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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누가 만들었을까? 구전신화는 제주를 창조한 존재가 설문대할망이라고 이야기한다. 설문대할망은 치마에 흙을 담아다가 제주 섬을 만든다. 소꿉놀이할 때 흙을 퍼부어 보면 흙이 쌓이면서 흘러내려 가운데가 우뚝한 흙더미가 만들어진다. 한라산이 우뚝한 제주 섬 지형이 그렇다. 그렇다면 제주의 삼백 육십여 오름은? 그건 치마에 뚫린 구멍에서 흙이 조금씩 흘러내려 쌓인 것이다. 거대한 창세 여신은 실수를 통해서도 세계를 창조한다. 천진난만한 상상력이다.
제주를 만든 설문대할망은 제주 섬의 여러 지명·물명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백록담 서남쪽에서 올라가면 보이는 기암괴석 무리인 오백장군봉은 오백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위해 죽을 끓이다가 실수로 빠져 죽은 설문대할망의 몸이 담긴 죽을 먹다가 경악하여 도망치다가 변신한 아들들이다. 또 성산 일출봉을 오르다가 만날 수 있는 등경돌은 설문대할망이 길쌈할 때 쓰던 등경(燈檠, 등잔걸이)이고, 조천리와 신흥리 사이의 바닷가에 있는 엉장매코지는 제주 사람들이 할망의 속곳을 만들다가 옷감 한 필이 모자라 약속이 깨어지자 만들다 만 연륙교 흔적이다. 그때 옷 만드는 데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떠나다가 두고 간 설문대할망의 족두리는 오라동 한천의 족두리돌이 되었다. 제주 곳곳의 자연유산은 설문대할망 이야기라는 무형유산과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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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설문대할망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설문대할망이 제주 바다의 수심을 재러 다니다가 제주시 용연에 들어섰는데도 물이 겨우 발등에 닿는다. 더 깊다는 서귀포 홍리물에 들어가니 무릎까지 잠긴다. 더 깊은 물을 찾던 할망은 한라산 자락의 물장오리오름 못에 들어선다. 제주 말로 ‘창 터진 물’이다. 밑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못이란 뜻이다. 물장오리에 들어간 설문대할망이 지금까지 나왔다는 이야기는 없다. 여신은 어디로 갔는가? 1771년 장한철 쓴 『표해록』에는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제주인들이 멀리 한라산이 보이자 ‘백록선자(白鹿仙子)’와 ‘선마선파(詵麻仙婆)’한테 비는 장면이 나온다. 백록선자는 흰 사슴을 탄 신선이고, 선마선파는 설문대할망의 다른 이름이다. 백록선자는 도교 문화의 소산일 뿐 본래 한라산 산신은 설문대할망이다. 제주 창조를 마친 설문대할망은 물장오리로 들어가 한라산 여(女)산신으로 변신한 것이다.
설문대할망은 제주의 창조자이자 바다에서 활동한 해양 여신이다. 바다를 고리로 설문대할망은 서해안의 개양할미와 만난다. 변산반도의 격포리에 가면 해안 절벽 위에 수성당(水聖堂)이 있다. 수성할미를 모신 신당인데 이 여신이 바로 개양할미다. 개양할미는 굽 나막신을 신고 설문대할망처럼 서해의 깊이를 잰다. 개양할미는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에는 표시를 해둔다. 또 개양할미는 파도를 잦아들게 해주는 고마운 여신이다. 곰소 앞 바다의 ‘게란여’라고 불리는 곳은 몹시 깊었다. 발목이 쑥 빠져 치맛자락이 물에 젖자, 화가 난 개양할미가 흙과 돌을 치마에 담아 게란여를 메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개양할미에게는 여덟 딸이 있었는데 일곱은 서해의 여러 섬에 시집보내고 막내딸과 함께 수성당에 깃들었다고 한다. 개양할미가 서해 용왕의 딸로 이야기되는 구전도 있는 것을 보면 개양할미는 본래 설문대할망처럼 서해 칠산바다 유역에서 전승되던 창조 여신이자 바다를 지키는 해양 여신이었다가 수성당의 당신, 용왕 관념이 수용된 이후에는 용왕의 딸로 변형되기도 한 여신이다. 작제건과 결혼하여 고려 왕씨 족보에 들어간 서해 용녀 저민의 신화도 여기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경기도 양주의 노고산에는 노고할미라는 여신이 있다. 노고산의 노고산성은 할미가 치마폭으로 바위를 날라 쌓았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들 수도 없는 바위를 치마폭에다 날랐으니, 노고할미는 힘이 장사인 거인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노고할미는 한 쪽 다리는 노고산성에 다른 다리는 도락산에 걸치고 오줌을 쌌다. 오줌을 싼 곳을 궁 넓은 고개라고 하는데 그곳에는 노고할미요강이라고 불리는 움푹 파인 바윗돌이 있다. 노고할미는 바위와 친한 거인 여신으로 바위를 공깃돌 다루듯 하며 산성을 쌓은 여신인데 때로는 희화화되기도 한다. 오줌을 누다가 게가 집게발로 아랫도리를 집자 화가 난 할미가 파주로 가버리라고 저주를 퍼부어 게너미고개가 생겼고, 그래서 파주에 게가 많다는 전설도 있다.
우리 땅에는 설문대할망·개양할미·노고할미, 나아가 삼척의 서구할미, 경상도의 안가닥할무이 등 할미라는 이름이 붙은 여신들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모두 마고할미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공통으로 붙은 할미(할망·할머니)는 ‘한+어미’에서 비롯한 말이다. 옛말에서 ‘하다’는 ‘크다’는 뜻이므로 할미는 큰어미, 다시 말해 ‘모셔야 할 위대한 어머니’라는 뜻이다. 할미는 한자어 여신(女神) 이전에 여신을 부르던 이름이었는데 앞에 지역성을 지닌 말이 붙어 여러 할미로 분화되었다가 제주와 한반도가 한자문화권에 편입되면서 견당유학생이나 문헌을 통해 마고(麻姑)를 수용하였고, 마고가 힘을 얻자 이 땅의 여러 여신이 마고할미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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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할미가 부각되면서 마고할미와 연관된 다양한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이 형성된다. 강화자연사박물관 앞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거대한 고인돌이 있다. 이 고인돌을 마고할미가 쌓았고, 고인돌이 무덤이 아니라 마고할미의 집이었다는 전승이 있다. 전라남도 화순에도 수백 기의 고인돌이 있어 고인돌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 핑매바위다. 이 바위에는 운주사에서 천불천탑을 조성할 때 참여하려고 마고할미가 바위를 끼고 오다가 조성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팽개쳤다는 전설이 붙어 있다. 마고할미는 원시적인 암석 신앙과 아주 가까운 여신이다. 그래서 전국에 있는 많은 산성들에는 마고할미가 하룻밤에 쌓았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용인 마성리에는 신라 산성이 있는데 이름이 할미산성이다. 마고할미가 하룻밤에 쌓았기 때문이다. 문경에 가면 마고와 고모라는 두 여신의 성 쌓기 내기의 결과인 마고산성도 있다.
우리 이야기판에서 마고할미는 패배자로 전승되는 경우가 많다. 핑매바위도 천불천탑 세우기에 실패한 결과이고, 문경의 마고산성도 마고가 고모한테 패배한 결과다. 이런 패배를 극적으로 형상화한 이야기가 양양 인구리의 죽도에 있는 절구바위 전설이다. 이 전설은 어째서 죽도에 절구처럼 속이 파인 바위가 많은가를 설명한다. 마고할미는 마음대로 세상을 만드는 옥황상제의 권능을 부러워하다가 그 비밀이 둥근 돌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훔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옥황의 둥근 돌로 돌을 갈면 야심을 이룰 수 있는데, 들킬까 봐 파도 소리가 큰 죽도에서 돌을 간다. 그러나 완성할 만하면 파도가 쳐서 계속 실패한다. 죽도의 절구바위들은 그 실패의 흔적이다. 설문대할망 전설에도 보이는 마고할미의 실패담은 남성 영웅을 위해 산성을 쌓을 수밖에 없었던 여신의 문화적 퇴장과 무관치 않다.
![]() 마고할미가 던진 화순의 핑매바위 |
여신의 문화적 소외에 대한 반작용으로 창세 여신의 복원을 시도하는 신화 운동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도지』라는 텍스트다. 『부도지』의 마고는 지상 최고의 성인 마고성의 주인이자 창조자다. 마고는 선천과 후천의 정기를 받아 결혼 없이 궁희와 소희를 낳고, 이들로부터 천상의 남녀 네 쌍이 태어나는데 마고가 이들로 하여금 겨드랑이로 인간을 낳게 한다. 이렇게 시작된 인류로부터 환인·환웅의 역사가 출발한다. 그러므로 인류사와 한국사는 마고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천지왕이나 옥황상제, 또는 미륵님과 같은 남성 창세신의 신화가 굿판에서 구전되고 있는데 『부도지』는 마고가 그 지위에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구전신화 속에 전승되고 있던 마고(할미)의 문자로의 복구이다. 신화학에서는 이런 기획을 재신화화(remythologization)라고 한다.
이런 흐름이 작금의 여성주의나 민족주의적 종교운동과 결합하고 있다는 것은 할미의 역사에서 보면 의미심장한 문화현상이다. 이를, 설문대할망제나 마고예술제 또는 마고문화콘텐츠사업 등 다양한 맥락으로 재현되는 마고할미 현상을 통해 유·무형의 문화유산이 새롭게 생성되는 과정이라 불러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