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는 만 이천 년 동안 온화했던 홀로세가 끝나고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능력으로 작용하는 새로운 지질 시대를 일컫는 용어이다. 즉 인간이 화산 폭발이나 지진과 같은 위력을 지구에 행사해 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기후변화로 인해 물 부족, 식량 부족, 해수면 상승 등으로 이어지는 생태계 위기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하면서 공생 윤리와 생태 문명으로 전환하기 위한 생태 계급의 등장을 사유하게 하는 개념이다. 인류세는 우리에게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과 완전히 다른 앎을 요청한다. 특히 인류세에서 인간과 비인간들의 공생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인류세를 인정하지 않는 반생태 세력과 전선을 형성하는 새로운 생태 계급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구적 재앙에 대한 공포와 염려를 멈추고, 인류세라는 용어를 사랑함으로써 인류세 이후 지질학적 시간을 기대하기 위해서다.
공생이란 무엇일까? 편혜영의 소설 『재와 빨강』(2010)에는 전염병이 창궐한 타국에서 고립된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소설 주인공을 그 남자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파국적 상황을 주도하는 힘이 쥐와 쓰레기와 같은 비인간 존재들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항상 인간 주변부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비인간 존재들이 주인공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인류세를 정의하는 다양한 근거들이 있지만, 인간은 어떤 지위에 있는지, 우리라고 말할 때 ‘우리’는 누구를 지칭하는지에 대해 급진적 응답을 요청하는 시대가 인류세라고 할 수 있겠다.
편혜영의 소설 『재와 빨강』은 다국적 방역업체 약품개발원인 ‘그’가 파국적 상황에서 쥐와 함께 생존하는 이야기다. ‘그’는 전염병과 지진이 발생하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C국으로 발령받고 출국한다. ‘그’는 감기 탓인지, 소독약 탓인지, 전염병에 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기침을 계속한다. 이로 인해 전염병자로 의심받아 쓰레기 천지가 되어버린 도시의 제4구 아파트에 격리된다. 도시의 지하 하수도에서 살아남게 된 그는 쥐 잡는 기술 때문에 생존하게 된다. 이 소설의 플롯을 주도하는 것은 ‘그’와 ‘쥐’다.
소각이 막 끝난 검은 재와 잔불이 남은 쓰레기 더미에서 갓 쏟아져 나온 쓰레기를 뒤지고 있노라면 한 마리 쥐가 된 느낌이었다. 간신히 쓸 만한 것을 건져내면 온몸이 재투성이가 되어 회색 털의 쥐와 다를 바 없어졌다. 무엇보다 쥐들이 쓰레기 때문에 먹고사는 것처럼 그와 공원의 부랑자들 역시 쓰레기 때문에 먹고 살았다.
그는 쓰레기를 뒤지면서 생존을 위한 경쟁자가 부랑자들이 아니라 쥐라는 것을 실감하곤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쥐가 자신과 경쟁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쥐는 항상 그보다 빨랐다. 쥐는 그가 찾지 못하는 것을 찾았고 그가 먹지 못하는 것을 먹었으며 그가 먹을 수 없는 것을 먼저 먹었다. 그가 팔을 뻗을 수 없는 곳에도 거리낌이 없이 갔으며 그가 갈 수 있는 곳에는 항상 먼저 갔다.1)
그와 쥐는 쓰레기 더미에서 음식을 얻는다. 쓰레기는 이들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쓰레기 더미는 이들에게 필요한 곳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특별한 존재일 수 있다. 신유물론은 기존에 사물을 죽은 존재로 인식했던 사유를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사물의 행위 능력을 긍정하며 인간 중심적으로 구성된 관계를 평평한 존재론적 관점으로 전환하려는 철학이다. 특히 제인 베넷은 물질의 활력을 옹호하면서 쓰레기의 생동성을 사물-권력(Thing-Power)으로 표현한 바 있다. 쓰레기는 버려진 물건들의 무덤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무력한 물질이었다가 살아 있는 활력가”로 언제든지 전환될 수 있다. 수십억 미생물이 활동하고, 메탄가스와 이산화탄소가 작용하면서 그들은 화재를 야기할 수도 있지 않은가?2) 그런 점에서 쓰레기는 죽은 물질이 아니라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껏 인간은 쥐를 혐오하고, 쥐 역시 인간을 기피했다. 인간은 쓰레기를 버리고 태워야 할 것, 죽어 마땅한 존재로 여겼다. 근대적 인간은 비인간 존재들을 도구가 아니라면 불필요한 나쁜 것으로 여기며 지구를 훼손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소설에서 그-쥐-쓰레기는 혐오와 기피, 갈등과 부정의 관계가 아니라, 혐오하면서도 협력하고 경쟁하는 이상한 얽힘 관계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들은 생태적으로 공생의 네트워크를 창설하는 주도적인 행위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소설 주인공은 단지 ‘그’가 아니라 쥐와 쓰레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세에서 ‘우리’란 인간종만을 뜻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나는 우체국 관사에서 산 적이 있다. 오래된 목조 건물 천장에서 쥐가 후드득 뛰어다니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내 방에 어린 손님이 찾아왔다. 작은 생쥐였는데, 사람을 처음 본 것인지는 몰라도 놀라지 않고 가까이 오더니 나를 탐색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를 부르지 않고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낯설게 생긴 어린 동물이 맑은 눈빛으로 나를 기웃거리는 게 신기했던 것 같다.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낯선 생태적 앎으로 함께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쥐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 쓰레기도, 나무도, 컵도, 종이도, 고양이도, 달팽이도, 오로라도 충분히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관계는 제한되었거나 죽어 있다. 인류세는 이들과 살아있는 관계, 존재론적으로 평평한 관계, 복수적 공생 관계를 요청한다.
소설에서 쥐와 ‘그’는 생명을 가진 존재일 뿐, 인간이 더 우월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능력으로 따진다면 쥐가 그를 앞질렀다. 쥐는 무엇이든 빠르게 움직여 음식을 먹을 수 있었지만, 그는 쥐보다 늦었다. 쥐는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었지만, 그는 여러 번 탈이 나서 고생해야 했다. 파국의 상황에서 쥐는 인간보다 민첩하고 지혜로우며, 강한 존재였다. 물론 늘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쥐잡이 능력을 발휘하여 지상 세계로 편입될 수 있었다. 그는 쥐를 잡을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존재다. 그런 점에서 쥐와 그는 ‘기이한 공생’ 관계에 있다고 할 만하다. 일상적이지만 낯설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와 쥐의 역사는 얽혀 있으며, 낯익음과 낯섦이 공존하는 복잡한 관계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상하고 역겹고 낯설며 매혹적인 사유의 경로를 만들어가는 일인 것이다.
생태를 말할 때 공생은 조화롭고 협력적이고 사랑이 관통하는 이미지를 가정한다. 그러나 공생은 반드시 조화롭고 사랑스러우며 안전한 것은 아니다. 공생은 폭력적이고 낯설며 무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생은 이중적으로 얽힌 복수적인 것들의 펼쳐짐이다. 티모시 모턴은 인류세의 생태학을 밝은 생태학이 아니라, ‘어두운’ 생태학으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어두운 생태학은 생태학적 알아차림인데, 어두운 우울함, 어두운 기이함, 기묘한 기묘함으로 표현하였다. 생태적 행위자들은 서로를 이미 알려진 앎과 낯선 앎이 비틀린 고리처럼 연결된 관계를 맺는다.3) 그러므로 쥐, 나무, 쓰레기, 오로라는 청록파 시인들이 자연을 노래한 것처럼 인간 바깥의 이상적이며 아름답고 조화로운 존재들이 아니다. 그것은 어두운 달콤함, 낯선 앎처럼 인간으로 환원되지 않는 복잡성이 개입되어 있다. 『재와 빨강』에서 그와 쥐, 쓰레기와 하수구가 새로운 어셈블리지(assemblage)4)를 형성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의 관계는 협력적이거나 배타적이고, 죽이면서 살리고, 숨기면서 드러나며, 현실적이면서 잠재적인 기이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인류세를 불안에서 사랑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생태적 공생 윤리뿐 아니라, 생태 정치적인 힘이 필요하다. 누가 인류세를 사랑할 것인가? 누가 인류세를 끝내고 생태 문명으로 전환할 것인가? 누가 하는가?
브뤼노 라투르는 그 세력을 ‘생태 계급’으로 명명했다.5) 계급이라는 용어가 갖는 난점들을 무릅쓰고 생태 계급을 호명하는 이유는 인류세의 적대적 전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급박함 때문이다. 생태 세력이 계급화되어야 할 이유는 소규모 운동에서 머물지 않고, 이들이 다수파가 되어 적대 세력과 싸우며 생산 중심의 지구 경제를 인간-비인간의 거대한 비근대적 생태 문명으로 전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인류세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 때문에 모호한 입장에 자주 설 것이며, 생태 계급에 연루된 쥐와 강과 소나무 같은 비인간 존재들에게 투표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생태 계급은 형성 중이며, 트럼프와 같은 기후 위기 부정론자와 전선을 그으며 싸우고 있다. 인류세에는 생태를 중심으로 적이 있고 친구가 있다. 생태 계급은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운동으로 제한하지 말고, 다수파로 정치화해야 한다. 물론 기존 근대의 정치와는 다른 형태가 될 것이다. 싸움은 지구적이지도 로컬적이지도 않다. 가이아 지구란 전체도 아니고 부분도 아니며, 천 개의 이름을 가진 복수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집에서 공생하는 박테리아, 쥐, 먼지, 냉장고, 쓰레기, 물과 공기, 책상, 냉장고, 식물들은 당신과 더불어 비참한 근대적 생산 시스템에서 벗어나 비근대적 생성 시스템을 만들어가야 한다. 친구여, 그대는 인류세의 생태 전쟁에서 어디에 설 것인가? 누구와 연결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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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혜영, 『재와 빨강』, 창비, 2010, 118~119쪽
2) 제인 베넷, 문성재 역, 『생동하는 물질』, 현실문화, 2020, 44쪽
3) 티모시 모턴, 안호성 역, 『어두운 생태학』, 갈무리, 2024, 20~21쪽
4)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작품에 쓴 일상생활 용품이나 자연물 또는 예술과 무관한 물건을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하여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를 이르는 말. 상징, 몽환, 괴기적 효과를 얻기 위해 돌, 나뭇조각, 차바퀴, 머리털 따위를 쓴다(표준국어대사전).
5) 브뤼노 라투르, 니콜라이 슐츠, 이규현 역, 『녹색 계급의 출현』, 이음, 2022. 이 책은 생태 계급을 녹색 계급으로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