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학의 공간
물가의 놀이터

  • 내 문학의 공간
  • 2025년 봄호 (통권 95호)
물가의 놀이터

1995년 경계구역으로 선포돼 철거를 시작한 산지천은 2002년 정비사업을 마무리하고 현재 모습으로 거듭났다.

 

어릴 때 살던 집 앞을 지나간 적이 있다. 검은 돌이 박힌 담 안에는 주인 가족이 사는 안채와 바깥채, 마당과 작은 정원이 있었고 우리 가족은 내가 태어나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그곳의 바깥채들에 머물렀다. 그 사이 나는 유치원을 두어 곳 옮기고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갔다. 집주인 부녀가 운영하는 식당 메뉴가 바뀌어도 부엌 입구에 걸린 노렌(のれん, 상점 입구의 처마 끝이나 가게 앞쪽에 치는 ‘상호가 든 막’)은 그대로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허물어가는 풍경을 몇 번이나 지나치며 나는 그곳에 살던 나와 가족의 모습이 간밤의 꿈처럼 떠올랐다 사라지는 일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 집은 칠성통이라는 곳에 있었다. 지금은 칠성로(七星路) 혹은 산지로라고 불리는, 고대의 흔적을 간직한 원도심이자 일곱 개의 제단이 있던 신성한 땅. 항구, 집창촌, 다방과 상점 등이 모여 한때 섬에서 가장 번성했으나 전쟁 이후 밀려든 피난민과 하릴없이 떠도는 예술가, 그들이 남긴 외상값, 가혹한 세금과 그림자 같은 가난으로 인해 잠깐의 번영을 남기고 기억 속으로 사라진 오래된 거리. 그곳에는 내가 처음으로 영화를 보러 간 극장이 있었고 화가가 직접 그리던 포스터와 매점, 계단이 있던 자리는 영업 여부를 알 수 없는 카페 간판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과거 산지천이 빨래터였음을 알리는 현판과 물허벅을 든 여인 석상

 

영험한 소문과 풍문 사이에서 유독 기억에 남은 건 산에서부터 이어져 동네를 가로지르는 산지천(山地川)이라는 이름의 개천이었다. 바닷길로 이어지는 개천은 오래전 섬에 살던 거인 여신의 발자국으로 시작되었다고도 하고, 그가 싼 오줌 줄기로부터 내려왔다는 얘기도 있다. 섬 구석구석 아득한 곳까지 여신의 몸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섬은 여신에게 속한 일부였다. 여신이 앉았던 자리에 만들어진 분화구와 여신의 손으로 뜯어낸 산봉우리, 그 봉우리가 옮겨갔다는 야트막한 동산까지 이곳 지형 곳곳은 어느 거대한 여자가 머물다 간 흔적으로 이루어진 기억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럼 이런 기억은 어떨까. 어릴 적 엄마를 따라 어느 습하고 어두운 굴 같은 곳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그곳은 동네의 여자들이 모여 빨래하거나 시간을 보내며 어린아이들이 물놀이하는 숨은 광장이었다. 시내 한가운데 굴이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그곳은 천에서 갈라진 물길이 끝나는 공터이거나 다리 아래 만들어진 간이 빨래터였던 것 같다. 젊거나 나이 든 여자들이 얇은 옷가지며 간단한 빨래를 물살에 비비는 동안 벌거벗은 아이들이 발목까지 오는 물가에 서서 시린 물을 서로의 몸에 끼얹던 광경은 꿈일까 실재였을까? 오랜 시간이 지나 나는 기억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 – 그곳을 기억할 만한 나이의 어른과 동년배들 – 에게 어릴 적 물가의 놀이터에 관해 물어보았다. 그곳을 기억하니? 어둡고 깜깜한 굴속의 야트막한 개천과 손이 얼 만큼 차가운 물에 발과 옷을 담그던 여자와 아이들을.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억을 떠올려 나에게 대답해 주었다. 기억하고 말고, 그곳은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던 곳이야. 오래된 물, 여신이 만들어준 축복받은 공터. 오래전 수많은 사람이 숨었다 사라진 무시무시한 공간… 아니, 그런 곳은 없었어, 네 꿈의 기억일 뿐이야. 그곳은 지금은 사라진 어느 도시 마을의 빨래터였고 너는 이제 아무도 떠올리지 않는 기억에 관해 묻고 다니는구나… 어떤 기억은 낡고 변질된다. 어떤 기억은 생성되고 창조되며 지난밤의 꿈처럼 아득하게 눈앞에서 재처럼 사라진다. 그곳은 무엇이었을까. 꿈일까 기억일까, 혹은 실재했을까 환상이었을까. 나는 오랫동안 손에 잡히지 않는 기억에 불을 밝히고자 사람들의 머릿속을 뒤집고 다녔다. 기억들은 혼잡했고 안개가 자욱한 숲처럼 헤매기 일쑤였으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누군가는 기억을 함부로 캐낸 나에 대한 짜증과 비난이 섞인 질문을 슬며시 꺼내고는 했다. 그런데 너는 왜 그런 기억을 묻고 다니는 거니?

 

정비를 완료한 하천

 

설치물에 적힌 말은 ‘빨리 뛰어 뛰어 가세요’라는 뜻이다.

 

이제 빨래터가 있던 곳은 색색 조명과 새로 쌓은 돌담, 세련된 형식의 다리가 놓여 과거의 옹색하고 비루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개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지어진 미술관과 신식 건물, 멋스러운 가게와 주차장이 이 거리의 새로운 정체성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내가 놀던 물가의 추억이 실재인지 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기억하는 일만이 과거를 살아있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혜
소설가, 1986년생
소설집 『북명 너머에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