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후기
함께 짓는 진짜 집

- 영역 편혜영 소설 『사육장 쪽으로』

  • 번역후기
  • 2025년 여름호 (통권 96호)
함께 짓는 진짜 집

- 영역 편혜영 소설 『사육장 쪽으로』

 

올해 봄, 나는 문학 번역가로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바로 영화 촬영장을 방문한 일이었다. 2017년에 번역한 편혜영 작가의 『홀』이 ‘셜리 잭슨 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한 영화 제작자의 눈에 띄었고 우여곡절 끝에 영화 촬영이 시작되었다.

작가님과 함께 초대를 받아 어둡고 거대한 세트장 안으로 들어서니 『홀』에 등장했던 덩굴로 덮인 근사한 집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1년 내내 읽고 또 읽고, 번역하고 수정하며 편집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겠다고 생각했던 그 집이 마법처럼 눈앞에 있었다.

영화사 대표님이 집 내부를 안내해 주시면서 가끔 벽을 두드리며 “진짜 집이에요!”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겉에만 판자와 스티로품으로 그럴듯하게 꾸며놓고 안쪽은 텅 비었을 거라 상상했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문과 살짝 긁힌 듯 보이는 벽지, 때 묻은 듯한 물건들로 빈틈없이 꾸며진 방들이 있었다. 의자에 걸쳐진 빈티지 핸드백을 살짝 만져보며 그 작은 소품이 캐릭터의 감성을 생생하게 살려주는 것 같아 감탄했다.

한국 주택의 구조와 내부를 번역하는 일은 늘 놀라울 정도로 까다로운데 작가가 그린 고딕적 풍경을 세트디자이너가 시각적으로 어떻게 ‘번역’했는지 보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작년에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번역한 편혜영 작가의 소설집 『사육장 쪽으로』에 수록된 「밤의 공사」에도 집이 등장하는데 역시 번역하기 까다로웠다. 그 집은 근사한 대저택이 아니라 담장이 무너져가는 허름한 한옥이다. 나는 편집장과 집을 묘사하는 문장과 그 집을 침범하려는 들쥐 떼에 대한 묘사를 거의 단어 단위로 검토해 가며 명료함과 기괴함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으려 애썼다. 그렇다 보니 세트장을 구경하는 내내 독자들에게 공간을 현실감 있게 전달하면서도 작가가 의도한 상징성을 잃지 않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는 세트장 구경 외에도 모니터가 나열된 방에서 촬영하는 과정도 지켜봤다. 모니터에서 배우들과 스턴트맨이 같은 동작을 아주 조금씩 바꾸며 촬영을 거듭했다. 1분가량의 장면을 위해 1시간이나 촬영하는 것을 보니 한 문장을 번역하면서 구조를 계속 재배치하고, 단어를 동의어로 교체하며, 쉼표를 넣었다가 빼는 등 번역자로서 글을 미세하게 조절하는 일이 떠올랐다. 배우들이 쉬러 간 사이에 모니터에서 젊은 여성분이 집의 커튼을 열고 밖을 바라보는 행위를 반복해서 했다. 감정 표현이 뛰어나다고 우리끼리 속삭이자 미국 제작진이 다가와 그 여성은 ‘스탠드인(stand-in)’이라고 설명해 줬다. 정식 배우를 대신해 특정 장면을 연기함으로써 조명팀이 미세한 조정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었다. 그분의 연기는 영화에 담기지 않겠지만 그 보이지 않는 노동 덕분에 관객이 해당 장면을 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이때도 내가 번역 작업을 하다가 책상에 앉아 큰 소리로 낭독하는 습관이 생각났다. 당연히 스탠드인에 비해 연기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나는 책이 영화화되는 일에 대해 약간 냉소적인 편이었기 때문에 누군가 “원작이 더 나았어”라고 말하면 쉽게 동의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 영화 제작 과정에서 얼마나 세심한 주의와 정성이 들어가는지를 실제로 보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원작이 번역본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통념 그리고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가 필연적으로 ‘손실’을 수반한다는 관념도 떠올랐다. 번역자는 집을 처음부터 설계하지는 않지만, 도면을 꼼꼼히 읽고 기초부터 다시 지어야 한다. 영화를 만들려면 진짜 집을 지어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전반적으로 이번 경험은 세부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의 중요성, 협력의 가치 그리고 다양한 형식의 스토리텔링 자체에 대한 존중을 다시금 느끼도록 해줬다. 『사육장 쪽으로』가 단편집이다 보니, 큰 집 하나를 짓는 대신 작은 집 여덟 채를 짓는 느낌이 들었다. 각 단편이 한 편의 장편 소설과 비슷한 정도의 집중을 요구했기에 다른 번역가와 공동으로 작업할 수 있어 무척 다행이었다. 이번 단편집의 번역본을 통해 독자들도 편혜영 작가의 작품들을 또 다른 시각과 새로운 빛에서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영역 『사육장 쪽으로』는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을 받아 필자와 하인즈 인수 펭클의 공동 번역으로 미국 아케이드(Arcade)에서 2024년 출간되었다.

김소라
번역가
역서 『홀』 『사육장 쪽으로』 『선의 법칙 』 『재와 빨강』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