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③ 사랑하게 하는 힘

  • 기획특집
  • 2025년 봄호 (통권 95호)
③ 사랑하게 하는 힘

어쩌면 우리는 그저 솔직해져야 하는 게 아닐까? 문명이 우리에게 준 혜택들, 즉 편리함과 풍요로움과 합리성, 속도에 우리들 자신이 완전히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그래서 눈앞에 닥쳐있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니, 실은 제대로 들여다볼 능력조차 없다는 사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들을 말이다. 어쩌면 해결 방법은 꽤 간단한지도 모른다. 이 시대 소설이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명백한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바로 폭력적 문명의 중독자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일 말이다. 눈을 뜨고 있지만 현실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자연과 인간이 다시 연결되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이 다시 만나야 한다. ‘지극히 내성적인’ 소설가(사실 나는 기후 위기 소설을 쓰기 전에 심리묘사 전문 소설가였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 쓰기 위해 입시 공부하듯 책상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가 갑자기 투사가 되어 동료들을 만나고, 활동가를 만나게 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연결되지 않고는 이 재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진실 말이다. 기후 문제가 이토록 심각해진 원인을 나는 ‘관계의 단절’에서 찾는다.

‘기후정의 작가행동’은 올해 여름 처음 결성된 시인과 소설가, 평론가들의 모임이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현실이 아닌 미래의 장소를 꿈꾸는 일이기에, 존재에 대한 폭력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고 그에 맞선 상상력과 용기를 세상에 내보내는 일이기에, 문학을 하는 사람이면서 이윤이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동료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문학인은 적어도 물질적 욕망에 의해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히지 않고 세계를 고민하는 정신력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각 개인이 아무리 훌륭한 사고와 가치관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난관이 작용했다. 이 시대의 개개인들은 타인과의 소통 능력을 잃어버렸고, 다른 누군가와 만나 진짜 이야기 나누는 방법을 모른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혼자서 작업하고, 이메일과 스마트폰을 통해 연결된 채 사람의 얼굴을 대하지 못하고 일한다. 편집자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책을 출간하는 경우조차 있다. 그렇게 더 많은 책을 더 빨리 출간하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인간과 인간의 연결이라는 측면에서는 점점 더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는 기분이다.

기후정의 작가행동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기후정의 행진에 참여한 일이다. 우리는 헌 옷가지와 이불로 깃발을 만들어 시위에 참여했다. 모두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었지만 ‘서로의 작품에 대한 믿음’이라는 신뢰가 있었고 이미 연결되어 있었음을 확인했다.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처음 만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함께 지구를 살리는 글을 쓰고, 강연하고, 집회에 나가고, 집 근처에서 쓰레기를 줍기로 했다. 탈근대 소설을 읽고 쓰기로 했다. 함께 걷고, 이야기 나누며, 일하고, 공부하기로 했다. 이 과정은 거대한 댐을 무너뜨리고 생태계를 복원하는 일과 비슷해 보였다.

작년 여름 기후 위기 강연장에서 제로웨이스트 실천에 관해 강연하던 중, 예전에는 어떤 물건을 살 때 아무런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멀리 떨어진 제로웨이스트 샵에서 포장재 없이 물건을 구하면서 존재와 존재가 연결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설명하자, 그러니까 기후 위기의 원인을 소통의 단절에서 찾으려고 하자, 한 학생이 조금 불만스럽다는 태도로 내게 되물었다. 내가 보기에 그 학생은 기후 위기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았고, 관련된 서적을 충분히 읽었던 것 같다. 그는 거의 발제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하게 기후 위기를 설명했고, 내가 기후 위기를 말하면서 산업혁명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지적하면서 약간의 항의 조로 그 부분을 보완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기후 위기의 근본 원인은 산업혁명이 아니다. 플랜테이션 농업도 아니다.

우리 삶은 언제나 틀렸다. 옳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작은 폭력을 저지르며 살았고, 살고 있다. 상대방이 아파하는 걸 보면 그제야 태도를 수정한다. 그 행동과 반응 속에서 조화가 만들어지고 보폭과 거리가 정해진다. 그런데 이 작은 폭력이 거대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폭력이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은, 우리가 상대(자연)의 반응을 깡그리 무시한 데 그 원인이 있다. 자연이 아무리 비명을 질러대도 우리는 태도를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성장과 개발, 경제성과 이윤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밀어붙인다. 우리는 결국 지구생태계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말았다.

우리는 왜 우리가 버린 생수병 뚜껑을 먹고 죽은 앨버트로스에게 사과하지 않는 것일까? 왜 우리에게 30년의 생을 포기하고 석 달만 살고 죽은 돼지에게 고마워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이토록 무례한가? 우리는 왜 우리가 더 편하게 뭔가를 사기 위해서 야간 노동자들이 죽어가는데도 로켓배송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이 모든 지구상 문제들이 기후 위기의 문제와 완전히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조차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공생하는 방법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기후 위기 소설을 쓰면서 나는 처음으로 출판사에서 소설을 반려받았다. 작가 활동을 한 13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평소와 달리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편집자는, 이번에 내가 보낸 소설이 이제까지 내가 출간한 소설들과 달라, 그대로 책을 내는 것이 불가능하겠다면서 전체적인 수정을 요구했고, 나는 그 원고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기후 위기 문제에 마음이 조급해져 있었고 주제를 이야기 속에 녹여내야 한다는 원칙마저 잊어버리고 소설 속에 본격적인 잔소리를 써대었다.

원고가 되돌아오는 경험은 소설가로서 부끄러운 일이겠지만, 나에게는 이 일화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이 주제에 대해서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열정에 눈이 가려 십 년 경력을 무너뜨릴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원고를 보냈다는 사실이 심지어는 흐뭇하게까지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첫사랑의 고백과 비슷했다. 너무 떨려서 제대로 된 발음조차 하지 못했고, 퇴짜 맞았다! 하지만 적어도 나 자신이 기후 위기에 대한 글을 쓸 마음으로 들끓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건 내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는 뜻이었다. 이제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히고 상대가 납득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말해야 한다는 사실만 인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문학이 세계에 영향력을 미쳐야 할 중대한 순간이다. 사실 문학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이 세계가 문학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기 말에 도취한 달변가와 연설가에게 관심이 없는 청중을 떠올려보자. 이 세계는 아직 문학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문학은 들리지 않는 소리로 점점 더 완전무결하게 말하고 싶어 한다.

기후 위기를 알고 싶어서 백 권이 넘는 책을 뒤적이면서 나는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물결과 같은 우울과 절망을 경험했다. 수없이 책장을 다시 덮으면서도 목을 졸라오는 메시지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죽은 아기 새에게 플라스틱 조각을 먹이는 어미 새와 나 자신을 동일시해 버렸고 이후로 나에게 플라스틱은 흉기였다.

그러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을 만났는데, 그 책은 다른 책들과 뭔가 달랐다. 그 책은 이 참혹한 소식을 독자들이 견딜 수 있도록 정서적으로 충분히 고려하고 있었다. 그 책 속에도 나무가 죽고, 돼지가 죽고, 바다가 죽는 이야기가 똑같이 쓰여 있었지만, 절망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견디는 힘이 담겨있었다. 용기와 희망과 사랑, 강렬한 의지를 느끼며 마지막 장까지 무사히 읽을 수 있었고, 울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는 기후 위기 소식을 더 이상 뉴스를 통해서, 혹은 기사를 통해서, 무엇보다 대중매체를 통해서 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일을 시인이, 소설가가, 평론가가 할 수 있고, 아니,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나는 과학자와 기자들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과 소설가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그것이 우리가 이제까지 해온 일이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

지금까지 문학이 이미 말해온 것들을 독자들에게 다시 말하기 위한 시간과 공간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는 다른 4명의 소설가와 인류세 소설 강의를 준비하고 있다. 많은 포스트모던 작품들이 발표되었지만, 현실은 여전히 근대에 머물러있다. 한집에 사는 가족들의 시간이 각기 다르듯, 창작자와 독자들의 시간도 자주 비껴 나간다. 틀어진 두 개의 빗금을 다시 세워 두 개의 선이 다시 만나게 하는 것, 나는 그것이 기후 위기 시대 문학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와 소설을 읽는 것, 더 오래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 문학을 접점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게 하는 것이 기후 위기 시대 문학의 할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일들을 더 잘하면 된다. 실은 이 말은 문학에 대한 칭찬과 응원이 아니라 냉혹한 비판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 것, 더 이상 소설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나는 기후 위기를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한다(그런데 사람들이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이 과연 누구의 탓이지?).

시와 소설이 밀려난 자리를 다시 되차지해야 한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는 책장에 소설 전집이 꽂혀 있었는데, 지금 우리들의 집에는 책장 대신 거대한 모니터가 들어앉아 있다. 창밖을 보는 대신 인터넷 세상에 중독되어 있다. 기사와 동영상에 ‘좋아요’와 슬픈 표정의 이모티콘을 누르는 일로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참담함을, 어마어마한 절망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개인용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각자의 집에 들어앉은 채로 전 지구적 거대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만나야 한다.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야, 사람과 자연이 다시 연결될 수 있다.

단절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니다. 만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자. 그게 내가 칠팔 년간 기후 위기를 고민하면서 얻은 단 한 가지의 해답이다. 우리가 만나야 하는 타이밍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 말이다. 우리는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한다. 사람과 자연이 만나야 한다. 만나서 우리가 잃어버린 게 뭔지 이야기하고, 그걸 다시 찾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을!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재난 속에는 언제나 유토피아가 있었고, 지금 우리의 일상이야말로 진정한 재난이다. 당신은 이미 기후 재난 속에서 천국을 만들어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시와 소설이 지구를 사랑하는 힘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이 세계가 잃어버린 상상력과 감수성의 자리를 문학이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안다.

최정화
소설가, 1979년생
장편소설 『없는 사람』 『흰 도시 이야기』 『메모리 익스체인지』, 중편소설 『부케를 발견했다』,
소설집 『지극히 내성적인』 『모든 것을 제자리에』 『오해가 없는 완벽한 세상』, 산문집 『책상 생활자의 요가』 『나는 트렁크 팬티를 입는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