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조세희 선생과의 대화
- 소설가 조세희 선생과의 대화
조세희 소설가. 1942년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돛대 없는 장선』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1978년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같은 해 연작소설 「뫼비우스의 띠」, 「우주여행」,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등을 모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완성하였으며, 이 작품으로 1979년 제13회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1978년 6월 문학과지성사에서 초판이 나온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996년에 100쇄를 넘겼으며, 2000년 이성과힘으로 출판사를 옮겨 속간되어 2017년에는 문학작품으로는 처음으로 300쇄를 찍었다. 2022년 12월 25일 향년 80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
![]() 조세희 |
유난히 길었던 설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상이 시작되던 2025년 1월의 마지막 날 금요일 오후, 4호선 신용산역 바로 앞에 있는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2층 카페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작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카페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조세희 작가는 구석 창가에 있는 필자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늘 지병으로 거동이 쉽지 않았던 작가였지만 용산까지 찾아온 작가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아마도 이 시대와 문학에 대해 내게 꼭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생각해 보니 그와의 직접 만남은 2018년 1월 당시 작가가 거주하던 잠실 새내 아파트 인근 음식점에서 최재봉·이문영 한겨레 기자, 이명원 비평가와 함께 뵌 이후 처음이었다.
![]() 권성우 |
권성우(이하 권) 선생님.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202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저녁에 저 머나먼 밤하늘의 별세계로 들어가신 후에 2년여 세월이 지났네요. 이렇게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조세희(이하 조) 어쩌다 보니 오늘 이곳에서 권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되었네요.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에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 건지, 아니 이 순간이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시간이 주어진 사실 자체가 너무 기쁘고 반갑습니다.
권 선생님 자택이 있던 둔촌동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인근에 거주하던 문인들과 선생님을 뵙기 위한 모임을 하던 그 시절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당시 문학과 인생에 대한 선생님의 덕담과 지혜, 시대와 현실에 대한 서늘한 통찰을 통해 다시 읽고 쓸 힘을 내곤 했었지요. 늘 뵙던 둔촌동이나 잠실이 아니라, 오늘 약속을 이곳 용산으로 정하신 특별한 연유가 있으신지요?
조 권 선생도 기억하고 있겠지만 2009년 1월 20일에 발생했던 용산참사 다음 날 이곳에서 있었던 집회에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전하면서, 용산참사와 당시 시국을 주제로 연대 발언을 한 적이 있답니다. 저로서는 커다란 용기를 내서 얘기를 해본 건데, 그 이후 이곳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꼭 다시 둘러보고 싶었어요.
권 아, 그러셨군요. 확인해 보니, 선생님의 참으로 인상적이며 열정적인 발언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네요. 날짜를 보니 2009년 1월 21일이었네요. 선생님은 오랜 세월 동안 시위와 집회 현장에 직접 참여하면서 사진을 찍어오셨지요. 이날도 현장에 대한 절박한 문제의식으로 참여하신 것 같은데, 아마 이때의 말씀이 선생님의 마지막 공적 발언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을 다시 들어보니 이 시점에서도 깊이 되새길 대목이 많습니다. “현장에서 투쟁하는 분들에게 늘 미안했습니다”라는 겸허한 발언도 그렇고 “무엇보다 우리 젊은이들이 아무 할 일이 없다는 죄악을 우리 세대가 저질렀다는 것을 나는 반성하고 그런 세상이 없기를 바랍니다” 같은 대목은 1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 그 사이에 한국 사회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했지만, 극심한 양극화, 청년의 힘겨운 미래, 세계 최고 자살률과 최저 출산율, 정치적 진영 논리의 심화와 극단적인 대립 등 여러 문제가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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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그렇군요. 저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벗어나 저 망연한 우주에 있는 사람이지만 지금 이 시대의 여러 문제를 접하며 여전히 커다란 책임감과 미안한 감정을 지니고 있답니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 발전, 진보를 도모했던 주체들이 좀 더 철저하게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을 추구했더라면 적어도 지금의 현실과는 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이곳 용산은 2009년에 비하면 무척이나 화려하고 모던하게 변했군요. 곳곳에 현대적 고층 건물이 즐비하네요. 하지만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이나 세입자들은 지금 어떤 삶을 영위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런 변화가 근본적으로 돌이키기 힘든 시대적·문화적 추세라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배려와 지원이 너무 부족한 게 아닌가 싶어요. 무엇보다 청년들에게 너무나 살기 힘든 사회를 물려주었다는 생각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쓴 저도 그 책임감에서 전혀 벗어나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등장하는 윤호는 “우리나라에서 십 대 노동자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궤도 회전」)라고 얘기하고 있지요. 이런 윤호의 발언은 그대로 작가인 선생님의 생각을 대변한다고 봅니다. 2008년 있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발간 30주년 행사 자리에서도 “나는 여러분 젊은 세대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 “절대 냉소주의에 빠지지 말고 희망을 지니며 절망하지 말라”고 청년들에게 각별한 당부의 부탁을 하신 것도 기억납니다. 이렇듯이 선생님은 늘 청소년의 인권과 권리, 미래에 대해 각별하고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셨지요. 하지만 그 후로 청년 세대를 둘러싼 상황과 조건은 한층 악화했고, 청년 세대 사이에서도 극심한 정치적·문화적 대립을 겪고 있지요.
조 제가 청년의 삶과 미래, 청년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과정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 건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그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주역은 청년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을 발견하기 힘든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그러니 어떤 정책을 펼칠 때 세대 간 이해관계가 엇갈리면 가능한 한 청년들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제가 이 시대 한국 사회에 대한 가장 절박한 문제의식을 느끼는 이유도 청년들의 미래가 점점 암울해지고 있다는 현실 진단에 있습니다.
권 지난 1월 25일에는 ‘소설가 조세희 선생을 추모하는 인천 사람들’이 주최한 선생님을 기억하기 위한 행사가 인천 동구 화수동 ‘미문의 일꾼교회’에서 열렸습니다. 이곳은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있던 공간입니다. 바로 이곳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등장하는 영희가 다녔던 노동자교회이기도 했지요. 2024년 2월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150만 부를 돌파했더군요. 이런 사실은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78년에 간행된 ‘난쏘공’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 적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점을 잘 보여주고 있네요.
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3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난쏘공’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는 취지의 얘기를, 진심을 담아 한 적이 있답니다. 그 후 1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난쏘공’이 많이 읽힌다는 사실이 제게는 기쁨과 보람보다는 부채감과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지니게 만드네요. 그래도 저와 제 작품을 여전히 기억해 주는 독자들 덕분에 이곳에서도 지난 인생을 반추하며 잘 지내고 있답니다.
권 최근에 제가 『지명관 일기 1』(소명출판, 2024)을 읽으며 박정희 유신시대에 대한 구체적이며 생생한 역사적 실감을 얻을 수 있었답니다. 이 일기는 1974년 11월부터 1976년 말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한마디로 유신시대가 반체제 작가나 지식인에게 얼마나 억압적이고 가혹한 시대였는지를 절감한 독서였답니다. 당시 지명관 선생(1924~2022)은 일본에 망명해 있으면서 진보적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TK생’이라는 필명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해외에 알리고 유신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한 바 있지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발간되던 1978년은 유신 독재 말기에 해당하는데, 그야말로 엄혹하고 폭압적인 권력이 횡행하던 숨 막히던 시기였지요. 그런 때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작품을 발간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용기와 의지가 필요했을 것 같네요.
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제게 특별히 용기나 의지가 있었다기보다는 당시 노동자나 도시빈민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강렬한 분노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들의 슬픔·아픔·고통에 깊이 공명하고 있었지요. 용산참사 현장에서도 얘기했는데 저는 본래 아주 나약하기 짝이 없는, 그런 연약한 작가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어떻게든 1970년대 한국 사회의 절박한 현실을 작품에 담아야겠다는 마음이 권력의 감시에 대한 두려움보다 훨씬 더 절실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권 최근 두어 달 사이에 한국 사회는 엄청난 격변기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3일부터 지금에 이르는 사건들, 계엄 선포와 시민들의 저항, 국회의 탄핵 가결, 대통령 구속에 이르는 엄청난 과정을 어떻게 보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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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제가 지금은 현실 세계가 아니라 망연한 우주에 있지만, 그래도 한국 사회의 현실과 변화에 대해서는 늘 관심을 끄지 않고 있답니다. 생전에도 오랜 세월 동안 의미 있는 시위 현장에는 되도록 참여해서 작품을 위한 자료와 기록 삼아 사진을 찍곤 했어요. 이런 발걸음이 1980년의 사북 항쟁을 주제로 한 사진집 『침묵의 뿌리』를 낳은 셈이네요. 그래서인지 계엄 선포 당일부터 현재까지 한국 사회의 역동적인 현실을 지켜보면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요. 좀 더 거시적인 지평으로 역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역사는 늘 퇴행과 전진이 교차하면서 조금씩 장기간의 세월에 걸쳐 진행됩니다.
일시적으로는 역사가 퇴행한다고 보일지라도 그러한 과정조차도 우리가 깊이 고민하고 탐구해야 할 한국 사회의 한 증상이자 현실이지요. 가령 1987년 민주항쟁 이후 민주주의가 진전되었다 해도 커다란 한계가 있었거든요. 최근 몇 년간의 흐름은 검찰을 비롯한 법조계의 관행에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일종의 ‘역사의 간지(奸智)’를 통해 드러내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세계가 전반적으로 우경화되고 있지만,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한국 시민들의 열정은 그 어느 곳보다도 강력하다고 봐요.
권 선생님께서 저세상으로 가신 지 두 달여 시간이 지난 2023년 2월 19일 아드님 조중협 씨 댁에 차려진 빈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답니다. 장례식 당시 일본 시코쿠 지역을 출장 중이었기에 뒤늦게 예를 갖추게 되었지요. 그때 함께 했던 한겨레 이문영 기자와 가족이 보관하고 있던 선생님의 작업 노트를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한 편의 작품을 구상하고 현실화하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정보와 노력, 고민이 담겨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던 귀한 자료였습니다. 그 노트의 한 대목에는 “당분간 우리는 모든 싸움에서 지기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지요. 바로 이 구절이 기사로 소개되면서 SNS에서도 많이 회자됐답니다. 지금과 같은 격동기 현실에서 각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뜻깊은 구절입니다.
조 작품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작품 노트를 열심히 쓰곤 했지요. 그런 철저한 준비가 없이는 한 줄도 쉽게 쓰기 힘든 기질이랍니다. 노트에 당시 정국이나 상황에 대한 소회가 담긴 문구를 쓰곤 했는데, 소개한 대목도 바로 그런 시대에 대한 고민 속에서 탄생한 구절이지요. 역사의 흐름에 대한 낙관과 희망도 필요하지만, 결과와 관계없이 마음을 모아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지금 이 시대 격동기에도 꼭 필요하다고 봐요.
권 조세희 선생님, 이제 참으로 아쉽지만 우리의 대화를 마무리 지을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오늘 대화를 마치며 2009년의 용산참사 현장에서 선생님이 하신 발언을 다시 되새겨 보았습니다. 새삼 이런 대목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제가 ‘난쏘공’을 처음 쓸 때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미래가 아름답기를 그리고 슬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이 평화롭고 그래서 고통이 어느 한쪽으로만 집중이 되는 걸 막을 생각으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글을 썼습니다.” 이런 선생님의 간절한 염원이 이 슬픔과 역동적 에너지로 가득 찬 이 땅에 잘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언제 다시 뵐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늘 편안하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조 그래요. 오늘 권 선생을 정말 오래간만에 만나서 이렇게 대화를 나누게 되어 기쁘고 반가웠습니다. 한바탕 기분 좋은 꿈을 꾼 느낌입니다. 부디 한국 사회에서 사는 보람을 느끼게 만드는 축제 같은 변화와 진전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