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노화의 잔혹함을 그려내는 두 방법

- 구병모의 『파과』와 민규동의 〈파과〉

  • 원작 대 영화
  • 2025년 여름호 (통권 96호)
노화의 잔혹함을 그려내는 두 방법

- 구병모의 『파과』와 민규동의 〈파과〉

금요일 밤의 서울 전철은 소란스럽다. 피곤한 몰골의 퇴근하는 직장인이 가득한 전철 한가운데에서 어떤 장년의 남성이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여성에게 무작정 시비를 건다. 모두가 선뜻 그를 말리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65세의 여성 킬러 ‘조각’이 호시탐탐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그녀는 그 어떤 이목도 끌지 않는 평범한 노인처럼 위장하기 위해 “아이보리 펠트 모자로 잿빛 머리를 가리고 잔잔한 플라워프린트 셔츠에 수수한 카키색 리넨 코트와 검정 일자바지”를 입었다. 남성은 조각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는 전철에서 내리는 순간 거품을 물고 쓰러져버린다. 조각이 비녀에 숨겨둔 독침에 순식간에 당하고 만 것이다. 구병모 작가의 소설 『파과』의 도입부다.

이 강렬한 도입부는 소설 전체의 스타일을 압축한다. 조각이 “바람직하고 교양 있으며 존경받을 만한 연장자의 전형”1)으로 “어느 장면에나 자연스레 녹아들어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스무 번째 엑스트라인 양 존재”2)하려면 어떠한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그려낸다. 옷차림과 화장, 짐, 읽는 책 등 디테일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여야만 조각은 겨우 대중의 눈에 띄지 않는다. 한치라도 오차가 생긴 순간 속된 말로 진상이나 꼰대로 불리는 무례한 노인이 된다. 작가는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 그물 같은 만연체로 독자에게 노인을 둘러싼 대중의 편견을 체험하게끔 만든다. 암살은 그저 노인 조각이 마주한 차별과 실존적 위기를 담은 포장지에 가깝다. 스릴러 소설은 보통 이야기가 빠르게 펼쳐져야 하지만 작가는 일부러 이야기가 흘러가는 속도를 느리게 한다. 마치 조각의 느려진 움직임을 작가의 문체가 함께 느끼는 듯하다.

『파과』는 50만 부가 팔린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위저드 베이커리』로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른 구병모 작가의 소설이다. 2022년 영어로 번역된 후 뉴욕타임스 선정 주목할 만한 책 100선에 선정되었고 이후 11개 국가에서 판권이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2024년에는 동명의 뮤지컬로 제작되기도 했고, 〈내 아내의 모든 것〉, 〈허스토리〉 등을 연출한 민규동 감독의 연출로 영화화되었다. 이 소설의 영화화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우선 『파과』가 홍콩 누아르 장르의 공식을 따라가고 있어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어서다. 경력의 정점에 선 후 쇠락하는 조직 보스 조각과 그에게 원한을 품은 조직원 ‘투우’, 우연히 이 둘의 갈등에 휘말린 평범한 ‘강 선생’이라는 세 캐릭터의 갈등 구도는 제법 익숙하다. 조각과 투우가 치를 최후의 결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홍콩 누아르의 영향을 받은 한국 누아르 영화에서 익히 본 풍경이기 때문이다. 구병모 작가는 매력적 중년 남성 대신 은퇴 직전의 조각을 주인공으로 세우고 그녀의 정체성과 심리적·육체적인 고통을 구체적으로 그려내 클리셰를 피한다. 이러한 캐릭터의 신선함이 제작자의 눈길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거기다 디테일한 이미지를 훑어내듯이 묘사하는 작가의 문체는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다만 『파과』는 영화화하기가 까다로운 작품이다. 아버지를 잃은 조각의 정적 투우, 병원의 실수로 아내를 잃은 강 선생, 거리를 방랑하던 자신을 킬러로 기른 ‘류’를 잃은 조각. 세 캐릭터를 소개한 다음부터는 서사 대신 늙음과 상실이 한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을 그려내는 데에 집중해서다. 세 캐릭터는 상실을 제각기 다르게 소화한다. 투우는 아이러니하게도 킬러가 되었고, 강 선생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 조각은 둘을 마주하고 나서야 상실을 체감한다. 본인의 가족이 되어주었던 류의 유언인 ‘지켜야 할 것은 만들지 말자’를 따라 무엇도 소중하지 않게 여기며 냉정을 유지했던 조각은 조금씩 타인에게 마음을 연다. 나아가 강 선생의 딸 해니의 미소와 과일 장수 강 선생의 어머니가 덤으로 건넨 복숭아에서 생에 대한 갈망을 느끼기 시작한다. 소설의 문장을 빌리자면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과 채워지지 않은 감각을 향한 대상화”3)일 것이다. 부서지고 소멸해 가는 것에 소중함이 커질수록 상실에 대한 공포도 커진다. 문제는 속도다. 철두철미하고 비인간적인 존재로 그려진 투우의 마수가 뻗칠수록 그 두려움이 강렬해지기 때문이다. 투우는 조각에게 다가오는 늙음처럼 스산하고 속도가 느리다. 따라서 소설을 영화화하려면 노화가 조각의 몸에 미치는 영향과 투우가 조각에게 다가가는 속도를 비슷하게 그려야 할 것이다. 그다음 조각의 점진적 심리 변화를 포착하는 것이 관건이다. 연출로는 롱테이크와 사건의 잔향을 마주하는 인물을 담는 인서트 숏이나 내레이션이 있어야 할 듯하다. 무엇보다 조각의 액션은 평생 킬러로 활동하면서 축적된 노하우를 담은,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영화 〈파과〉는 원작의 큰 틀과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등 여러 명대사를 가져가되 디테일과 각 인물의 사연을 과감히 각색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상업 영화의 규범을 따르느라 원작의 개성이 흐릿해진 느낌이 크다. 우선 원작과 달리 갈등 구조와 인물의 선악 구도가 한층 선명해졌다. 우선 조각과 강 선생의 관계가 달라진 점이 눈에 확연히 띈다. 우선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강 선생을 내과 의사에서 조각의 반려견 ‘무용’을 구한 수의사로 각색했다. 원작에서는 소시민에 불과했던 강 선생은 영화에서는 아내의 죽음에 항의하며 1인 시위를 하는 정의롭고도 무력한 존재로 그려진다. 원작에서는 짝사랑으로 오해되기도 하는 조각과 강 선생 사이의 묘한 관계가 영화에서 류에 대한 감정과 이어져 정리된다.

이뿐만 아니다. 원작에서는 심부름센터에 가깝게 그려진 ‘방역’은 영화에서는 악인만 골라서 죽이는 자경단처럼 각색되었다. 특전사 출신으로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비인간적인 투우는 길거리 출신의 살인청부업자로 그려져 신성 방역이 지키는 최소한의 윤리적인 기준을 거스르는 존재가 된다. 나아가 원작에서는 잠깐 삽입되었던 투우가 조각과 함께한 추억을 더욱 확장해 삽입한다. 이에 따라 조각에 대한 감정이 애증으로 바뀌고 투우에게 인간미가 더해져 원작과 결이 달라졌다.

연출에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우선 구병모의 만연체에서 느껴지는 비정함이 반영된 롱테이크가 하나쯤 등장할 법도 하나 그런 인상 깊은 장면은 없다. 원작의 강점이라 할 수 있는 일상적 상황에서 생기는 긴장이 사라지고 상업 영화의 전형적인 갈등 구조를 택해 원작에 담긴 실존적 고뇌가 희미해지는 느낌을 준다. 거기에 원작에서는 제목으로만 암시된 썩은 과일 이미지를 직접 드러내는 등 노화를 여러 상징적 사물에 담으려 했다. 조각이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보는 설정도 이 중 하나다. 대부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나 이를 하나로 연결할 장치가 없기에 이야기에 녹아들지 않는다. 이는 영화 구조 전반에 대한 문제와도 이어진다. 조각과 투우의 과거를 따로 다루는 원작과 달리 중간중간에 플래시백을 삽입해서 구조적인 혼란이 생기며, 영화 전반에서 에피소드 각각의 의미는 선명하나 톤이 일정하지 않다는 문제도 생긴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 드러난 이혜영 배우의 액션은 화려함에도 과연 이 캐릭터에 어울리는 액션인지 의문이 남는다. 마치 속편이 있을 듯한, 조각을 슈퍼히어로로 그리는 결말도 의아함을 자아낼 뿐이다. 이처럼 의문점을 가득 남기지만 이혜영 배우의 열연이 영화의 단점을 상쇄한다. 그녀가 섬세한 감정 연기와 강도 높은 액션 신을 동시에 소화하는 덕분에 자칫 과잉된 설정으로 보일 수 있는 여러 장치가 납득된다. 이처럼 조각의 늙은 몸과 얼굴을 담으려 한 이혜영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볼 가치는 충분하다.

 

1) 『파과』, 구병모, 위즈덤하우스, 8쪽
2) 같은 책, 9쪽

3) 같은 책, 96쪽

김경수
영화평론가, ≪씨네21≫ 객원기자, 1995년생
저서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