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활성서사 안미영 기자 |
“길을 잃는다는 것은 곧 새로운 길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아프리카 속담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은 소설을 쓰는 내내 방황했고, 앞으로도 방황할 것”이라고 했다. 훌륭해 보이는 사람들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부단히 노력해서 그 자리에 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많은 역사적 사건이나 위인들은 우연히,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며 방황하는 사이에 어떤 일을 이루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루었다’는 결과 값을 상정했을 때 ‘방황’이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방황’을 해야지만 우리는 무엇인가에 도달할 수 있다.
청(소)년들에게 방황은 필수
방황은 부정적이고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나는 오히려 젊을수록 방황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황(彷徨)의 뜻은 목적지가 없어서 이리저리 헤매는 형상이다. 청(소)년들은 당연히 미래에 대한 목적지가 아직 없는 것이 당연하고, 이리저리 헤매면서 궁리해 봐야 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나에게는 무엇이 맞는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성장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그러려면 좌충우돌 여기저기 부딪치며 여러 가지 일들을 겪어야 한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시야가 트이지 않았다면 다양한 경험을 통해 부딪쳐봐야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진동의 폭, 부딪쳤을 때 느끼는 자신의 모습, 부딪친 사물·사건·사람에 대한 강도 등을 알 수 있다. 부딪쳐야 자신이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존재인지, 스펀지처럼 충격 흡수가 가능한지 알게 된다. 교육학자 존 듀이는 학습자들에게 의미 있고 그들에게 중요한 경험을 제공하는 상황에서 지식과 아이디어가 창출된다고 했다. 평생 사람들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지만, 특히 청소년기는 발달 과정에 있기 때문에 이런 활동이 더욱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청소년들은 어떤가? 학교생활과 공부, 대학 진학이라는 뻔히 정해진 길에 묶여서 천편일률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으로 혹은 스터디카페로 가는 삶은 너무 단조롭고 획일화되어 있다. 여기에서 어떤 경험과 부딪침이 있겠는가?
더욱이 부모들은 자녀의 수가 적기 때문에 자녀들을 애지중지하느라 다양한 경험의 장으로 아이들을 보내지 못한다. 짧은 거리도 차로 태워주고 데리러 가며, 친구와의 놀이도 부모들이 허락한 범위와 장소 한도 내에서만 가능하다. 물론 이전보다 거리는 복잡해서 차량으로 인한 사고가 잦고, 이웃 공동체는 파괴되어 낯선 이들이 훨씬 많은 지역사회에서 어떤 흉악한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24시간을 부모가 관리(혹은 감시)하는 체제에서 아이들은 과자 하나 먹는 것, 친구들과 가까운 곳에 방문하는 것은 물론, 어떤 과목을 배우고 어떤 진로를 결정할지까지 모든 결정권을 부모에게 의지하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고등학교 현장 얘기를 해보겠다. 한번은 학교 동아리 활동으로 시내에 위치한 박물관에 모이기로 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 내가 전체를 인솔해서 가지 않고 학교에서 박물관까지 오는 방법을 안내한 후 알아서 오도록 했다. 박물관이 그 도시에서 누구나 알고 교통이 편리한 장소에 있기 때문에 고2 학생들은 충분히 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학생이 예상대로 잘 도착했는데, 학생 한 명만 도착하지 않았다. 그 학생에게 전화를 해보니 박물관에 가는 방법을 몰라서 아직 학교에 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은 그 학생은 집에서 학교와 학원에 왔다 갔다 하는 것 외에 거의 다른 외출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문제는 이 학생이 그 동아리 반에 소속된 학생 중 가장 학업성취도가 높은 학생이었다. 아마도 이 학생은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 때문에 학업 외에 다른 활동을 하도록 요구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스스로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뮤지컬·연극을 감상하는 동아리도 운영한 적이 있다. 나는 경기도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대학로가 학생들에게는 매우 멀고 낯선 지역이다. 그때 학업성취도는 떨어지지만 하고 싶은 게 많아 여러모로 유명한 학생들일수록 활동을 잘했다. 멀리 있고 처음 가보는 극장까지 찾아오기, 극장 근처에서 알아서 시간 보내기, 공연을 온몸으로 즐기기 등등. 그런데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일수록 내 뒤를 쫄쫄 쫓아다니며 선생님은 뭘 먹을지, 언제 집(학교)에 돌아갈지 끊임없이 물어봤다. 과장되고 예외적인 사례 같지만, 공부를 잘하는 학생일수록 사회적 기술, 상황 판단력, 소통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를 나는 왕왕 발견했다.
방황은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보는 기회이자, 주어진 일 외에 아무 목적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휘젓고 다니는 경험이다. 공부를 잘해서 꽉 짜인 일상을 사는 학생들은 비교적 방황할 여유가 없다. 결국 학교와 학원, 집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보지 못한 학생들은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한, 머리만 이성적으로 발달한 기괴한 아이들이 된다. 스스로 자신의 시간과 삶을 운영해 보지 못한 아이들이 커서 어떻게 미래를 결정하고 개척해 나갈까?
복합 사회와 자기 주도성
우리가 맞이하게 될 미래에는 과거보다 훨씬 다양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전 세계는 아직 19세기의 고민이던 빈부의 격차나 불평등의 문제도 해결을 못 했고, 20세기의 나쁜 결과인 민족 간, 종교 간, 국가 간 갈등과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 새롭게 등장한 생태계 위기와 인공지능의 역습이 똬리를 틀고 있다. 한국은 한반도 전쟁 이후 70년 만에 압축 성장을 이뤄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다. 서구 유럽은 몇백 년에 걸쳐 서서히 이룩한 체계를 빠르고 눈부시게 이루었으니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말로 단순히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복합적인 모순과 갈등을 끌어안고 있다. 요즘 거리 시위가 성행하고 있는데, 한쪽에는 각자의 아이돌을 상징하는 색색의 응원봉들이 넘실거리고, 다른 쪽에는 태극기·성조기·이스라엘기 등이 범람한다. 그 거리의 모습만 봐도 얼마나 ‘다이내믹 코리아’인가. 게다가 이쪽 연단에서는 자신이 성적 소수자라며 정체성을 밝히는 10~30대의 발언이 이어지는데 바로 옆 거리에서는 ‘동성애를 조장하는 차별금지법 반대’ 서명을 받고 있다. 온통 혼란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요지경이다.
이런 복잡다단한 세상을 헤쳐 나가려면 이전과는 다른 창의적 사고, 종합적 안목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내 생각만 옳다, 내 경험만이 유효하다는 입장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다양한 의견을 끌어안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려면 유연하고 발산적인 사고의 패턴이 필요하고, 고도의 소통 기술과 각양각색의 이야기에 대한 공감 능력이 중요하다. 그런데 천편일률적이고 획일적인 일상을 보내는 청소년들이 과연 이런 문제들을 잘 대처할 수 있을까? 경험이 풍부하면 사람은 그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갖게 되고, 경험에서 오는 연륜 혹은 자신감을 느끼게 된다.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상황에 닥쳤을 때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은 위에서 관찰해 높이를 가늠해 볼 수 있고, 뛰었을 때 자신이 어느 정도 다칠지, 어떤 낙법을 써야 덜 다치는지 판단해 볼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용기를 내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행동을 감행할지, 반대하는 사람들의 공포심을 이해하고 설득해서 함께 낙하산을 만들지, 아니면 포기하고 돌아갈지 등을 결정할 수 있다. 즉, 방황에서 얻은 경험은 복합적인 문제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자기 주도성’을 만들어 준다. ‘자기 주도성’이란 말은 자아정체성과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삶과 진로에 필요한 기초능력과 자질을 갖추어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역량을 뜻한다. 좋은 의미이지만 교육과정을 통해 길러야 하는 핵심역량이 되면서 너무 껍데기만 갖다 쓰는 죽어버린 용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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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주도성에서 중요한 개념이 자아정체성과 자신감인데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부분도 여기에 있다.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보고 부딪쳐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자아 정체감)’도 모를 뿐 아니라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실패하면 그 후엔 어떻게 할지를 알 수가 없다. 청(소)년기는 당연히 모르는 시기이므로 그냥 해보고 수정하면 되는데 실패할까 봐 걱정돼서 뭘 못해보고 자꾸 교사나 부모에게 물어보고 의지한다. ‘실패해도 된다’, ‘다시 해 보면 된다’, ‘인생을 수정하면서 살아가는 거다’란 생각을 잘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만큼 자유롭게 방황할 수 있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너무 안전하게 보호하고, 학교와 교사는 제도에 꽉 사로잡혀 있어 아이들에게 자율성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수해도 되는 세상?!
‘실수해도 된다’는 걸 얘기할 때 사람들은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많이 언급한다. 수많은 창의적 아이디어가 나오고 전 세계 기술개발을 선도하는 실리콘밸리는 실패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라는 것이다. 스타트업의 80%가 실패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관대한 제도와 인식을 두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관대한 제도와 인식의 기저에는 한 번 성공하면 천문학적인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IT 기술의 집약체가 마련되어 있다. 즉 그런 집약체가 되기까지 미국이라는 나라의 영향력과 최첨단 기업의 노력이 함께 작용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이러한 기반이 없는 한국에서는 ‘실수해도 된다’는 생각이 어떻게 통용되는가? 우리는 압축 성장한 찬란한 역사와 전통이 있기 때문에 ‘실수해도 된다’는 생각을 잘하지 못하고 사회에서도 가혹한 평가를 받는다. 다시 말해, ‘실수해도 된다’는 생각을 못 하는 이유에 대한 책임은 사실 학생들에게 있지도, 부모에게 있지도 않다. 실수해서 한번 낙오하면 다시 재기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의 경쟁구조에 있다. 또한 정규직이 아니고, 집도 없고, 애인이나 친구가 없는 사람을 쉽게 ‘루저’로 취급하는 사회 인식에 있다. 서울의 유명한 대학을 나오고, 이름을 들어봄 직한 회사에 다니며 애인도 있고 주택청약통장이나 주식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을 그나마 사람이라고 대우해 주면, 거기에 들지 못하는 나머지 대다수 청년은 모두 루저가 되는 세상이다. 이 얘기는 과장이 아니다. 청(소)년들이 자주 가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보면 ‘지방 하류대’를 나와서 아르바이트밖에 할 수 없고, 다른 젊은이들, 특히 예쁘게 꾸미고 멋져 보이는 다른 또래들을 보면 두렵고, 만나는 친구도 한두 명밖에 없다는 자칭 루저들의 푸념이 많이 보인다. 그럼 소수의 청년만 ‘루저’가 되느냐?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최근 발표에 의하면 2021년 기준 240개 대기업 일자리는 전체 일자리 중 14%에 불과하고, 통계청이 발표한 24년 비정규직 비율은 38%이다. 대충만 봐도 첫 직장을 가져야 하는 청(소)년들의 2/3 이상은 루저에 속할 수밖에 없다. 물론 대기업에 다니지 않고 비정규직에만 종사해도, 애인이나 친구 없이 살아도, 집이 없어 월세를 전전해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 그러려면 기본적인 주거, 복지, 의료 등이 안정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만약 이런 기본 생활이 다 충당되는 구조라면 오히려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힘들게 스펙만 쌓기보다 쉬엄쉬엄 놀면서 여행도 다니고 다양한 사람도 만나면서 방황하는 시간을 늘려도 될 것이다. 사실 지금은 방황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방황을 못 하도록, 다양한 경험을 못하도록 강요받는 시대인 셈이다.
구조에서 탈출하기
빈약하고 초라한 삶을 살도록 강요받는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사회 구조는 어려운 얘기라 모르겠으니 개인으로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될까? 쳇바퀴 돌 듯 남들과 똑같이 정해진 규칙 안에서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하면 될까? 루저 타령만 하고 어두컴컴한 방에 틀어박혀 키보드만 두드리며 세상에 불만을 토로하면 되는 걸까? 윤 대통령 탄핵안 가결 후 거리에서 외치는 10~30대의 이야기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런 얘기였다.
“집에서 나 혼자 있을 때는 답답하고 우울해서 힘들었는데, 이렇게 나와서 다른 사람들 얘기 듣고 어른들이 선결재해 준 음식도 먹으며 돌아다니니 뭔가 희망이 생기고 용기가 난다.”
나는 교사이자 연구자로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청소년들을 인터뷰했었다. 그 친구들의 얘기에 따르면 어릴 땐 나만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성장하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힘들었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우리는 어쩌면 경쟁사회가 주는 공포감에 두려워 머리만 구석에 박고 떨고 있는 꿩일지도 모른다. 이제 머리를 들고 주위를 바라볼 때다. 머리를 들기가 어렵다면 일단 햇볕이라도 쬐자. 광활한 우주에 티끌 같은 존재인 나에게까지 태양은 빛을 보내주지 않는가! 그래도 어렵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 달라고 하면 된다. 가족 안에서는 항상 비난을 받아서 주눅이 들었다면 가족 밖에도 세상은 넓다. 수능시험을 거부하고 대학 비진학을 천명한 ‘투명가방끈’이라는 모임이 활동하고 있고, 주거 위기를 경험한 청년들은 ‘민달팽이 유니온’을 만들어 공동 대응을 하고 있다. 참여연대는 ‘다르게 살아도 괜찮아’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매년 ‘청년공익활동가학교’를 개최하고 있다. 전주에 가면 유산으로 받은 집을 지역사회에 내놓고 공유 공간으로 활용하는 ‘지향집’이 있고, 남원 산내에는 ‘지리산이음’이라는 곳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이 펼쳐진다. 또한 전국 곳곳에는 특색 있는 작은 도서관들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다채로운 기획을 운영 중이다.
나를 옭아매는 것 같은 구조가 답답할 때는 고개를 들고 구조 밖으로 나와서 크게 숨을 들이쉬자. 나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도통 자신이 없을 땐 일단 누구의 손을 잡고라도 밖으로 나와 보자. 내가 갈 대학은 없고, 내가 취업할 일자리도 없어 보일 때, 사람들이 나를 루저라고 비난할 거 같을 때 오히려 죽을 힘을 내어 주위를 둘러보자. 이미 내 노력과 무관하게 세계는 저성장으로 흘러가고 차별과 모순은 극에 달하고 있으며, 생태계와 AI의 침공으로 인류는 존망의 기로에 섰다. 이럴 땐 나 혼자 노력하기보다는 세상을 멀리서 바라보며 둘러봐야 한다. 이걸 다른 말로 풀자면 ‘방황’이다. 방황하지 못하도록 강요받는 시대를 넘어서려면 우리는 방황해야 한다. 그 안에서 전체의 구조를 조망하고 여유를 찾고 사람들과 함께 얘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어야 한다.
인류학자인 애나 로웬하웁트 칭은 자신의 저서 『세계 끝의 버섯』에서 삶이 엉망이 되어 갈 때 자신은 산책했고 운이 좋으면 버섯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 책에 나온 문장을 소개하며 글을 맺으려 한다.
“인간은 불확정성으로 버섯을 이해하는 데에 풍요로운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것은 마주칠 때 발생하는 모든 가능성과 놀라움을 포함해 마주침이 일어나는 지금 여기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