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소랑섬

  • 2025년 봄호 (통권 95호)
인류세, 소랑섬

인류세

 

2024년 8월부터 신생대 제4기 인류세 크로퍼드절에 살게 될 줄 알았는데 부결되었다

파리기후협정
플라스틱 협약

 

지구의 호흡은 점점 나빠져 가고

 

1만 1700년 동안 이어져 온
홀로세를 끝내고
인류세로 건너가지 않더라도

 

폐기물로 지구가 바뀌고 있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지구를 지키자는
정언명령에 따라
살아간다

 

플라스틱, 닭의 뼈, 콘크리트, 방사성폐기물로
뒤범벅될
새로운 지질시대

 

남은 시간도 짧지는 않겠지만,

 

갈맷빛 하늘은
흐릿해져 간다

 

눈이 내리지 않고 옆으로
휘몰아치는
순간이 있다

 

고난이 성찰을 돕는다

 

내게는 언어가 있고, 죽은 자들은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 있다

 

 


소랑섬

 

부조리극의 무대에 선 것처럼 중얼거린다 뜬 섬에 들어왔다, 사방은 막혀 있고 우주적으로 트여 있다 연호리 보리밭 지나 당두리 붉은 황토 언덕 넘어 다시 왔다

다리가 놓이지 않았을 때, 와 보지 않고도 매혹당했다 바람과 적막과 갈대와 유채꽃 노란 흔들림 몇 그루 나무 기이한 지평선이 이리저리 그어지고 펼쳐져 있다

 

더 갈 데 없다, 가창오리 수십만 마리가 무리 지어 나는 겨울 저녁 무렵을 이 봄이 끌고 왔다

 

지평선은 노을과 철새 대신 슬픔을 데려오고 말았지만 지평선의 끝에 바다가 있고 바다의 저 건너편에는 다른 지평선이 있고 그 끝에는 처음인 바다가 있어서

 

이 크나큰 텅 빔에 대고 말해본다 먼 과거로부터 발생하여 이곳까지, 천천히 도착했다 이곳의 바람은 나를 지켜준다 나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인다

 

조용미
시인, 1962년생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나의 다른 이름들』 『당신의 아름다움』 『초록의 어두운 부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