고 안내문을 나눠주는 데 애쓸 필요는 없다. 차라리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다니면서 새들의 유선형 대가리를 노리고 있는 유리창 위에 충돌 방지 스티커를 붙이는 데 힘쓰시라. 누구나 쓸 수 있는 작품보다는 아무나 읽을 수 없는 작품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선정돼야 한다. 이게 아직 독자가 없는 세계에 사는 눈먼 작가의 신춘 유감이다.

신춘문예를 준비하고 있는 예비 작가들을 응원해 달라는 신문사 – 그는 그 신문사의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 의 요청을 받고 이런 기사를 보내면서 A는, 만약 신문사가 자신의 글을 신문에 게재하지 않고 원고료 지급을 미룬다면 소셜미디어에 그걸 올려서 임시 독자라도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리 공장을 인수한 투자사는 문예 창작팀을 폐지하고 스무 명의 팀원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사업이 정상화될 때까지 구조 조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시설 관리팀장과 인사팀장도 직무와 권한을 유지했지만, 정작 P는 퇴사했는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작품을 쓰려면 새장 같은 회사에서 당장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유리 제조공장을 매각한 사장은 책을 만드는 사업을 시작했다. 작가를 발굴하고 원고를 검토하며 편집과 유통, 홍보하는 출판사를 설립한 게 아니라, 책을 만들고 싶은 누구라도 정해진 비용을 지급하면 삼백 부의 책을 출간해 주는 인쇄소를 개업한 것이다. 출판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작가의 목록을 관리하지 않고, 원고를 편집하지 않으며, 책을 홍보하거나 증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나 작가가 돼 임시 독자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고, 그 반대도 어쩌면 가능하다. 나중에 P가 시설 관리팀장으로 합류했다.

김솔
소설가, 1973년생
장편소설 『너도밤나무 바이러스』 『보편적 정신』 『마카로니 프로젝트』 『모든 곳에 존재하는 로마니의 황제 퀴에크』 『부다페스트 이야기』, 소설집 『암스테르담 가라지세일 두번째』 『망상,어』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