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문학
봄과 함께 도달한 K-에세이의 시대

  • 이 계절의 문학
  • 2025년 여름호 (통권 96호)
봄과 함께 도달한 K-에세이의 시대

지난해 모두를 ‘기분 좋은 충격’에 빠뜨렸던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국 문학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커지고 있다. 최근 두드러지는 것은 한국 소설이나 시뿐 아니라 에세이의 해외 진출도 늘고 있다는 점이다. 공교롭게도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강 작가가 처음으로 선보인 새 책 역시 그간의 산문, 일기 등을 모은 에세이집 『빛과 실』이었다.

4월 24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한강 작가의 신간 에세이집은 판매 첫날부터 주요 서점의 온라인 판매량 1위를 기록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차기작을 기다린 많은 독자의 성원을 짐작하게 한다. 이번 책에 작가는 여섯 편의 산문과 여섯 편의 시를 묶어냈는데 북향 정원에서 식물을 키우며 쓴 산문 「북향 정원」, 네 평짜리 마당에 정원을 가꾸며 쓴 일기를 모은 「정원 일기」가 특히 눈길을 끈다.

책에는 일조량이 적은 북향의 정원에서 뿌리를 내리는 식물들과 이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담겼다. 화단의 수도가 동파돼 얼고, 손이 얼고, 외풍이 심하던 겨울이 지나 드디어 3월이 된다. “올해는 불두화 꽃이 핀다!”, “경이롭다, 불두화. 내 키보다 높게 자랐다” 같은 단순한 감탄에서조차 생명의 신비를 감각하는 작가의 충만함이 느껴진다. 볕이 잘 들지 않는 작은 공간에서도 생명이 움트고 자라 결국은 만연해지는 과정은 우리에게 이제 막 비스듬히 들이치기 시작한 봄볕과 그것이 품고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 문단으로 눈을 돌려보면, 새로운 봄 한국 문학의 기세는 K-에세이로 급속히 확산하고 있다.
한국 에세이가 해외에서 큰 반향을 얻은 건 사실 몇 해 전부터 시작된 흐름이었다. 하지만 과거 해외에서 인기를 끈 한국 에세이는 K팝 스타의 후광 등이 컸다. 방탄소년단(BTS)의 RM이 읽었다고 소셜미디어에 밝힌 뒤 영국 출간 반년 만에 10만 부가 팔렸던 백세희 작가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대표적인 사례다.

 

 

K-에세이에 대한 관심은 한류 유행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다. 아카데미시상식 작품상을 받은 <기생충>으로 짜파구리가 유행하고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 이후 달고나가 세계적인 디저트가 됐던 것처럼, K-컬처와 결합한 K-식품에 대한 관심이 책에서도 커지는 건 일견 당연해 보인다. 영국 펭귄랜덤하우스 산하 트랜스월드와 억대 선인세 계약을 맺고 올해 현지 출간 예정인 윤이나 작가의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도 한국인의 소울푸드 라면을 다뤘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해외에서 관심을 두는 K-에세이의 소재가 K-팝이나 음식 등을 넘어 사회문제로까지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미혼 여성 두 명이 공동체를 이뤄 사는 내용을 담은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지난해 미 뉴욕타임스(NYT)가 1개 면을 할애해 조명했다. NYT가 “새로운 삶의 형식을 개척한 한국 여성의 혁명적 목소리”라고 평가한 이후 K-에세이 전반에 대한 관심과 영향력이 높아졌다는 평가다.

이 책을 출간한 영국 펭귄랜덤하우스 산하 더블데이의 수재나 웨이드슨 대표는 최근 동아일보와 서면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미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물론이고 K-푸드나 K-뷰티 등을 통해 한국의 삶과 문화 전반에 관심을 키워 왔다”며 “한국 콘텐츠에서 접하는 이야기들은 매우 다양하며, 모두에게 어필할 만한 요소들이 있다고 느낀다”고 밝혔다. 국내 출판계 관계자들도 “동아시아 역사와 젠더 문제, 사회문제에 대해 한국 2030 여성의 목소리를 담아낸 에세이 등을 추천해달라는 문의가 해외 출판사나 에이전시를 통해 자주 온다”고 전했다.

자연히 국내 문단의 주요 작가들이 쓴 에세이집에 관심을 보이는 해외 대형 출판사도 많아졌다. 미국 하퍼콜린스 산하의 출판사 에코는 김혜순 시인의 시·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를 2026년 봄 미국에서 출간할 예정이다. 2023년 국내 출간된 김금희 소설가의 에세이 『식물적 낙관』(문학동네)은 얼마 전 미 3대 출판사로 꼽히는 사이먼앤드슈스터 산하 서밋북스와 억대 판권 수출 계약을 체결해 큰 화제가 됐다. 『식물적 낙관』은 작가가 정원을 돌보며 사색한 내용을 담은 수필집이다. 영문판 제목은 『The Diary of a Korean Plant Parent(한국인 식물 집사의 일기)』로 정해졌다. ‘한국적 식물 가꾸기’란 책의 정체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해당 에세이집은 미국은 물론이고 영국·독일·스페인·네덜란드·폴란드 출판사와도 각각 판권 계약을 체결했다.

출판계에서는 최근 영미권이나 유럽으로 K-에세이 진출이 확대되고 있는 것을 주목할 만한 성과로 본다. 이전까지는 주로 문화가 비슷한 아시아권에서 관련 작품들이 소비됐기 때문이다. 단행본 분량의 장편 등을 특히 선호했던 북미와 유럽의 출판인들이 K-에세이로 눈을 돌리는 건 한국적 에세이의 독특함 때문이기도 하다. 서구 출판 시장에서 보편화된 전기나 회고록 방식의 에세이가 아니라 특정한 소재, 생활 방식과 이색적인 경험을 통해 깨달은 통찰을 풀어내는 한국식 에세이의 매력이 해외 시장에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소설이나 시, 영화 같은 장르를 넘어서 K-스토리 전반에 대한 관심의 지평이 더 넓어지는 과정으로 읽히기도 한다. 봄과 함께 연이어 전해진 K-에세이 낭보가 이제 겨우 시작인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드는 이유다.

박선희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