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역 한강 소설 『희랍어 시간』
- 독역 한강 소설 『희랍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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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희랍어 시간』에는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성 희랍어 강사와 말을 잃어버린 한 여성 수강생이 등장한다. 볼 수 없는 사람과 말할 수 없는 사람, 이 두 존재는 손바닥 위에 문자를 쓰며 서로에게 다가간다. 말과 침묵, 빛과 어둠, 상실과 회복, 고통과 위로, 고독과 접촉의 극단들이 한강 특유의 느리고 나지막한 톤으로 심오하게 교차하고, 독자는 서서히 침묵의 세계 속에서 언어와 소통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작품은 2024년 2월, 독일 아우프바우 출판사에서 『Griechisch -stunden』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채식주의자』 이후 꾸준히 한강의 작품들을 독일어로 번역한 이기향 번역가는 이번에도 원작의 언어와 분위기를 섬세하게 옮기는 데 집중했다. 그 때문에 이 작품의 한국어본과 독어 번역본 사이에는 13년의 시간차가 있지만, 독일 비평지들은 이 작품을 한강의 대표작 중 하나로 여기며 호평하고 있다. 비평 내용으로는 독일인에게 친숙한 언어의 의미와 (소통) 가능성이라는 주제가 자주 언급되며, “놀라운 형식적 풍부함과 시점의 교체와 언어의 강렬함”(마르틴 욀렌), “언어의 힘과 아름다움”(알렉스 륄레)에 대한 소설이자 “거의 초현실적인”(바바라 게슈빈데) 현실을 그려낸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차이트 신문은 한강을 “우리 시대의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힘이 있고, 혁신적인 작가 중의 한 명”으로 평가하였다.
그중 남자 주인공이 오랜 시간 독일에서 살았다는 배경과 당시의 친구 관계와 사랑에 대한 묘사, 플라톤을 비롯한 그리스 고전들에 대한 인용과 해석은 독일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 번역자는 작품의 까다로운 언어 형식적 특징, 즉 주인공들 시점의 교체나 인용, 독백, 대화, 손바닥 대화, 침묵 속의 대화 등을 꼼꼼하게 그대로 독어로 옮기되, 다른 한편으론 독어권 독자를 고려하여 어휘나 문장의 선택에서뿐 아니라 주어가 종종 생략되는 한국어 문장이 자연스럽게 이해되도록 대명사를 넣거나 직접 인용부호를 사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언어 간의 간극을 좁힌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 원작이 가진 의미를 확장한다. 예를 들어 소설 시작의 인용문을 “번쩍이며 우리 사이에 칼이 놓여 있었다(Blank lag das zwischen uns)”로 ‘번쩍이며’라는 뜻의 “Blank”를 추가하여 원전인 북구 영웅서사시와의 연결을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또 “서슬 퍼런 상징” 역시 “서슬 퍼런 절단(scharfen Schnitt)”으로 번역하여 칼과 단절을 강조한다(영어 번역자는 “감청색 상징(a blue-steel symbol)”으로 옮겨 ‘상징’을 살렸다).
조금 아쉬운 점은 한강 작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단어나 문장의 반복을 그대로 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작품 전반에 반복되는 “침묵”이라는 어휘는 매번 같은 단어로 옮겨지기보다는, “고요함(Stille)”, “평안함(Ruhe)”, “침묵(Schweigen)”처럼 조금씩 다르게 번역되었다.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여주인공의 언어와 육체, 상실을 나타내며 자주 등장하는 문장인데 조금씩 변주되어 번역된다. 이는 독일어 특유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한 번역자의 선택이라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원작이 의도한 ‘같은 말의 되풀이’가 지닌 시적 리듬과 ‘정서를 통한 밀도 있는 의미 축적’이라는 측면을 다소 약화하기도 한다.
이 번역서는 한강 문체의 절제와 리듬을 깊은 울림으로 전달하며, 두 주인공의 언어와 감각들 사이의 공간을 독일어로 열어 보인다. 비평가 마르틴 욀렌은 『희랍어 시간』을 두고 작품뿐만 아니라 번역 자체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 독역 『희랍어 시간』은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을 받아 이기향의 번역으로 독일 아우프바우 출판사에서 2024년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