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레몬 사탕이 녹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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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여름호 (통권 96호)
레몬 사탕이 녹으면

뭐든지 녹아내릴 수 있을 것 같은 계절이야.

분홍색 숟가락으로 한번 휘저어 본 컵 아이스크림은 회오리 모양의 바닐라 맛 물결을 만들고, 이마를 간질이는 땀방울은 운동장을 달릴 때마다 짧은 앞머리를 흐트러트려. 스탠드 계단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잠든 고양이는 말랑말랑하게 흘러내리고, 얇은 교실 커튼 아래에 앉아 있으면 나도 덩달아 어깨가 따끈따끈해져 저절로 하품이 나오는, 그런 여름이야.

시계는 똑딱똑딱. 초침 소리를 내지만 앞으로도 가지 않고 뒤로도 가지 않는 듯해. 에어컨 바람에 얼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용수철 인형처럼 앞으로 꾸벅꾸벅,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졸고 있는 친구들 어깨 너머로 유리의 뒷모습이 보여. 책상 앞에 꼿꼿하게 앉아 칠판을 보고 있네. 앉은 자세가 꼭 뾰족한 삼각형 같아. 가까이 다가가면 찔릴 것처럼.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봐. 유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

유리를 보면 아직도 겨울 같아. 겨울 방학에 아파트 놀이터 앞에서 유리와 크게 다툰 뒤로 나는 언제나 유리의 뒷모습만 봤거든. 유리는 나한테 말도 걸지 않았고,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금세 고개를 돌렸어. 우리는 엄청 친한 사이였는데 말이야. 유리랑 왜 다퉜냐고? 사실 그렇게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어. 오히려 아주 사소했지. 다음 학년이 되면 유리가 이사 간다는 거야. 솔직히 나는 여기서부터 약간 서운했어.

“언제 가는데? 진짜 가야 해?”

“그건 아직 정확히 정해진 건 아닌데, 일단 내년이래. 엄마, 아빠가 가자고 하는데 어쩔 수 없잖아.”

마치 어린 동생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유리가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이 조금 얄미워 입술을 꼭 깨물었어.

“이사만 가는 거지? 학교는 계속 같이 다닐 수 있는 거지?”

내 물음에 유리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어. 그러면 우리 학교도 같이 못 다니고, 완전히 헤어지는 거잖아? 태연한 유리의 표정이 왜 이렇게 미웠는지 몰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떤 모습이든 다 좋아했는데 말이야.

“그래도 연락하고 지내면 되지.”

이게 그렇게 쉽게 웃으면서 할 말이야? 내 마음도 모르고 그저 웃기만 하는 유리가 미웠어. 찬 바람에 빨갛게 얼어버린 손만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을 툭 던지고 말았어.

내가 말하고도 너무 놀라서,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아. 놀란 듯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유리의 표정과 뒤돌아 빠르게 아파트 놀이터를 빠져나가던 뒷모습만 생생하게 떠오를 뿐이야.

그날 이후로 유리의 표정은 아직도 꽁꽁. 창문 밖에 벚꽃이 피고, 투명한 봄비가 조금 내린 뒤, 다시 여름 햇살이 내리쬘 때까지 유리의 마음 하나만은 아직도 겨울이야. 나를 보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한달음에 달려와 팔짱을 꼈는데 말이야. 이제는 피하기만 하고. 서운했지만 미안하다고 먼저 말하기에는 조금 낯간지러웠어. 처음에는 유리가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속상한 마음이 컸어. 그렇지만 이제는 내가 잘못한 걸 아는데도 막상 입 밖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려니 어색한 거야. 우리가 얼마나 친했는지 알잖아. 그전에는 이런 말을 해본 적이 딱히 없었거든. 싸운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그렇게 머뭇거리고만 있다가 얼마 전, 복도에서 물을 마시려다가 친구들과 유리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

“유리야, 그럼 여름방학 끝나고는 다른 학교로 가는 거야?”

“응. 아마 여름 방학식이 마지막일 거야.”

아쉽다. 친구들은 저마다 웃으며 유리의 어깨를 토닥였어. 유리도 친구들에게 웃어 보였고. 지금 우리 반에서, 아니 우리 학교 전체에서 유리가 전학을 가 제일 아쉽고 속상한 사람은 나일 텐데. 나는 저렇게 웃음도 안 나온단 말이야. 유리는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정수기의 차가운 물이 손목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어. 그러다 유리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어. 내가 너무 빤히 본 걸까? 놀라서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어. 웃고 있던 유리는 나와 마주치자마자 묘한 얼굴로 잠시 갸웃하더니 친구들과 함께 뒤돌아 반으로 쏙 들어가 버렸어. 그건 웃는 얼굴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화난 얼굴도 아니었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딱 미지근한 초봄 같은 표정이었어.

유리가 여름 방학식이 끝나면 다른 학교로 전학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왠지 마음이 조급해졌어. 이렇게 금방일 줄 몰랐거든. 유리와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어. 매일 속으로만 되뇌었던 말을 이제 정말 해야 할 때가 온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불쑥 용기가 났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어떻게 사과하는 게 좋을까? 얼굴을 보고 바로 사과하긴 조금 부끄러우니까 사탕을 줄까? 내가 생각했지만, 꽤 좋은 생각 같았어. 그날 방과후에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큰 사탕 봉지를 샀어. 포장지 안에는 레몬 사탕이 열두 개나 들어 있었어. 열두 번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가벼워졌어. 이 안에는 무조건 할 수 있지!

하지만 막상 점심시간이고, 쉬는 시간이고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유리를 보니 발이 땅에 꼭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어. 유리는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거야? 유리랑 같이 다닐 때는 몰랐는데, 친구가 너무 많아서 다가갈 틈도 없지, 뭐야. 혹시라도 사탕이 들킬까 봐 바지 주머니에 쿡 찔러 넣은 채 괜히 손으로 굴리기만 했어. 이렇게 모두가 쳐다보고 있는 자리에서 유리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내가 상상한 사과의 장면이랑은 좀 거리가 있거든. 난 우리 둘만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 건데 말이야. 유리 옆에 선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속닥거릴 게 분명해. 왜? 왜 사과하는 거래? 쟤 뭐 잘못했어?

…솔직히 이건 좀 아니잖아? 그렇게 학교가 끝나고 혼자 집에 돌아오는 길, 와그작 깨물어 먹어 치운 사탕이 벌써 열한 개야. 그렇게 하나씩 까먹고, 까먹고, 까먹다 보니 오늘이 된 거야. 방학식 전날까지 미루다니, 너무 미룬 건가? 하지만 어쩌겠어. 지금이 아니면 이제 정말 말할 기회가 없어. 어디서든, 어떻게든 오늘 안에 무조건 사과해야 해. 유리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짐하듯 주먹을 꼭 쥐었어. 손안에서 사탕 껍질이 바스락 구겨지는 소리가 났어. 마지막 사탕이야. 이번에는 정말 사과하고 말 거야.

교실 앞에 붙어 있는 시간표를 몰래 손가락으로 짚어봤어. 다음 수업은 과학이야. 그리고 점심시간. 그리고 체육. 쉬는 시간에 과학실로 갈 때, 유리를 잠깐 불러 세울까? 그런데 친구들이 떠들썩하게 웃고 뛰어다니는 복도 한가운데에서 내가 유리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책상 위에 엎드려 버렸어. 그래, 역시 쉬는 시간은 무리인 것 같아. 그러면 대체 언제 말하지?

과학 시간에는 끓는점과 어는 점 실험을 했어. 앞에서는 보글보글 물이 끓고 있는데, 나는 그 너머에 있는 유리의 옆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어. 투명한 비커 안에 유리가 담겼다가, 수증기에 가려 뿌옇게 흐려졌다가. 거품 모양대로 끓었다가 다시 잠잠해졌다가. 유리는 온도계에 그려진 빨간 눈금을 들여다보며 실험 관찰 교과서에 열심히 뭔가를 적고 있었어.

“너 뭐, 비커랑 눈싸움하냐? 빨리 적어.”

눈앞에 불쑥 같은 조 친구의 얼굴이 끼어들었어. 멍하게 있다가 그제야 허둥지둥 연필을 들었어. 유리만 보고 있느라 실험 내용을 다 놓쳐 버렸지, 뭐야. 결국 옆에 앉은 친구의 실험 결과를 겨우겨우 베껴 적어 냈어.점심시간에도 강아지처럼 유리의 뒤만 졸졸 쫓아다녔어. 유리는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어. 그야 당연하지. 열 발자국쯤 떨어져 있었는걸. 주머니에 든 레몬 사탕이 너무 볼록해 신경 쓰였어. 엄지와 검지로도 가뿐히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운데, 지금 나에게는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 걸까? 너무 오래 쥐고 있었더니 손에 끈적한 레몬 향이 밸 것 같아. 유리에게 한시라도 빨리 전해주고 싶은데, 도통 줄 기회가 보이지 않았어. 급식도 먹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점심시간이 끝나고 체육 시간이 됐어.

지금 내 기분은 발야구 같은 걸 할 기분이 아닌데 말이야. 운동장 위에 하얗게 그려진 동그라미 안에 서 있다가 한숨을 푹 쉬었어. 해는 쨍쨍하게 내리쬐고, 시간은 벌써 6교시.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는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날아오는 공을 대충 걷어차고 뛰어가는데, 다른 생각을 너무 많이 한 탓일까? 발이 꼬이더니 그만.

“야, 조심해!”

누가 소리쳤는지도 잘 모르겠어. 세상이 한 번 뒤집히는 것 같더니 그대로 운동장에 꽈당 큰 소리를 내며 넘어지고 말았어. 모래바람이 풀풀 날리는 통에 기침이 나고, 바닥에 쓸린 무릎이 따가웠어. 선생님이랑 가까이 있던 친구들 몇몇이 다가와 부축해 줬는데, 손바닥에도 상처가 났는지 따끔따끔했어. 다 나를 보고 있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어쩐지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피가 방울방울 맺혀있는 무릎만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누가 내 손목을 잡아 쭉 일으켜 세웠어.

“선생님, 제가 보건실에 데려다주고 올게요.”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들어보니 유리였어. 눈이 동그랗게 커져 유리를 올려다보는데, 정작 유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를 바라보더니 내 손을 꼭 잡은 채로 걸음을 옮겼어. 이거 꿈인가? 앞서 걷고 있는 유리의 뒷모습이 너무 가까웠어. 유리의 손을 잡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면서도 잘 믿어지지 않아 어안이 벙벙했어. 중앙 현관까지 어떻게 따라갔는지도 모르겠어. 그때, 유리가 걸음을 멈췄어. 나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고. 유리는 흙 묻은 운동화 코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바닥에 톡톡 부딪혀 털더니 뒤돌아 나를 바라봤어. 내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 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허리를 숙여 내 티셔츠와 바지에 아무렇게나 묻은 흙을 털어줬어. 유리의 동그란 머리를 내려다보는데 아주 문득,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지금만큼 좋은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거라는 그런 예감이.

“잠깐만!”

자꾸 헛나가는 손으로 더듬더듬 바지 주머니를 뒤졌어. 유리가 가버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초조해져 이마에 땀이 났어. 겨우 꺼낸 사탕을 잔뜩 지저분해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는데, 너무 볼품없는 거야. 아까 넘어지면서 같이 부딪혔는지 살짝 깨져있었고, 하루 종일 고민만 하며 포장지를 만지작거렸더니 이미 끈적하게 녹아 있었어. 그렇게 딱딱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녹아버릴 수 있을까? 이 상태로 주기에는 부끄러워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유리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사탕을 가져갔어.

“잘 먹을게.”

유리의 웃는 얼굴을 본 게 얼마만의 일인 걸까? 얼떨결에 사탕도 줬으니, 이제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차례인데. 그 모습을 보니 바보같이 다음 말을 잠시 잊어버렸어.

“빨리 보건실 가자. 너 무릎에서 피 나.”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으니, 유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올렸어. 꽁꽁 얼어붙을 만큼 추웠던 겨울날도, 차가웠던 유리의 표정도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어. 언제 여름이 온 걸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와 있던 게 분명해. 더 이상 무릎이 쓰리지도, 힘을 주어서 쥐고 있던 손바닥이 아프지도 않았어. 우리는 예전처럼 꼭 붙어 함께 계단을 올라갔어. 타박타박, 나란한 발소리가 좋았어. 내 손에서 유리의 손으로 넘겨진 레몬 사탕도 바스락 소리를 냈어. 매일 혼자 들었을 때는 몰랐던, 기분 좋은 소리였어.

 

노경희
동화작가, 2002년생
동화 「벨루가와 여름 방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