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로 기록된 인류 최초 재난은 수메르 신화의 대홍수이다. 신들이 일이 너무 힘들다고 투덜대는 인간을 벌하기 위해 대홍수를 일으켰다. 대홍수답게 일곱 날 일곱 밤(혹은 40일) 동안 비가 세차게 내렸고, 산꼭대기까지 물에 잠겼다. 그런데 인류에게는 솟아날 구멍이 있었다. 인간을 창조한 신 엔키가 지우수드라 왕에게 신들의 결정을 몰래 귀띔했다. 지우수드라는 엔키의 말에 따라 즉시 방주를 만들어 인간과 동물을 구해냈다.
이번엔 중국 신화의 세계로 떠나보자. 요임금이 다스리던 시절, 하늘에 태양 열 개가 동시에 뜬다. 땅에는 손바닥만 한 그림자조차 없고, 돌덩이도 녹아내릴 지경이었고, 사람들 몸속의 피까지도 끓는 듯한 상황이 됐다. 이때 하늘신 제준의 명을 받은 예(羿)가 해결사로 등장한다. 활로 태양을 쏘아 떨어뜨려 재난을 물리친다. 이러한 신화들은 실재 사건과 관련이 있다. 수메르 홍수신화는 기원전 2,900년쯤 메소포타미아 슈르파크에서 발생한 대홍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류는 지구별에 출현한 이후 수많은 재난을 겪었다. 그리고 재난의 경험에 상상력을 덧붙여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 이야기는 후손에게 전해지면서 신화가 되었다. 따라서 신화와 문학의 바통을 이어받은 서사 매체인 영화가 재난을 이야기 소재로 삼는 것은 자연스럽다. 게다가 영화는 ‘움직이는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각 매체다. 음향·음악·연기까지 더해지면 재현 효과는 더욱 커진다. 영화는 재난의 스펙터클을 묘사하는 데 최적화된 매체인 셈이다.
영화가 다루는 재난의 종류는 시대마다 다르다. 21세기 직전에는 지구 멸망을 다룬 영화들이 붐을 이루었다. 지구가 혜성과 충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최근에는 기후 위기와 관련한 영화들이 자주 제작된다. 대중 영화로는 <투모로우>(2004), <설국열차>(2013), <콜로니: 지구 최후의 날>(2013), <지오스톰>(2017) 등이 있다. 대부분 작품이 빙하기를 배경으로 한다. <인터스텔라>(2014)와 <돈 룩 업>(2021)은 전 지구적 재난에 대처하는 인류의 자세와 해결책을 탐색한다.
기후 위기 문제를 다룬 영화 중에는 다큐멘터리의 비중이 꽤 크다.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의 강연과 환경 보호 행적을 정리한 <불편한 진실 1·2>(2006·2017), 미국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지구 온난화 문제가 발생한 지구 곳곳을 찾아가는 <비포 더 플러드>(2016), 스웨덴의 젊은 기후 활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활동을 담은 <그레타 툰베리>(2020)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다큐멘터리들은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과 방지책을 다채롭게 탐색한다.
빙하기가 현실화한 지구의 ‘가까운 미래’, <투모로우>
<투모로우>는 기후 위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첫 번째 대중 영화다. 이 영화를 연출한 롤랜드 에머리히는 할리우드에서 재난 영화 전문가로 첫손에 꼽히는 감독이다. <인디펜던스 데이>, <고질라>, 등의 영화를 만들었다. <투모로우>는 인물·서사·주제 등 여러 측면에서 기후 위기 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다. 지구 온난화를 다룬 재난 영화의 기본 요소와 설정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자와 정치인, 빙하기, 가족애와 자기희생을 뼈대로 한다.
<투모로우>는 지구 온난화가 현실화한 최악의 상황을 제시한다. 주인공은 기상학자 잭 홀 박사. 그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고, 바닷물이 차가워지고, 해류 흐름이 바뀌고, 지구 전체가 빙하로 뒤덮이는 거대한 재앙이 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실제로 지구촌 곳곳에서는 허리케인·우박·토네이도·쓰나미·눈 폭풍과 같은 기상 이변이 잇달아 발생한다. 북반구는 급격하게 빙하기에 접어들고, 영하 100도의 혹한이 미국을 덮친다. 한편, 잭의 아들 샘 홀은 퀴즈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뉴욕에 갔다가 얼음 지옥에 갇힌다.
<투모로우>에는 주목할 만한 공간이 두 곳 있다. 우선 샘 홀이 혹한과 눈 폭풍을 피해 들어간 도서관이다. 한 인물은 도서관이 “인류 최대의 발명”인 문자의 보고라고 말한다. 추위에 떨던 샘 홀은 책을 태워 불을 피운다. 그러자 구텐베르크 성경을 들고 있던 그는 “책은 절대 안 된다”라고 반대하고, 샘 홀은 “얼어서 죽고 싶어요?”라고 반문한다. 반대했던 인물은 샘 홀의 주장을 즉각 수용한다. 문자는 인류 문명의 시발점이다. 하지만 이성보다 생존이 먼저다.
미국-멕시코 국경은 또 어떤가? <투모로우>에서 미국 대통령은 북반구 주민들을 남반구로 이주시키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이 결정을 실행하는 데는 걸림돌이 있다. 멕시코가 국경을 폐쇄한다. 불법 입국자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현실과 완전히 대비되는 상황이다. 결국, 미국이 남미의 부채를 전액 탕감해 주는 조건으로 멕시코 국경 폐쇄가 해제된다. 기후 위기 앞에서 초강대국 미국의 위상도 초라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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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북극곰이 공존하는 ‘오래된 미래’, <설국열차>
<설국열차>에는 빙하기 이전, 열차에서 보낸 빙하기 17년, 빙하기 이후의 세계가 모두 등장한다. 빙하기 이전은 프롤로그, 빙하기 이후는 결말에서 제시된다. 프롤로그는 빙하기가 시작된 원인을 알려준다. 인류가 지구 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CW-7’을 대량 살포했는데, 그 부작용으로 혹독한 재앙이 닥쳐온다. 모든 생명체가 멸종되고, 1,001량의 열차 안에서만 사람이 산다. 결말은 열차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암시한다. 따라서 <설국열차>에서는 지구 온난화, 파괴된 열차와 살아남은 아이들, 북극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설국열차>의 열차 내부는 인류 역사의 발전 과정, 수직적인 계급 구조 등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 견고한 시스템은 빙하기의 종말과 함께 무너진다. 보안 설계자 남궁민수는 깨진 창문을 통해 들어온 눈 입자를 발견하고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눈은 얼음이 녹고 있다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남궁민수는 또 혁명군 지도자 커티스에게 “내가 뭘 봤는지 알아?”라고 질문하는데, 그가 본 것은 북극곰일 가능성이 크다. 열차 밖의 생태계가 복원됐고, 지구는 빙하기 이전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인류 역사의 순환과 반복으로 확장된다.
<설국열차>의 빙하기는 신화 속 대홍수를 연상시킨다. 창세기에 나오는 대홍수와는 원인·과정·결과가 거의 같다. 실제로 <설국열차>는 생존자들이 탄 열차를 방주에 비유한다. “The previous few who boarded the rattling ark are humanity’s last survivors”(덜컹거리며 달리는 방주에 탑승한 몇 안되는 이들이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들이다). <설국열차> 빙하기와 창세기 대홍수가 발생한 원인은 인간의 탐욕과 죄악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는 화석연료의 무분별한 사용에 따라 온실가스가 과다 배출되면서 발생했다. 그런데 화석연료의 사용량은 산업혁명 이후 급증했다. 산업화·공업화가 환경 파괴의 원인이 된 것이다.
<설국열차>에서 어린 요나가 공업용 인화 물질인 크로놀 덩어리에 불을 붙이자, 열차의 출입문이 부서진다. 여기에 눈사태까지 발생하면서 열차는 철로를 이탈해 전복된다. 하지만 크로놀 폭발이나 눈사태가 없었다고 해도 열차는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 조짐은 부품의 손상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열차의 설계자이자 지배자인 윌포드는 어린아이로 부품을 대체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만다. <설국열차>에서 쇠로 이루어진 열차가 기계문명의 상징물이라는 점은 함축적이다. 그리고 결말에 등장하는 이누이트의 후손인 요나, 어린 티미, 북극곰은 인류가 ‘오래된 미래’로 되돌아갔음을 의미한다.
기후 위기 영화가 욕망과 무지에 보내는 경고
“아무도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기온이 상승하고, 해류가 바뀌고, 빙하가 녹는 기상 이변이 속출하지만, 아직 최악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지오스톰>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인 기상학자 제이크의 딸이 전하는 내레이션).
기후 위기 영화에서 인류가, 특히 정치인이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는 이유는 욕망과 무지 때문이다. <지오스톰>에서는 세계 정부 연합이 인공위성 조직망을 통해 날씨를 조절하는 ‘더치보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런데 미국 국무장관이 ‘더치보이 프로그램’의 운영권을 유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그 결과, 프로그램에 오류가 발생해 두바이의 쓰나미, 홍콩의 용암 분출, 모스크바의 폭염과 같은 기상 이변이 속출한다. <투모로우>에서도 지도자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선거와 경제에 미칠 영향을 핑계로 과학자의 경고를 무시한다.
물론 기후 위기를 다룬 영화는 결말에서 희망을 제시한다. <투모로우>에서는 자연 현상에 의해 살인적인 빙하기가 끝나고, <설국열차>에서는 17년이 지나자 지구 온도가 상승하고, <지오스톰>에서는 정의로운 형제에 의해 정치인의 음모가 봉쇄된다. 문제는 현실 세계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기 집권을 시작하자마자 “기후 위기는 사기다”라고 말하면서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했다. 그의 정책이 지구별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의 크기는 가늠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투모로우>의 결말처럼 미국이 곤경에 처해도 박수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화에서는 재난의 원인이 다소 가볍다. 수메르 신화에서는 신들이 인간의 시끄러운 불평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자 홍수를 일으켰고, 중국 신화에서는 열 개 태양이 순서대로 뜨는 것이 심심해서 한꺼번에 떠오르는 장난을 하는 바람에 가뭄이 발생했다. 또 신화에서는 재난이 곧 완전한 파국을 의미하지 않는다. 창세기에서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대홍수가 끝난 뒤에는 인류가 새로 탄생한다. <설국열차>에서도 마찬가지다.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사실 100% 희망적인 엔딩을 생각하고 찍었다. 한 시스템이, 한 체제가 종말을 고했고, 인류의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현실 세계에서도 영화에서처럼 기후 위기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고, 인류는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 기후 위기 영화에서는 영웅적인 과학자에 의해 혹은 자연 현상에 의해 재난이 해결된다. 현실 세계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 더구나 지구 온난화의 피해는 전 지구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그럴수록 인류는 기후 위기, 지구 온난화를 소재로 한 영화가 보내는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과학자와 환경 운동가들의 외침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기후 위기 영화의 상상력이 지구별의 미래를 지키는 작은 몸짓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