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대건 장편소설 『급류』
- 정대건 장편소설 『급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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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건의 『급류』는 두 인물 도담과 해솔이 그들을 둘러싼 비극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는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다. 큰 강이 흐르는 진평에서 나고 자란 고등학생 도담은 어느 날 서울에서 온 동갑내기 해솔과 만나 자연스럽게 연인 사이가 된다. 그러나 도담의 아빠인 소방대원 창석과 해솔의 엄마 미영이 서로에게 이성적으로 끌리는 낌새가 보이면서부터 그들의 사랑은 삐걱대기 시작한다. 더 큰 문제는 그 낌새가 정확히 설명되지도 못하고 어느 날 밤 창석과 미영이 급류에 휩쓸려, 그것도 벗은 몸으로 서로를 끌어안은 채 죽음을 맞았다는 데 있다. 도담과 해솔이 두 사람의 밀회를 추궁하기 위해 그날 밤 계곡으로 갔고 그들이 비춘 탐조등이 계곡의 두 사람을 물속으로 뛰어들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 죽음은 도담과 해솔의 평생을 따라다니며 그들에게 불명확한 죄책감을 짊어지게 만든다.
비극을 겪은 이들 주변으로 형성되는 말들의 집요함과 잔인함이 어떠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늘날 많은 희생자를 낸 참사들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연예인을 둘러싼 말들을 볼 때면 도대체가 우리 사회에 ‘사람을 살리는 말’이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생존자와 유가족을 향한 윤리적 부담이 도리어 그들을 향한 직간접적 폭력으로 모양을 바꾸어 표출되는 모습 또한 현실 정치의 여러 의제와 연결되며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은 씁쓸함을 안긴다.1)
그렇기에 도담과 해솔에게 급류는 그들의 부모를 집어삼킨 그날 밤의 물살이자, 사고 이후 그들을 향하는 측은한 시선과 저급한 소문의 소용돌이, 또 그 모든 상황 속에 서로를 향해 가까스로 손을 뻗는 그들 사랑의 격랑을 동시에 가리키는 말이 된다.
사랑하는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 그리고 더는 해명도 변명도 할 수 없게 된, 죽은 가족들의 불명예스러운 일이 주는 수치심의 급류는 도담과 해솔을 생존자·유가족 정체성으로 묶는다.
아빠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도담은 세상 어디선가 미영의 기일을 맞이했을 해솔을 떠올릴 수밖에 없” (102쪽)다. 비극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놓인 이들에게 급선무로 주어지는 일은 (다시) 죽지 않는 것이다. 이미 크게 겪은,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서 내내 겪을 상실의 무게가 매 순간 그들을 죽음 쪽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그렇다[“도담은 양팔을 꽉 껴안았다. 산다는 게 겁이 났다. 자신이 없었다.”(88쪽)].
죽음에 대한 그들의 죄책감은 자주 서로를 향한 부채감으로 나타나 자신과 상대를 괴롭힌다.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난 도담과 해솔이 상실 이전의 사랑을 회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까닭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우린 애인이 아니라 채무 관계 같아. 서로 빚진 사람들 같다고.”(168~169쪽)]. 요컨대 사랑이란 그 주체의 살아있음을 필요충분조건으로 전제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사랑-삶은 무엇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 이토록 망가진 삶이 다시 사랑과 필요충분조건으로 묶여 그 순환성을 회복하는 일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삶과 사랑이 애당초 서로의 필요충분조건이라면, 바로 그렇기에 사랑이 삶을 재시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짝을 이룰 망가진 두 개의 사랑-죽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물론 도담과 해솔이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그간 다른 사람들과의 사랑에 계속 실패했던 까닭도, 오직 서로만을 그토록 필요로 했던 이유도 이해된다. 이에 더해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사실을 전복적으로 상상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생존자·유가족이 죽음으로 묶인 공동체라면, 동시에 그것은 삶으로 묶인 공동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도담과 해솔의 이야기는 소용돌이를 벗어나는 방법에 관한 것이 된다.
“너 소용돌이에 빠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알아?”
도담이 해솔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해야 되는데?”
“수면에서 나오려 하지 말고 숨 참고 밑바닥까지 잠수해서 빠져나와야 돼.” (32쪽)
“도담아, 슬픔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슬픔에도 중독될 수 있어. (…) 우리 그러지 말자. 미리 두려워하지말고 모든 걸 다 겪자.” (256쪽)
상실 이후 도담과 해솔이 겪는 삶의 급류는 두 사람이 숨을 참고 슬픔의 밑바닥까지 들어가 “모든 걸 다 겪”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들은 죽음 앞에 선 누군가를 구해내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 곧 ‘살림’에 대해 남다른 책무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그들의 부채감이 더는 누군가의 죽음이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발현된 결과다. 도담과 해솔이 각각 물리치료사와 소방대원이 된다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단순하게 읽히지 않는다. 죽음의 깊은 상처는 이들에게 다른 이의 죽음을 지나치지 못하는 태도를 남겼다. 이제 죽음이 있는 곳에 이들은 거침없이 뛰어든다. 사랑-삶의 연결고리에 ‘살림’이라는 하나의 톱니바퀴가 덧붙는 순간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랑-살림-삶의 순환 체계를 가쁘게 돌리며, 이들은 슬픔의 밑바닥을 박차고 올라온다. 죽음의 무력감은 어느새 삶에 대한 의지로 변모한다. 불행의 크기를 전시하던 도담의 냉소적 태도는 해솔과의 상호 돌봄을 통해 행복을 향한 뜨거움을 회복하고, 자기 파괴적인 마음에서 출발했던 해솔의 구조 행위 역시 남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그 근간이 전환된다. 이제 이들의 삶은 생명을 살리고 삶을 지속시키는 격한 포옹의 자리로 서로를, 나아가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에 이른다. 이른바 사랑-살림-삶의 소용돌이라고 할 만한 이미지가 기어이 만들어진다.
체온을 높이기 위해 해솔은 학생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다급하게 등을 쓰다듬었다. 선화도 가세해 새하얗게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해솔과 학생을 덮듯이 안았다. (183쪽)
도담은 자기도 모르게 해솔의 손을 잡은 선화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 도담의 손 위에 선화의 다른 한 손이 포개졌다. (278~279쪽)
도담과 해솔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랑이 추동하는 삶을, 삶이 가능케 하는 살림을, 살림이 완성하는 사랑을 본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환한 소용돌이를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물속을 조금 더 헤엄쳐볼 수 있게 된다. 조금 더 밑으로, 저 밑바닥까지.
1) 윤리적 부담이 폭력성으로 전환되는 상황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이지은, 「착한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최근 소설들의 ‘선한’ 물음에 답하며」(『소셜 클럽』, 문학동네, 2024, 35~51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