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불순 선언

  • 단편소설
  • 2025년 여름호 (통권 96호)
불순 선언

1. 성진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내가 끝나면 세상이 끝나는 거니까. 뼛속까지 파고들어 몸속을 휘젓는 세찬 타격을 느끼며 생각했다. 강철 플래티넘 보디를 갖고 싶다… 영원히 살고 싶지는 않았다. 강해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냥 비참하게 죽지 않기만을 감히 꿈꾸었다.

잠시 후, 쓸데없는 생각조차 점점 흐려졌다. 아프다거나 굴욕적이라거나 얼른 끝났으면 좋겠단 생각, 이후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도 떠올리지 않았다.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단 생각마저 희미해졌다. 정말로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곧 끝날 거였다.

“새끼야, 오늘 죽어 봐.”

폭설이 내리고 있었고 사방이 조용했다. 커다란 눈 결정체가 눈동자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금세 녹아 사라졌기에 아프지 않았지만, 어마어마한 암흑이 내 세계 위로 육중하게 내려앉는 것처럼 보였다.

“너 따위 죽어도 아무도 눈치도 못 채.”

주변은 소음조차 얼어붙은 것 같았다. 차갑다거나 춥다는 느낌도 없었다. 내 속은 이미 냉랭했다.

“너, 원래 죽고 싶다고 했었잖아? 우리가 도와주는 거야.”

 

강철 플래티넘 보디를 가진다면 고통을 안 느낄까? 내가 약하다는 민망함과 굴욕도 없을까? 플래티넘 몸이라면 곧 터질 것 같은 이 울분도 단단히 가둬둘 수 있으려나? 성진이라는 유약한 나 자신을 버릴 수 있다면 뭐든 좋다. 이 삶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면 뭐든 좋다. 죽음으로 새로운 삶을 만나고 싶다. 강력한 몸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 태어나고 싶지도 않다.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악귀들을 나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결국 너희들도 언젠가는 죽는다. 너희에게도 영원한 삶은 없잖아. 너희도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늘 누군가에게 얻어터지며 살고 있잖아. 그렇게 녀석들을 연민했다. 불쌍한 구제 불능 악귀들을 용서할 겨를도 없이 나는 죽어갔다. 악귀들의 웃음소리가 멀어졌고 나는 천천히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누군가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삶을 연속하겠습니까?”

시야는 깜깜했고 몸이 얼어붙어 정신은 몽롱했지만 나는 정확하게 뜻을 밝혔다.

‘아니요. 싫습니다.’

속으로만 말했는데도 마음을 읽었는지 목소리가 이번엔 다르게 물었다.

“그렇다면 다른 삶을 살겠습니까?”

‘음, 그건 괜찮을 것 같네요.’

저승사자가 길 안내를 하려는 건가? 나는 동의를 표했다. 설령 회귀나 환생이라는 선택이 가능하대도 이 삶을 다시 만나고 싶진 않았다. 김성진이라는 놈은 너무도 허약했다. 나는 세상과 맞서고 싶지 않았다. 복수 같은 것을 떠올린 적도 없었다. 그냥 김성진의 삶을 종료시키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

 

하얀 방에 놓인 침대에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눈을 뜨니 몸이 가뿐했다. 내 나이 또래 10대 여성의 몸을 얻어 생을 새로 시작하게 됐다. 회귀나 환생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 뭐지? 이걸 재생이나 갱생이라 부를 수 있을까? 다른 삶이라니, 이런 게 가능하다니.

“이름이 성진이라고 했나요? 그럼, 이번엔 수진이라는 이름을 쓰는 건 어떻습니까?”

침대 곁에서 설명을 들으며 나는 몸을 잔뜩 구부린 채 목뒤만 긁어댔다. 비굴하게 굴던 평소 습관이 튀어나왔다.

“저기, 혹시 저희 부모님께는 연락하셨나요?”

목소리가 전혀 다르게 들려 나는 몇 번이고 헛기침했다.

“엥? 부모님이요? 우와!”

한눈에 봐도 눈빛에 기괴한 기름이 번들거리는 흰 가운 입은 남자가 빙글거리며 나를 비웃었다. 내 나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흰 가운에 점점이 그려진 검붉은 점들은 피가 튄 자국이었다. 미친놈이 분명했다. 조심하자. 나는 한발 물러서며 가운을 여미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오, 상당히 여성스러운 동작인데 자연스럽게 구사하네요. 새로운 몸에 어울리는 새로운 애티튜드로군요. 나는 성진 씨가 보란 듯 아주 멋지게 수진 씨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자아나 의식이란 것도 기껏해야 몸뚱이에 종속되는 거니까. 참 허술하죠?”

자신을 박 박사라 부르라며 그는 자신이 내게 집도한 시술에 관해 설명했다. 성진의 몸은 생명 활동 회복이 불가능한 뇌사 상태였다. 혹한의 날씨에 의식이 가물가물하던 성진에게 말을 걸었던 것은 박 박사였다. 그가 내 동의를 얻어 성진의 뇌신경 활동을 고스란히 인공 뇌로 복제했다(이 과정 중에 성진의 뇌는 잘근잘근 썰려 나갔다고 한다). 그런 뒤 인공 뇌를 고스란히 새로운 신체에 탑재했다.

나는 혹시 수진이라는 여성의 뇌 활동이 여전한 건 아닌지, 혹은 강제로 뇌를 적출당한 몸은 아닌 건지 걱정스러웠다.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표정은 낯선 사람의 것이었지만 겁에 질린 평소 내 얼굴과 똑같아 보였다.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할 때 늘 이런 표정을 지었었다. 다가올 하루가 두려웠다.

박 박사는 수진의 몸을 가리키며 뇌가 없이 태어난 기증용 인공 생체라고 언급했다. 나는 비로소 이해했다. 뻔한 얘기였다. 뇌가 없는 상태로 태어난 인공 생체를 생육시켜 일부 부자들이 자기들만 건강하게 지속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전 세계 1%의 갑부들은 돈으로 영원한 젊음과 영원한 삶을 얻었다. 자신들의 영원한 재산을 영원히 증식하는 방법이었다. 뻔한 설정이 끝내 힘을 얻는 서사는 참 재미없고 식상했다.

박 박사는 영원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영원한 몸에 대해, 그 기술에 대해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최고의 몸을 최선의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기술, 인류의 거의 모든 자원을 다 독점한 전 세계 약 1%의 사람들이 원한 바로 그 기술. 박 박사는 자신도 ‘영원한 몸’ 기술 개발자라고 말했다. 트랜스퍼(환승 보디) 기술은 재산을 영속시킬 사람을 위해 개발되고 실현되었다.

“무한대에 가까운 막대한 재산을 관리해야 하는 사람의 마음을 한 번 상상해 봐요. 자기 자식도 배우자도 부모도 못 믿거든요. 그럼, 누가 소유를 관리하는 게 좋겠느냐? 자기 자신뿐이죠! 자신이 자기 재산의 소유자임을 확실히 아는 자, 재산에 대한 주인 의식을 가진 자가 필요한 거예요. 누가 주인의식을 갖느냐? 자기가 열심히 축적했다는 걸 기억하고 아득바득 지키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죠. 부모가 번 돈은 사실 남의 돈이거든.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건 마음 자세가 아니라 기억입니다. 자기가 힘들게 돈을 벌었던 바로 그 기억을 꼭 가지고 있어야 해요. 마음만으로 기억을 만들어낸다면 가족이라도 그건 날도둑이고.”

박 박사의 연극적인 설명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그를 매드 박이라고 이름 붙였다. 저들의 영원한 삶과 영원한 재산에 대해서든 그를 보조하는 기술에 대해서든 나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이 순간 내 고민은 여자아이의 몸으로 집에 돌아가 성진이라고 밝혔을 때 부모님이 믿어줄 것인가, 하는 것뿐이었다.

“주인의식을 가진 몸을 통해 연속하는 것, 자기 삶과 재산을 영원히 존속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자기 자신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없죠.”

그러면서 매드 박은 자신이 저들의 기술의 미비함을 보완하는 일종의 화이트 해커라고 말했다. 21세기 말 홍길동이라고도 말했다. 나는 의아한 마음으로 물었다.

“저기, 박사님. 그런 기술을 왜 저한테 적용한 건가요? 저는 영원히 사는 거엔 관심이 없어요. 지킬 재산도 없고요. 아니 그것보다 절대로, 절대로 영원히 살고 싶지 않다고요.”

매드 박은 가망 없는 육체, 그러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시체를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식자를 빠르게 찾아야 했다고 말했다. 그가 어젯밤 연구실 뒤쪽 소각장에서 죽어가던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뇌파 대화를 통해 동의를 얻었다. 강철 보디는 아니었지만 나는 갑자기 새 몸을 얻어 새사람이 되었다.

“성진 씨, 곧 내게 고마워할 거예요. 그러니 좀 지켜봐요.”

 

나는 매드 박의 안내를 받으며 수진이라는 여성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집 근처를 서성이며 알아보니 부모님은 내가 학폭 때문에 죽은 걸로 알고 조용한 장례를 서둘러 치렀고, 약간 목돈을 얻은 뒤 이사를 계획하는 모양이었다. 소각장에서 나를 죽게 했던 악귀들은 몇 주 근신하는 척하더니 별다른 처벌이 없자 다른 먹잇감을 찾아다니며 또 활보하기 시작했다. 피 맛을 본 녀석들이라 살생에 중독된 것 같았다. 정말로 구제도 교화도 불가능한 놈들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지켜보며 나는 완전히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수진의 몸으로 나도 이미 내가 아니다. 성진이었다면 악귀들 근처에도 가지 않고 곧장 피했겠지만, 수진은 달랐다.

나는 수진이 되어 성진의 삶이 종료된 그 후의 상황 속을 계속 맴돌았다. 악귀들을 미행하며 복수를 꿈꿨다. 매일 밤 울면서 녀석들을 어떻게 죽일까 계획했다. 대놓고 악귀들이 모여 있는 곳에 성큼 다가가기도 했다. 악귀 중 누군가 내 눈빛을 알아볼까 봐 마음을 졸였지만, 수진을 보며 성진을 떠올리는 녀석은 없었다. 수진의 몸을 음흉하게 훑는 시선을 보며 나는 놈들을 유인하고 감금해서 죽여 버릴지 상상했다. 하지만 차마 실행에 옮기지는 못해 초조했다. 매드 박은 지저분한 실험실 방 하나를 내게 내어주곤 매일 뇌파 검사에만 빠지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의 목적은 자기가 집도한 시술 결과뿐, 성진의 복수 계획 따위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을 터다.

 

복수를 상상할수록 악귀들이 지질한 놈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괴로웠다. 고작 저런 놈들에게 생을 송두리째 뺏겼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억울했고 이전의 성진으로 복수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 자체도 원통했다. 나는 성진일 땐 왜 복수를 꿈꾸지도 못했을까? 수진의 삶은 덤이니 수진으로 죽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에 이러는 걸까?

어느 날 엎드려 울고 있는 내게 매드 박이 말을 걸었다.

“수진 씨, 뭐가 그렇게 힘들어요?”

대답이 없자 이번엔 나를 성진이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성진아, 뭘 하고 싶은 건데? 걔들한테 복수하고 싶은 거니? 아저씨가 도와줄까?”

나는 얼굴을 들어 그를 한참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이 연쇄살인마가 된다면 다시 보디를 변경하면 된다. 매드 박이 환승시켜 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나는 여러 가능성을 점쳐보며 뜨거워졌다. 수진은 훌륭하다. 성진과는 전혀 달랐다. 방법과 과정이 어떻든 새로운 삶을 얻는 인간은 그 자체로 강력한 모양이었다.

얼마 후 매드 박이 내게 새로운 보디를 세 개 확보해 두었다고 넌지시 말했다. 내가 악귀들을 데려온다면 새로운 보디로 환승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작은 강아지 세 마리가 담긴 이동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무척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잘 생각해 봐. 이건 살인이 아니야. 새 삶을 주는 거지. 사랑스럽고 예쁜 존재로 바꿔주는 거니까.”

그는 추가 실험 대상을 확보하길 원할 뿐이라고 했다. 악귀들을 데려올 생각으로 눈을 굴리는 나를 보며 그는 아예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재현 뇌를 작게 만들어야겠네.”

 

그 후의 일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매드 박 연구소에는 귀여운 강아지들 세 마리가 꼬물거렸다. 강아지들을 볼 때마다 나는 힘껏 발로 차고 밟았다. 감히 이빨을 보이는 강아지는 반쯤 마취를 시킨 뒤 생이빨을 뽑았다. 강아지들은 책상 그늘 속에서 으르렁거릴지언정 절대로 내 눈앞에 얼씬대지 않았다. 악귀들의 시신은 실험실 뒤편 소각로로 빨려 들어갔다. 그곳은 불법 화장터가 아니라 합법적인 처리소였다. 환승 보디가 완료되면 이전 몸은 확실히 처분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재산을 나눠야 할 위험이 생기니까. 재산은 없었지만, 성진도 악귀들도 그 화장터에서 안전하게 처분되었다.

뜨거운 소각로 위로 깨끗하고 뽀송한 눈이 내려앉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뜨거운 적 없었던 성진도 저 안에선 뜨거웠겠지. 소각로를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성진의 삶이 완결됐다고 여겼다. 진짜 종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이후 매드 박은 나를 더 이상 수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매드 박이 어느 날 제안했다.

“성진아, 영감님들이 너를 만나고 싶어 한다.”

그는 상당히 흥분한 표정이었다. 1% 그룹에 접근하는 것은 매드 박의 애초 계획이었다. 그래서 나를 만들어냈다고 넌지시 말해주기도 했다. 그는 현시점 환승 보디 시술의 불완전성을 개선할 방안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사실을 1%에게 알리기 위해 애써왔다.

“네가 성공 사례거든.”

매드 박이 성진의 삶에 관심이 없듯 나도 그의 시술 완결성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새로운 보디에 무사히 안착한 덕에 나와 매드 박은 1%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의도치 않게 그 세계에 끼어들게 되었다. 우연한 일이었다. 1%라니, 이렇게 기적적인 확률이라니, 이런 편입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태어나자마자 특별한 삶을 손에 쥔 자들도 그 삶을 의도하진 않았을 것이다. 삶은 우연이다. 그러니 성진이 맞아 죽은 것도 우연이다. 나는 애써 성진의 일로 치환시켜 저들의 삶도 이해하려 애써보았다.

매드 박은 나를 앞세우고는 ‘영감님’들이 머물고 있다는 호화로운 휴양 섬으로 입장했다. 1%는 자신들의 기술을 보완하길 원했다. 매드 박은 그 1%에 들어가고 싶었던 뜻을 실현했다. 갑자기 1%에 진입하려면 매드 박이나 나처럼 미쳐야 가능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넓은 회담장으로 직행했다. 매드 박은 곧은 자세로 영감들 앞에 섰다. 얼굴에서 웃음기마저 지우고는 내게 시술한 기술을 상세하게 프레젠테이션했다. 무대에 서 있는 그는 겸손하고 성실하고 치밀한 과학자로 보였다.

“종래 트랜스퍼(환승 보디) 기술의 치명적 약점인 ‘CPG-15(f)’라는 특정 유전자의 결손을 보강했습니다.”

그는 나를 그 증거라고 내밀었다. 나는 엉겁결에 성공 사례가 되어 회담장 중앙에 섰다. 가만히 둘러보니 매드 박이 영감님들이라 부른 자들은 매우 젊었다. 아니, 겉으로 보기엔 다들 어린아이들이었다. 마치 개 품종 품평회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질문 공세를 받았고, 차근차근 내 상황을 설명했다. 의장으로 보이는, 가장 높은 단상에 앉은 자가 귀여운 목소리로 위엄 있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김수진이 된 김성진이라고 말했다. 영감들은 동시에 여러 질문을 쏟았다. 어떻게 죽었고, 어떻게 깨어났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성진으로서 죽게 된 상황을 설명하다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누구한테 하소연하는 건지도 모를 얘기를 쏟아냈다.

“혹시… 맞아 죽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아시나요?”

회담장이 조용해졌다. 나는 그 순간의 끔찍함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래서 김수진이 된 후 김성진의 원한을 복수했다고 밝혔다.

“완전한 희열이었습니다. 김수진으로 태어나 살아왔다면 느낄 수 없을 상쾌함이었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그중 줄곧 미소를 짓는 어린 소년과 계속 눈이 마주쳤다.

일그러진 속내를 털어놓았을 뿐인데 말을 마치자마자 큰 박수가 터졌다. 매드 박마저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누구보다 크게 손뼉을 쳤다. 그들의 삐뚤어진 윤리관과 내 복수심이 의외의 곳에서 맞아떨어진 모양이었다. 품평회가 끝나자, 회담장을 퇴장하던 사람들이 모두 내게 다가왔다. 내 등을 쓰다듬으며 성진을 응원한다고 말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내가 나인 것을 기뻐했다. 나를 보며 순수하다고 했다.

“우리도 성진 씨처럼 순수하게 영속하길 원해요.”

순수하다는 표현에 무슨 의도가 있는 건지 잘 이해되진 않았지만, 환대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매드 박은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실험동으로 떠났다. 나는 방으로 안내받았다. 우리는 애초에 그곳에 머물렀던 것처럼 그 그룹의 일원이 되 었다.

내 방은 전망이 아름답고 호화스러운 곳이었다. 스마트폰 속 이미지로만 보던 호텔 스위트룸 같았다. 영속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니 이 방을 내게 영원히 허락한다는 뜻일까?

“안녕? 수진이라고 했지?”

로비에서 한 소년을 만났다. 품평회에서 계속 눈이 마주쳤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복출이라고 밝혔다. 복출은 한 눈에도 열다섯 살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130세라고 했다. 그는 나를 수진이라고 불렀다. 품평회에서 영감들이 나를 성진이라고 부르며 기쁘게 환영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나를 수진으로 대했다. 아무래도 나를 여성으로 보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네. 재밌게 잘 지내보자. 난 옆방 살아. 여기 애들과는 마음이 잘 통할 거야. 다들 너랑 비슷한 경험을 해왔으니까.”

복출은 환한 얼굴로 웃었고 그 후로도 만날 때마다 호의적이었다. 매드 박이 없는 숙소에서 나는 복출의 안내를 받으며 생활하기 시작했다.

복출은 잘 웃고 잘 먹고 수영과 댄스를 즐기는 아이, 얼핏 봐선 그저 건강한 청소년이었다. 그의 이력을 듣고 놀랐다. 사탕수수 공장으로 시작해 글로벌 빅테크 자이언트 기업으로 성장한, 100년 역사를 지닌 T 기업. 김복출은 T 기업의 초대 이사장이자 현직 이사장이었다. 그는 올해 포브스 선정 한국 부호 순위 10인에 이름을 올렸다. 살짝 알아보니 국가 연간 예산 30% 정도가 그의 재산이라고 했다. 서른 살쯤에 그는 남쪽 섬을 오가며 직접 사탕수수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 창업한 영세 공장을 100년 후엔 제조, 유통, 투자, 연구를 망라한 초특급 종합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100년간 건재했다. 조금이라도 노화해 효율이 떨어지면 자기 몸을 더 젊은 몸으로 바꿔갔다. 소년의 몸을 가리키며 복출은 아홉 번째 환승한 몸이라고 속삭였다.

그는 수진에게 지나친 관심과 애정을 보였고, 나는 그게 역겹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여성의 몸을 얻게 된 것도 불편했지만, 진즉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130세 할아버지가 소년인 척, 순수한 척, 유사 연애 따위를 즐기는 것도 볼썽사나웠다. 복출은 이곳의 모든 사람이 나를 성진이라 부르는데도 혼자서만 꿋꿋이 나를 수진이라 불렀다. 나는 점차 복출과 거리를 두었다. 그를 경계했고, 복출은 그런 나를 한 발 떨어져 바라보았다. 번들거리는 눈이 느껴져 재수 없었다.

얼마 후 부모님이 나를 찾아왔다. 매드 박과 이곳 연구자들이 초청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나와 부모의 상봉을 지켜보겠다며 옆방에 머물렀다. 이것도 일종의 시술 검증이라고 했는데 매드 박은 그냥 평소처럼 내 마음대로 행동하라고 했다. 나는 약간 긴장한 마음을 안고 부모님 얼굴을 보러 갔다. 성진과는 완전히 다른 옷차림으로 한껏 치장했다. 걸음걸이나 눈빛마저 성진과 다르게 보이도록 연습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계산했던 행동을 하나도 발휘할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설이 준비해 준 접견실로 들어서자마자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는 나를 바라보며 감격스럽게 말했다.

“성진이구나. 맞구나!”

나는 최대한 차가운 눈을 만들며 엄마 얼굴을 외면했다. 아예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 모습조차 반겼다.

“네 눈을 보니 딱 알아보겠다. 우리 성진이가 살아있다니! 오, 주님, 감사합니다!”

엄마는 내가 아팠을 때 처방받은 약조차 먹이지 않고 기도만 시켰다. 악귀들 부모에게 몇 번이고 합의금을 받았고, 두 사람은 그걸 도박과 쇼핑으로 탕진했다. 싸늘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아빠가 엄마를 달래며 말했다. 한 눈에도 침착함을 연기하는 게 보여 속이 뒤틀렸다.

“성진아, 박 선생님이 너를 구해주셨다며. 이 은혜를 우리가 어떻게 갚아야 하니. 엄마 아빠가 여기 머물면서 청소나 정원 일이라도 할까? 조금이라도 갚을 방법은 없을까?”

긴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엄마 아빠를 볼 때마다 한숨을 쏟았던 것이 생각났다. 두 사람도 옛 생각이 나는지 민망한 듯 웃었다. 여길 들어오겠다는 걸 보아하니 악귀들 부모에게 받은 합의금까지 다 쓰고 갈 곳도 없는 모양이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부모라는 작자들이 미워 죽을 것만 같았다. 영감들 표현을 빌리자면 이 감정은 아주 순수했다. 나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싸늘하게 말했다.

“저는 김수진입니다. 말씀하시는 김성진이 누군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두 사람은 나를 어르며 이런저런 옛 기억을 애틋한 척 늘어놓았다. 하지만 나는 차가운 태도로 일관했다. 나를 이용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부모는 내게 악담을 퍼붓고 떠났다. 예전부터 우리는 서로 얽히지 않는 게 좋은 사이였다. 내가 성진일 때부터 그랬다.

두 사람이 떠난 방에 홀로 남아서 나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엉엉 울고 말았다. 조금만 울려고 했는데 목이 메어 꺽꺽 오열했다.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렀다. 우는 목소리가 너무 얇고 높아서 다른 이가 우는 것만 같았다.

방으로 돌아오자 매드 박이 환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부모님께 연락했냐고 물어볼 땐 언제고? 매정하게 내쫓은 거야? 가끔 오시라고 하지. 산해진미 요리 맛보게 해드리면서 좀 빈정거려도 좋을 걸 왜 그렇게 매몰차게 굴었냐, 성진아?”

매드 박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성진과 관련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러니까 내가 성진의 트라우마를 드러낼 때마다 특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 처음엔 매드 박이 수진이 여성적인 행동을 보는 걸 좋아하는 음흉한 남성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선악 기준조차 없는 것만 같았다. 전에는 시술 결과와 뇌파 반응에만 관심을 보였던 매드 박은 이제는 오로지 성진의 콤플렉스에 집중했다.

솔직히 그의 태도를 보며 조금 기뻤다. 그는 성진의 아픔을 이해해 주었다. 매드 박이 나의 두 번째 아버지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어디까지나 성진으로만 대했다. 휴양 섬의 영감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복출은 틈만 나면 내 방에 찾아와 소파와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했다.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아예 죽치고 살았다. 나를 수진으로 대할 때 정색했더니 복출은 평소에는 또래 동성 친구처럼 대했고, 가끔은 손자처럼 하대하기도 했다. 그러다 조금 방심하면 나를 자꾸 아름다운 여성으로 대했는데 그때는 정말로 닭살이 돋고 구역질이 났다.

“수진아. 너 되게 예쁜 거 너만 모르는 거 알지?”

“우웩, 할아버지 꺼져!”

내가 질색하는 걸 보며 복출은 즐거워했다. 거부할 때마다 복출은 몸을 밀착하며 다가와 속삭였다.

“야, 넌 내가 정말 130살 할아버지로 보여? 넌 순수한 게 아니라 순진하도록 멍청해. 네가 정말 김성진인 것 같아?”

“뭐라고?”

복출은 내가 정말로 김성진이라면 그 이유를 말해보라고 추궁했다. 이유 따위 필요 없었다. 죽기 전부터, 죽은 이후도, 수진의 몸을 얻기 전에도, 그 후에도 나는 계속 김성진이었다. 내가 나라는 것에 무슨 이유나 증명이 필요하단 말인가?

“나는 단 한 번도 김수진인 적이 없어.”

그러자 복출은 나의 단단한 전제가 물렁하다는 걸 알려주는 짧은 물음을 던졌다.

“왜?”

말문이 막혔다. 복출이 나를 꾀려 한다고 의심했다. 나를 수진으로 만든 뒤 여자 친구 삼고 싶은 걸까? 복출은 나를 보며 멍청하다고 공격했다.

“이렇게 순수하고 멍청하니 여기 영감들이 널 좋아하는 거지. 근데 말이야. 여기선 널 원하는 게 아니라 너의 믿음을 원해. 네가 널 김성진이라고 믿고 있는 바로 그 믿음을. 이전의 자아를 잇고 있다고 믿는 순수함이 이곳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네가 성공 사례인 거야. 그에 비하면 나는 불순해진 거고.”

복출이 끅끅대는 웃음소리를 남기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2. 수진

 

복출이 떠난 방에 홀로 남아있자 매드 박이 다가왔다.

“옜다. 네 친구.”

죽은 강아지 사체가 발밑으로 떨어졌다.

“으악!”

나는 소리를 질렀다. 강아지가 악귀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놀랐다. 한 번도 쓰다듬어 본 적도 없었고 귀엽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 강아지였지만, 생명이 휘발된 동물의 껍데기가 불쌍하고 안쓰러웠다. 내 발에 차였던 강아지의 배는 홀쭉했다. 한 줌도 안 되는 작고 하얀 배를 있는 힘껏 발로 찼던 짓이 떠올랐다. 녀석이 악귀라는 것을 알면서도 죄책감을 느꼈다. 성진의 발이 아니라 수진의 발로 강아지를 찼던 걸 생각하며 나는 수진이 저지른 죄를 대신 떠안는 기분이었다. 강아지가 편안한 곳으로 떠났길 기도했다.

매드 박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성진아, 성진아, 지금 뭐 하는 거니? 옛 복수도 다 끝났겠다, 이전 일들 다 잊고 새출발하려고? 왜, 옆방 영감님이랑 결혼이라도 하고 싶어졌어?”

매드 박은 또 연극적으로 혀를 차며 내가 드디어 불순해졌다고 말했다. 이전의 기억을 잊고 새로운 삶을 즐기려 한다고 했다. 여자가 되어 좋으냐고 비아냥댔다. 나를 한껏 모욕하면서도 재밌다는 듯 엉큼하게 웃었다.

“근데 나는 네가 성진이여도 좋고 수진이여도 좋다.”

성적인 의도가 담긴 말인가? 나는 불신감에 얼굴을 찡그렸다. 매드 박은 냉담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오해는 하지 마. 널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야. 네가 정말 가치가 있는 인간인지 아닌지 나도 몰라. 그냥 네 선택이 궁금하다. 네가 성진과 수진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든 널 지지한다. 나는 너를 만들어낸 신이니까.”

그는 멋진 말을 했다면서 호기롭게 웃었다. 양아치 같아 보이는 경박한 웃음이었다. 나는 성진이 원래 지닌 성품과 수진으로서 품게 된 감정 따위를 곰곰이 비교해보기 시작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몸이었다. 수진의 몸은 훨씬 자유롭고 유연했다. 성진보다 심지가 곧고 행동력도 있었다. 성진보다 냉정했고 상황에 덜 휘둘리고 덜 상처받았다. 그래서 성진 이상으로 성진의 일들에 개입할 수 있었다. 수진이 대신 복수해 준 것이었다. 만약 성진의 몸과 마음 그대로 부활했다면 도저히 못 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일을 한 건 수진이었다. 그러니 이 몸은 더 이상 김성진이 아닌 거다. 그런데도 왜 김성진을 잇고 있을까? 김성진이라고만 믿고 있는 걸까? 나는 복출이 했던 말들을 곱씹었다.

나의 심적 변화를 눈치챈 사람들도 늘어갔다. 매드 박은 나를 보고 조심하라고 언질을 줬다.

“네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우린 여기서 쫓겨날 거다.”

“왜죠?”

매드 박은 카메라 각도를 가리려는 듯 매우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몸을 틀더니 내 귀에 속삭였다.

“네가 성진이든 수진이든 난 상관없어. 하지만 영감들은 달라. 영감들에게 너는 반드시 김성진이어야만 해. 그러니 소각장으로 가기 싫다면 절대 티 내지 마.”

매드 박의 말에 더 혼란스러워졌다. 수진으로서 한 행동과 의지를 모두 부정하라는 건가?

 

며칠 후 복출의 친구라며 소현이라는 소녀가 불쑥 내 방을 찾아왔다. 소녀는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외양이었지만 말투만큼은 어른스러웠다. 구사하는 어휘와 말투가 꽤 고풍스러워 마치 시대극 속 아역 연기자 같았다.

“그래, 자네 이름이 성진이라고 했나? 복출이가 그대를 꽤 귀여워하는 모양인데 자기는 복출이가 욕심이 안 나나 봐? 130살치고 소년미가 있는 양반이야, 저 친구.”

소현 역시 재산 순위로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유명 자산가라고 했다.

“복출이 그 양반은 앞으로의 삶에 완전히 자기 목숨을 걸었어. 그런데 자기는 뭘 걸고 여기 온 겐가?”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기댄 소현의 자그마한 몸은 소파에 빨려 들어갈 듯 폭 파묻혀 있었다. 소현을 내려다보며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부자들이 목숨 걸었다는 말이 제일 가소롭다는 거 알아요? 할머니, 우리는 목숨 을 걸지 않아도 돼요. 사는 일이 곧 죽는 일이니 각오조차 새삼스럽거든요.’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성진을 보았다. 파국 속에 사는 성진의 썩은 표정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죽는 건 무섭지 않았다. 이미 죽어 있었으니까.

“복출이는 참 용감해. 특별한 분이지. 130년간 고생했던 시절, 까짓것 기꺼이 다 버릴 수 있다잖아. 성스럽고 숭고하달까. 나로선 좀 이해가 안 가기도 하지만.”

소현은 복출의 비밀을 넌지시 말해주었다. 복출은 전 재산을 다 버리고 자기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자신은 T 그룹 회장 김복출의 삶을 잇는 자가 아니라고, 그냥 열다섯 소년이라고 선언하겠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의아했다.

“재산을 다 버린다고? 굳이 왜…?”

소현이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내 말이 그 말일세.”

소현은 조금 한숨을 쉬며 환승 보디를 반복하다 보면 어디선가 연속성이 끊어진다고 말했다. 기억도 희미해져 아등바등 고생한 시절도 남 일처럼 느껴지고, 피 같은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도 약해지더라고 말이다.

“복출이도 우리도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달았어. 나는 환승한 게 아니야. 5대째 복출, 4대째 소현 같은 게 아니야. 애초에 나는 그냥 나였어.”

소현이 쓸쓸하게 말했다. 하지만 당당히 공표할 순 없었다. 재산 소유권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환승한 몸이 이전 삶을 거부한다면 2순위 후계자도 가만있지 않을 터다. 만약 이전 삶이 사망 처리된다면 그의 재산도 공중에서 흩어진다. 그 바람에 이 소녀는 최소현 할머니의 이전 모습을 더욱 과하게 보강해 연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근데 하다 보니 내가 소현 할머니랑 잘 어울리더라고.”

그 말인즉 소현도 순수함을 연기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전 삶을 연속하고 있다고 믿고 또 말해야 그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이어받을 수 있으니까.

“필요하니까 믿는 거지. 믿을 만해서 믿는 게 세상에 얼마나 되겠어?”

선조인 원본의 기억과 의식과 유전자를 잇고 있다고 소현은 믿는 것이다. 자신에게 소현의 주인의식까지 있다고 믿으며 재산을 보호하는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걸 거부한다면 아무것도 누릴 수 없으니. 소현의 얘기를 듣다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기 있는 순수한 자들은 모두 그냥 자신이 환승했다고 믿고 있다는 말이었다. 매드 박이 지적한 것처럼 환승 보디들의 유전자 연결이 불완전해 자아의 연속성을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나처럼 새로운 몸에 걸맞은 새로운 자아가 발아되기라도 한 것일까?

소현은 눈을 부릅뜨고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왜? 재산만 있으면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어? 나를 버텨내야 하는 기분을 알아? 셀 수 없는 재산이 있으면 뭐 해? 내가 최소현이 아닌데 그게 어떻게 내 재산이 되지? 난 우리가 너무 불쌍해. 너희가 보기엔 돈만 있으면 뭐든 다 해결될 것 같지? 안 그래?”

소현이 짐짓 슬픈 표정을 지었고, 내 마음속엔 싸늘한 바람이 스쳤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자들이라 결국 권태라는 결말에 빠졌구나. 무한대여서 셀 수 없는 자산을 세다 드디어 미쳐버렸구나. 더 불쌍한 사람들을 모두 잊고 결국 자신을 연민할 지점이나 열심히 찾아냈구나. 소현이 내 덤덤한 표정을 보고는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

“듣자 하니 학폭 가해자 애들 직접 죽였다며? 그 애들 부모 찾아가서 네가 사실은 성진이라고 밝히면 어때? 너도 아닌 척 연기하면서 살고 있잖아? 너도 똑같으니까 우리 복출이도 좀 응원해 줘. 불쌍한 양반이야.”

소현의 가시 돋친 말이 미우면서도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수진이라는 삶을 욕망한 적도 없었지만, 성진이었다면 이 일들을 다 해낼 수 없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는 성진이 아니다. 나는 불순해지고 말았다.

 

옆 방문을 노크하니 복출이 쓸쓸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꼬맹이 숙녀님, 할아버지 보러 온 거야?”

복출은 단출한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곧 휴양 섬을 나간다고 말했다.

“왜요? 왜 떠나요?”

“이제는 나로 살아 보려고.”

그는 자신이 기억도 못 하는 재산에 전혀 집착하지 않았다. 무한대에 가까운 숫자는 허상에 가깝다. 실체조차 체감할 수 없는 자산을 지키며 문지기로 사는 것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죽을 때까지 혼자 넉넉하게 살아갈 재산은 이미 세탁해 숨겨두었다. 그리고 이곳 영감들은 복출처럼 흔들리는 환승 인간들을 잡아 재수술을 시도하려 했다. 재수술에도 실패하면 결국 다음 환승이란 명목으로 죽임을 당했다.

“너도 여기 영감들의 평가에 너무 연연하지 마. 영감들도 서로를 감시하면서 다음 먹잇감을 찾기나 하니까.”

그는 나를 만나 점점 불순해지는 과정을 지켜보아 좋았다고 말했다.

“네가 성진과 다르다고 느낀다면 그때부턴 수진으로 살아. 수진으로 사는 삶도 네게 주어졌잖아?”

복출은 자신이 130살이 아니라 여덟 살이라고 했다. 원본을 재현한 뇌를 새 몸에 환승시킨 게 8년 전. 그때부터 복출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130년분 원본의 기억과 감정이 자신에게 깃들지 않았다. 오직 여덟 살의 몸으로 경험한 새로운 일만이 온전한 자기 경험이자 소유라고 느꼈다. 자기 몸에 어울리는 것, 몸으로 체감한 순간만을 자기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온갖 고생을 하며 천문학적 돈을 벌었다는 기억은 자기 일이 아니었다.

“태어나자마자 국가 예산의 30%쯤 내가 가지고 있다니, 그건 좀 이상하잖아? 게다가 법인 계좌들 속에나 있지 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돈인데 내가 왜 그걸 평생 관리해야 해?”

복출의 심정을 듣다 보니 이 휴양 섬 영감님들의 초조함도 알 것 같았다. 복출처럼 자기 삶을 살겠다는 이기적인 선택은 시술의 불완전성이자 오류이기 전에 체제의 위협이 되었다. 이전의 자신을 이어가는 순수한 선택만이 시스템의 안정을 뜻했다. 영원히 재산을 증식시키고 지키는 일, 그 일을 감당하는 것만이 환승한 자들이 요구받는 순수함이었다. 자기 것인 양 목숨 걸고 재산을 지킬 이가 재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은 여기선 불순한 것이다. 나를 성진이라 여기며 등을 두드려주고 응원했던 영감들의 의도를 이제 알 것 같았다.

바닷가를 산책하듯 가벼운 차림으로 그는 거처를 나섰다. 그를 배웅하는 길에 복출은 내게 속삭였다.

“지켜줄 사람들이 있어.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야.”

복출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혹시 세 번째나 네 번째 유산 상속자와 결탁이라도 한 걸까? 재산 일부를 떼어주고 안전을 보장받았을까?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이제 누구로 살 거야?”

당장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복출은 대답 없는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 수진아.”

숨겨둔 작은 배를 타고 복출은 섬을 떠났다.

숙소로 돌아와서도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조차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성진으로 사는 것은 끝내 복수하는 일뿐이다. 이 약한 몸에 울분을 영원히 담는 것이었다. 수진으로 사는 것은 자신과 무관한 일로 지은 죄를 참회하며 새 몸에 적응해 사는 것이다. 어느 쪽도 내 삶이 아닌 것 같았다.

 

회담장에 불려 나갔다. 이전과 똑같은 질문을 들었지만, 나는 전과 같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누구죠?”

“저는… 한때 김성진이었지만, 점차 김수진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회담장이 술렁거렸다.

“왜 그렇게 느끼죠?”

“지금의 저는 이전의 성진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니까요.”

천천히 수진의 마음을 드러내자 정말로 수진이 된 것 같았다. 수진이었기에 성진의 일에 관심을 가진 거다. 내가 만약 또 다른 소년의 몸을 가졌다면, 혹은 성진보다 훨씬 약한 몸과 마음을 얻어 환승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복수 따위 일절 감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약해 빠진 김성진을 혼자 욕하고 비웃으면서 나와 무관한 일로 여기고 다 잊었을지도 모른다. 성진이로 새로운 기회를 얻었대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거였다. 하지만 수진은 성진의 일에 아파했다.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생각했고 그 일에 직접 나섰다.

회담장에 있던 사람들이 신경질적으로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곁에 서 있던 매드 박이 내 앞을 막아서며 변명하듯 외쳤다.

“여러분, 이 케이스는 실패했지만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될 것입니다! 인공 뇌를 재현할 때 시냅스 전달 물질 분비량이 저하되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기억의 뇌 새김이 약해지는 구간이 있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추가 시술을 통해 충분히 원상 복구할 수 있습니다.”

매드 박의 말을 반박하는 사람이 마이크를 잡았고, 곳곳에서 사람들이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운 곳 한복판에서 나는 딴생각에 빠졌다. 죽은 강아지들은 어떻게 됐을까? 매드 박이 소각장에 던져버린 걸까? 강아지들 장례식을 치르고 싶었다. 작은 봉분 앞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 악귀들의 얼굴은 이제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김수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아니면 김수진으로 살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분노한 이들의 표현대로 나는 불순해졌다. 의심이 늘고 있다. 애초에 매드 박이 나를 성진이라고 믿도록 유도한 건 아닐까? 성진과 전혀 관계없던 수진에게 성진의 기억을 심어준 건 아닐까? 그래서 수진이 자신과 무관한 일을 자기 일처럼 느끼고 복수하게 한 것인가? 영감들도 원하는 게 바로 그 기억과 믿음이니까. 나는 영감들과 달랐다. 지켜야 할 재산도 없었고 이어가야 할 이전의 자아조차 없었다. 김성진 따위도 내 알 바 아니었다. 김성진도 성진의 끝을 원했다. 내가 김수진이라면 더욱 상관없었다. 그러자 결론을 얻은 것 같았다.

매드 박은 어쩐지 한층 더 흥분한 표정으로 큰 화면에 뇌 스캔 사진을 띄워놓고 새로운 시술 방식을 설명했다. 그는 정말로 미친 게 분명했다. 다른 인간은 어떻게 되든 그는 이곳 휴양 섬에 머무는 것 자체로 행복한 모양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새로운 시술 방식을 설명한 뒤 매드 박은 보강 시술 과정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하겠다고 약속했다. 영감들이 동의한 뒤에야 매드 박과 나는 그 방을 나올 수 있었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은 매드 박의 실험 쥐로 사는 일뿐이었다. 더 이상 성진으로 살아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우연히 만들어진 수진으로 살아갈 이유도 딱히 없었다. 매드 박의 연구를 돋보이게 할 역할로 살 이유도 없었다. 이제야 복출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의 결심과 실행에 늦게라도 나도 함께할 수 있을까?

나는 매드 박에게 부탁했다. 강아지들 사체를 들고 악귀들의 부모님에게 찾아가자고 말했다. 성진의 일로 내가 저지른 죗값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매드 박이 반갑게 눈을 빛내더니 영감님들에게 연락해 하루 외출을 허락받아왔다. 매드 박이 영감님을 설득한 모양이었다. 내가 성진의 경험을 다시 겪으면 추가 시술 시 이전 기억 뇌 새김이 더 효과적으로 장착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 나는 매드 박과 함께 자율주행 차량에 탑승했다. 오랜만에 섬 밖으로 나왔다. 99%의 사람들이 허덕이는 곳, 죽어가던 내가 살았던 이전의 세계, 영원히 사는 자들에게 고혈을 빨리며 나날이 황폐해져 가던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휴양 섬 경비 구역을 벗어나자마자 바깥이 이전과 다르다는 걸 한눈에 알았다. 여긴 전쟁터 한복판 같았다. 전보다 더 황량했다. 이곳 사람들은 AI 군대에 의해 통제받고 있었다. 길이 없는 곳에서 무단 횡단이라는 명목으로 사살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이미 도래한 종말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었다.

그 순간 사람들의 함성이 들렸다. 기계 병기들을 막아서며 사람들이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한 소년을 에워싸고 있었다.

“저기…!”

차창 너머로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그 소년이 복출이라는 걸 알았다. 복출은 사람들의 함성 속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자기를 지켜줄 아주 강한 사람들이 있다더니….”

세 번째나 네 번째 유산 상속자와 결탁이라도 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바깥의 우리를 말한 거였어?”

그러자 매드 박이 내게 말했다.

“복출은 똑똑한 녀석이야. 자기 소유를 99%에게 모두 건넸거든.”

그 말을 하는 매드 박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비아냥거리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의 환호가 잠잠해졌다. 강철 무덤이 보였다. 살육을 위해 편파적으로 학습된 기계 병기들이 부서져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철 언덕 위로 소년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복출을 향해 환호했다. 복출이 손을 높이 올리자 바짝 말라 있던 분수대에서 물이 쏟아졌다. 한동안 더러운 물이 쏟아지다 서서히 맑은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김복출의 재산은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닙니다. 원래 여러분의 것이었습니다!”

복출의 연설에 사람들이 환호했다. 복출은 수세가 적은 1%의 영감들보다 많은 사람 속에서 살길 선택한 모양이었다. 허상의 숫자보다도 눈에 보이는 환호 속에서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어왔던 임무, 누군지도 모르는 선대의 전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포기했다. 대신 자기 수명과 자기 몸과 자기 삶을 택했다.

복출의 얼굴이 달떠 보였다. 나는 문득 상상했다. 100년 전 사탕수수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던 복출은 지금 저 표정과 비슷하진 않았을까? 그는 주어진 일들을 거부함으로써 진짜 복출을 잇게 된 건 아닐까? 영원을 독점하려던 자들의 의도를 거부함으로써 진짜 영속성을 완성한 것은 아닐까?

자율주행 차량 반대편 문이 벌컥 열렸고, 곧 매드 박이 바깥을 향해 달려 나갔다. 매드 박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복출을 향했다. 복출을 저지하려는 것 같았다. 복출을 잡아 재시술을 시도하려는 건가? 복출도 실패 사례라는 거겠지? 나는 서둘러 차량에서 내렸다. 불안정하고 날카로운 지면을 느끼며 99%의 세계로 다시 발을 내디뎠다.

“복출아!”

매드 박이 달려간 순간, 복출이 뒤를 돌아보았다. 복출의 표정이 굳어졌다. 주변 사람들의 저지를 뚫고 매드 박이 무리의 중앙으로 달려가 복출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매드 박이 복출의 손을 끌어당기는 순간, 나도 매드 박의 반대편 팔을 꽉 잡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우릴 내버려둬!”

슬로 모션처럼 주변 풍경이 천천히 바뀌었다. 매드 박이 팔을 잡은 나를 돌아보았고 그 순간 그가 사람들을 향했다. 잠시 후, 매드 박이 양손으로 복출과 내 손을 잡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 매드 박이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이 둘이 우리의 성공 사례입니다!”

곧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끝날 줄 몰랐다.

“우리가 저들 세계에 불연속을 만들어냈습니다!”

매드 박과 복출이 나를 바라보며 비로소 웃음을 보였다. 나는 팔을 높이 치켜든 채로 이 일들의 전모를 천천히 이해했다. 복출은 정해진 일을 거부해 완전한 자신이 되었다. 나는 수진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매드 박은 우리와 같은 사람을 원했다. 그리고 휴양 섬에 들어가 단절을 만들기로 했다. 1%의 독점을 균열 내기 위해 환승자들의 분열을 만들었다.

단단한 환호성이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소리가 우리를 꽉 끌어안은 듯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곧장 안전한 공간으로 이동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예요?”

조용한 곳으로 피난한 뒤 매드 박은 내 질문에 차근차근 답해주었다. 환승 보디와 뇌 재현은 기술적으로는 완벽했다. 매드 박은 나나 복출에게 일부러 거짓 기억을 주입해 자아의 연속성을 끊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몸이 바뀌면 이전의 기억도 자아도 연속되기 힘든 게 당연해. 같은 몸이어도 환경에 따라 자아는 바뀌는 법이니 말이야. 다들 그냥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동일하다고 믿고 사는 것뿐이니까. 나는 그 사람들이 구상한 ‘영원한 몸’이란 것도 그저 믿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

매드 박은 복출과 수진이 아주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소현을 보며 부자연스럽다고 느끼지 않았느냐고 물으면서 말이다.

“자, 너는 성진이니, 아니면 수진이니?”

 

*

 

아지트에서 생활하며 복출은 아예 유치원생처럼 유아적인 행동을 보였다. 퇴행한 아이 같은 언행을 고집했다. 나는 한참 수진다움에 집착하며 여성적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시도해보다 전부 포기했고, 보디빌더가 되기로 결심해 매일 훈련에 나섰다. 성진의 몸으로 시도하지 않았던 강인함을 실험해 보기로 했다.

“네가 약하다는 사실이 싫은 거야?”

복출이 훈련 중인 내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성진인 게 싫은 건지도 몰랐다. 복출은 질문을 바꿔 다시 물었다.

“그럼 죽는 일이 무서운 거야?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게 무서워서 그래?”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한 번 죽었었지만, 나는 그때도 지금도 죽음이 무섭진 않았다.

 

“죽는 건 무섭지 않아. 진즉 죽어있었으니까.”

복출은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나는 무서운데. 영원히 살 걸로 알았으니까…”

 

수진으로 지내며 계절의 변화를 네 번 정도 겪었다. 이상하게도 매년 새로운 계절을 맞는 기분이 들었다. 겨울엔 손발이 차가워 몸이 시렸고, 지독한 생리통을 경험했다. 선호와 취향이 바뀐 것도 조금씩 발견했다. 몸에 적응해 가며 나는 성진을 잇고 있다는 것조차 잊게 되었다. 얼마 전 우연히 길에서 성진의 부모를 지나쳤는데 알아보지 못했다. 한참 후에 뒤를 돌아보았지만, 솔직히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누나, 오늘은 뭐 할 거야?”

복출이 놀아달라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음…”

나는 매 순간 변한다. 어떤 순간엔 성진이 되고, 또 다른 순간 수진이 되고, 또 가끔은 이도 저도 아닌 자가 된다. 나를 죽였던 자들이 내 삶과 완전히 무관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바꿔가고 있다. 의도하지 않았던 것까지 나의 선택으로 인정하며 그 선택 전부가 나라고 이해한다. 그렇게 내가 되기로 한다.

더 이상 성진의 삶에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성진을 잇지 않기로 결심했기에 나는 매드 박에게는 성공 사례일 테고 1% 영감들에게는 불순한 존재일 거다. 나는 성진이 아닌 수진으로 살길 선택했다. 착각과 다름없는 순수함을 믿음으로 구축한 세계, 자신의 이익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믿음도 만들어내는 세계, 이런 세계에 균열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그를 위해 반대의 믿음이 필요하다면 내가 근거가 되는 것도 좋았다. 세상엔 때때로 불신과 불순이 필요하다.

“오늘은 좀 안 해보던 걸 시도해 볼까 해.”

복출은 내게 환한 미소를 보이고는 자리를 떴다.

매드 박은 요즘 새로운 연구에 한창이다. 그의 새로운 연구는 수면 캡슐 연구다. 긴 시간 동면한 뒤 무한한 자산을 들고 먼 미래로 달아나겠다는 1%의 사람들에게 아예 ‘영원한 잠’을 선사하겠다는 계획이다. 저들의 믿음과 욕망에 끝끝내 균열을 내는 과학자라니 그는 진짜로 미친 게 분명하다.

한편 1% 사이에서 복출과 같은 이탈자가 나오면서 부작용도 생겼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기가 T 그룹 회장의 복제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휴양 섬 안팎에서 늘었다. 마음만으로 기억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늘어가는 것도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라 말할 수 있으려나?

이미 종말을 맞은 파국의 세상, 아득바득 살아가는 99%의 세계에서 나는 두 번째 생을 다시 시작한다. 이곳에도 생이 있다. 영원히 살지 못하기에 하루가 간절한 자들이 있고, 우연히 얻은 삶이 우연 이상임을 이해하는 자들이 있다. 가장 무력한 자들이 모인 곳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세계임을 알기에 추하고 비루할지언정 가장 자연스러운 삶을 기어코 찾아내는 이들도 있다.

조용히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더니 커다란 눈 결정체가 눈동자에 내려앉았다. 눈을 질끈 감은 사이에 눈은 금세 녹아 사라졌다. 어마어마한 그림자가 내 세계 위로 육중하게 내려앉았다 사라진 것을 보았다.

주변은 소음조차 얼어붙은 것 같았다. 손발이 차갑고 몸이 으스스했다. 그 말은 어쩌면 내 속이 아직 뜨겁다는 뜻일 것이다.

황모과
SF 작가
장편소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서브플롯』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그린 레터』, 중편소설 『클락워크 도깨비』『10초는 영원히』 『노바디 인 더 미러』 『언더 더 독』, 소설집 『밤의 얼굴들』 『스위트 솔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