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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는 악의적인 공동체가 한 사람을 얼마나 손쉽게 무너트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 내용을 간단히 줄이면 이렇다. 수년간 지속되어 온 모임의 일원들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대단하지 않은 이유로 괴롭히고, 결국 그의 죽음에까지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작품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는 대신 죽은 인물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 사람이 그리울 거예요.”
이 짧고 예리한 소설이 그리는 것은 공동체가 혐오를 조장하고 작동시키는 방식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공동의 적을 만들어내는 이 과정은 아주 교묘하게 묘사된다. 금연에 성공했다거나, 재혼 상대가 전처보다 못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공동체 안에서 작은 차이를 발견하고, 대단치 않은 약점을 적극적으로 조롱한다. 이 과정에서 공동의 적을 괴롭힐 심리적 명분이 생겨난다. 명분이 있기에 죄책감 없이 악의를 드러낼 수 있고, 괴롭힘의 수위는 막힘없이 높아지는 것이다.
1980년대에 쓰인 이 소설은 2020년대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사실 우리의 오늘이 더욱 심각하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인터넷 게시판이나 인터넷 뉴스 댓글 등은 물론이고 잠시만 우리 주변을 살피면 명분을 내세운 혐오가 넘쳐나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과 다른 정체성을 지닌 이들에 대한 공격과 혐오가 어느 때보다 심하게 드러나는 시대를 우리는 통과하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위협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기도 하다. 여성·장애인·트랜스젠더·이민자를 적대하는 사회는 결국 자기 자신을 적대하는 데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제목이 분명하게 가리키듯 이러한 집단적 혐오에서 중요한 것은 타자와 ‘우리’를 분리하는 감각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그 차이가 얼마나 중대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소설 속 인물들은 변호사·세무사·큐레이터·기자 등 ‘중산층’으로 손쉽게 분류할 수 있을 동질적 집단에 속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동질성을 지닌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우리’는 차이를 얼마든지 발견하고 또 창조할 수 있는 ‘사유’의 힘을 지니고 있다.
데리다가 말한 바와 같이 ‘사유’란 미지를 기지의 것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미지의 존재를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과 나란히 두고 그 차이를 분별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그것을 명명하도록 한다. 사유가 지닌 그 통제적 역량이 ‘우리’를 만들어내고, 또한 타자를 구성하고야 만다. 그렇기에 데리다는 오래도록 ‘환대’에 대해 고민했다. 적대와 환대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마주할 수 있을까 고민해 온 것이다.
데리다는 환대 행위란 시적일 수밖에 없노라 이야기한다. 그것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내 원수 또한 그렇게 하라는 예수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단지 타자를 아끼고 귀하게 대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몸과 같이 하라’는 요청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타자와 나 사이의 분별이 해체되어야만 한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시적 상상력이리라.
오랜 편견과 달리 시의 은유란 사실 동질성의 힘만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은유는 동질성을 약화하기도 한다. 사과 같은 내 얼굴, 이라고 할 때 우리는 사과도 얼굴도 아닌 그 중간의 어중간한 무엇인가를 마주한다. 우리 각자가 떠올릴 수 있는 사과와 얼굴의 중첩은 모두 다른 것이 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사과와 얼굴에 대한 우리의 사유와 분별은 흐릿해지는 것이다. 어쩌면 타자를 대하는 우리의 방식 또한 이처럼 시적인 방식이어야 할지 모른다.
‘시적 상상력’을 회복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이 무한한 적대의 연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쉽게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이미 노정된 비극적 미래를 벗어나기 위해(트럼프 대통령은 얼마 전 미국 이민세관단속국을 통한 대대적인 불법 체류자 검거를 실시했고, 그 과정에서 국가적 규모의 인종 차별과 혐오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다 건너 이야기만으로 그치지는 않으리라) 계속 고민하지 않을 수도 없다. 폴란드의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시 「두 번은 없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은 거의 비슷하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다. 그것들이 뒤섞이며 그 구분이 해체되는 순간을 우리 또한 꿈꿔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