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위 패스포트
나무 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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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봄호 (통권 95호)
나무 오르기

 

오리엔테이션으로 향하는 길에는 잔디밭이 펼쳐졌고, 나무가 서 있었으며, 청설모가 출몰했다. 한 청설모는 두꺼운 단풍나무에 붙어 있었다. 그것은 나무를 오르던 중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정지해 있었다. 더이상 나무를 오를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전시하기라도 하듯, 그만두고 싶어졌다는 뜻을 전달하기라도 하듯. 청설모는 문득, 이 나무가 평소에 오르던 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무가 어떤 변화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청설모는 나무에 말을 걸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말하는 방법을 잊은 지 오래였으며, 여태까지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이 관계를 어떻게 유지했는지 의아했다. 그런데 나무에 말을 걸어야겠다는 생각하고 나자, 말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아예 잊게 된 것 같았다. 말하지 않던 시절로 돌아가는 일이 끔찍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청설모는 나무와 자신의 관계가 영영 변해버렸다고 느꼈고, 나무의 영혼은 산이기 때문에, 그것을 오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용기와 체력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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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리타운의 선물가게 캣칭 파이어플라이즈

 

다운타운의 헌책방

 

누가 거기서 날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난 그곳에 다시 가야만 했다.

우리는 앤아버의, 불 꺼진 나무 서점 앞에 서 있다. 들어갈 수 없는 서점 유리창 너머 오즈의 마법사, 『샬롯의 거짓말』과 같은 책이 전시되어 있고, 물고기는 어떤 책을 가리키며 ‘저건 내가 태어나서 처음 읽었던 책이야!’라고 외쳤다. 난 그 책 이름을 기억 못 한다. 유리창 너머에는, 아이오와에서 읽었던 『닥터 두리틀의 모험』영문판도 있었다. 사랑하는 책에 대해 말할 때 모두 ‘태어나서 처음 읽은 책’이라고 얘기해야겠다고 그날 이후 나는 다짐한다. 남색으로 칠한 문에는 ‘Door opens in’이라고 적힌 꾸깃꾸깃한 종이가 붙어 있었고, 원어민인 물고기도 그 문장의 정확한 뜻은 모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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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아이오와에 다녀온 이후 그곳에 관한 책을 썼다. 책이 아닌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사랑에 무능하기에 책을 썼다.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서 비겁하게 책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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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에 다시 미국으로 간다는 소식에 지인들로부터 응원을 받기도 했지만, 몇은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글을 쓰겠다는 내 결정에 의아해했다. 한국은 영어를 하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인 데다, 한국 문단에서는 대부분 한국어로 작품 활동을 하니까. 하물며 나는 영문학이라는 학문에 관심을 품은 적이 없을뿐더러, 영어권 작가들에게 큰 관심 또한 없었다. 영어권 작가 중에 관심 있는 작가(혹은 읽어본 작가)는 리디아 데이비스, 제임스 테이트, 앤 카슨 정도일 뿐이었다. 다만, 누가 거기서 날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난 그곳에 다시 가야만 했다. 떠남은, 나의 평생 연구 주제인 ‘공간’의 문제와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육체를 어떤 공간에 위치시켰을 때 내가 나를 죽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의 연장이었다. 아이오와에서 한 계절을 지냈을 때, 난 처음으로 내가 나를 죽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 이유는 사람 때문이 아니었고, 추억 때문도 아니었다. 다양한 작가들과의 만남, 아이오와의 풍부한 문학적 유산, 국제 창작 프로그램(IWP, 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이 제공하는 자극보다도 어떤 마법적인 관계, 그러니까 아이오와라는 공간과 나와의 관계, 내가 나를 이 공간에 위치시켰을 때, 육체와 영혼이 쉬고 있다는, 숨을 쉰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건 아마도 하늘이 넓다는 사실, 공간이 아무 소리를 내지 않으며,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차가 없으면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섬에 갇힌 느낌, 도망쳐왔다는 느낌, 뭔가를 등지고 살아가면서 동시에 직시할 수 있게 만드는 힘, 작은 서점과 카페, 손전등 없이는 걸을 수 없는 들판과, 그래서 손전등 같은 사람 혹은 친구 혹은 생명을 소망하게 된다는 점 등과 관련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설명해도 충분치 않다는 느낌이 든다. 다만, 사람이 아닌 것과 관계 맺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어렴풋하게나마 정리하고 싶다.

여전히 그 공간이 내게 미친 영향은 미지로 남아있다.

내가 아이오와에서 살 수 있는, 말하자면, 비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유학뿐이었고, 내 두 번째 시집과 산문집을 번역하고 있는 시인이자 아이오와 대학교 대학원생인 몽 씨가 마지막 해를 아이오와에서 지내는 동안, 그곳에서 함께 지낼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았다.

아이오와에 갈 수 없다면, 미국에 갈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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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오와에서 649km 떨어진 마을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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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정원 중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은 나 하나다. 문예창작학과나 국문학과에서 외국인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과 유사하다. 첫 학기에 신청한 수업은 시 합평, 구체시, 그리고 번역학 수업이었다. 번역학 수업은 마음에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적어도 전원이 백인은 아닐 것 같았다. 예상대로 다른 과 학생들도 있었고, 나와 같이 영어가 제2외국어인 학생이 두 명 정도 있었으며 - 각각 스페인어와 벵골어가 모국어였다 - 동양인은 없었지만, 인종이 다양한 편이었다.

 

미시간대학교 해쳐도서관

 

휴론강의 작은 부두

 

첫 수업에 읽어가야 할 에세이는 줌파 라히리 에세이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Translating Myself and Others)』.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5살에 미국으로 건너간 줌파 라히리는 미국에서 작가가 되어 여러 권 책을 영어로 썼다. 마흔이 넘은 어느 날, 그녀는 잠시 영어로 글 쓰는 것을 멈추고, 이탈리아 로마로 건너가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미 저명한 미국 작가로 자리를 굳힌 그녀의 행보에 사람들은 의아해했고, 그녀는 끊임없이 질문을 받게 된다.

- 왜 갑자기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게 된 거죠?
친구들은 물었다. 독자들은 물었다. 미국인들은 그녀에게 물었다.
- 왜 갑자기 우리 언어로 글을 쓰죠?
이탈리아인들은 그녀에게 물었다.
- 왜 벵골어가 아닌 이탈리아어죠? 당신의 뿌리는 벵골어가 아닌가요?
누군가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고, 그들은 그녀를 얼마간 방어적으로 만들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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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곳을 고향이라고 칭하지만, 어느 날 진짜 고향을 만나게 되기도 하듯, 어느 날 진짜 모국어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줌파 라히리는 그것을 언어의 망명(exile)이라 일컬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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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ian, in my opinion, is a door more inclusive than exclusive.”2)
난 이 문장을 ‘이탈리아어는 밖으로 열리는 문보다는 안쪽으로 열리는 문에 가까워요’라고 오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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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어로 쓸 때 나는 문을 따고 들어간 죄책감을 느낀다. 들어가서는 안 되었던 문을 연. 이 언어는 나를 강도로 만들었다.”3) 줌파 라히리는 말한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시를 쓰면서 나는 다양한 갈취와 사기를 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합평 시간에는 영어로 쓴 시를 가져갈 때도 있고, 한글로 쓴 시를 영어로 번역해서 가져가기도 하는데, 생각을 어떤 그릇에 붓느냐에 따라 결과물은 달라진다. 더불어 한글로 쓴 시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는 무수한 문장을 포기하게 되고, 시를 쓰다 말며, 그래서 시는 반의반으로 줄어든다. 국물이 졸아들 듯, 시가 졸아든다. 내 시는 의도치 않게 간결성을 확보하게 된 걸까? 혹은 이것이 줌파 라히리가 경계했던 자기 번역의 위험성일까? 그녀는 이탈리아로 쓴 책을 직접 영어로 번역하지 않고 번역가에게 맡겼다. 자신의 글을 직접 번역하는 것은 너무 많은 자유를 주기 때문에.4) 하지만 국물처럼 졸아든 내 시를 미워하지 않기로 한다. 늘 간결한 시를 쓰고 싶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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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몽 씨에게, 영어로 쓴 시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는 말한다.

- 행갈이가 는 것 같은데?

그 말을 듣고 나는 얼마간 놀란다. 영어로 시를 쓰기 전까지, 나는 행갈이와 연갈이를 즐겨 쓰지 않았다. 그보다 박스 형태의 산문시를 즐겨 썼다. 한국어에 너무 능통한 탓이 아닐까? 필요에 따라 원하는 만큼 문장을 길게 쓸 수 있으며, 문장을 쓰다가 헤매거나 숨을 고를 필요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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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문장을 포기하는 법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을지도 몰라.

그들의 언어로 시를 쓸 때 나는 문장을 완결 짓지 못한다. 하나의 문장을 완결하는 것은 나무다리를 홀로 건너는 것과 같은 체력을 요구한다. 문장을 끄적이다가 문법을 모르겠으면 행갈이로 얼버무리고, 연갈이를 해버린다. 나는 그렇게 행갈이와 연갈이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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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쓰다 말면 행갈이가 되고

말하다 말면 그게 시가 되었다.

청설모는 나무를 오르다 말고 하늘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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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에 갈 때 가방에 챙기는 푸른색 전자사전은, 길쭉한 펜 모양으로 문장 위에 줄을 그으면 단어의 뜻을 알려준다. 문제는 전자담배와의 유사한 생김새 탓에, 친구들이 나를 흡연자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언어로 글을 쓰는 것이 줌파 라히리를 강도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나를 헤비 스모커로 만들었다.

 

다람쥐가 되고 싶었던 시인

 

나무를 오르는 청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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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ahiri, Jhumpa. 『Translating Myself and Other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2. 10쪽
2) 같은 책, 15쪽
3) 같은 책, 15쪽
4) 같은 책, 57쪽 참조

문보영
시인, 1992년생
시집 『책기둥』 『배틀그라운드』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산문집 『일기시대』 『불안해서 오늘도 버렸습니다』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