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거기∨서 거기

  • 단편소설
  • 2025년 여름호 (통권 96호)
거기∨서 거기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을 지켜주는 주문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아브라카다브라나 하쿠나마타타 같은. 서보의 경우에는 거기서 거기, 였다. 일곱 살 때 나무 블록으로 애써 지어놓은 집을 주인집 딸 사랑이 무너트렸다고 일러바치자 아빠는 표정 하나 안 바뀐 채 “건축이나 철거나 다 거기서 거기다” 했다. 개미 한 마리 못 죽일 정도로 몸도 마음도 삐쩍 곯은 약골이 무허가 판자촌 주민들의 뼈마디를 삽으로 푹푹 내리찍으며 “죽기 싫으면 빨리 꺼져요, 꺼져!” 우악스레 소리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그 주문 덕분일지 몰랐다. 살면서 서보는 그렇게 남의 주거와 생존을 위협하는 식으로 밥벌이를 한 아빠가 죽을 만치 부끄러웠지만 거기서 거기, 거기서 거기, 거기서 거기… 중얼거리다 보면 원주민이든 이주민이든 수녀든 무법자든 애정이든 비정이든 세상만사가 정말 다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달랑 삽자루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선 아빠가 며칠이고 돌아오지 않을 때면 서보는 사랑과 소꿉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랑이 늘 주인 역할만 고집했기 때문에 서보는 자연스레 손님이 되었다. 그런데도 서보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었던 것처럼 “내가 손님 할게, 제갈이 너는 주인 해”라고 말했고, 그럼 사랑은 “얘, 성 말고 이름으로 불러줄래?” 점잖게 소리 높였다. 그렇게 사랑은 정육점 푸주한이 되었다가 금은방 주인이 되었다가 목욕탕 세신사가 되었다. 직업은 천차만별이었지만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사랑이 어서 오세요! 손님, 하고 대화의 물꼬를 트기가 무섭게 서보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 집은 오늘 문을 닫았네?”

그 후로도 둘의 역할놀이는 계속되었고, 시작되기가 무섭게 중단되었다. 그럴 거면 왜, 완전히 그만두지도, 그렇다고 끝까지 이어가지도 않을 거면서 왜 굳이 그랬던 걸까? 몇 년 뒤 곧 지구가 멸망하네 마네로 세상이 떠들썩했던 1999년 12월의 어느 겨울날, 고등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서보는 문득 과거의 자신에게 궁금해졌고, 궁금해졌기 때문에 조심스레 궁금해했고, 그러다 저도 모르게 입김처럼 뿌옇고 아스라한 질문을 읊조렸다.

그럴 거면 왜 그렇게….

서보는 문장을 끝맺지 않고 중간에 멈추었다. 문으로 치면 문이 채 다 열리기도 전에 닫아버렸다. 언제부터인가 서보에게는 먹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잠깐 어디 좀 갔다 온다고 해놓고 영영 돌아오지 않은 엄마가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 여기 가만히 있어, 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 호기심을 내보이며 다가왔던 몇몇 친구들이 같이 떡볶이를 먹자거나 당시 유행하던 아이돌 스티커를 노트에 붙여주겠다거나 시내에 귀를 뚫으러 가자고 할 때에도 서보는 먹은 셈 칠게, 가진 셈 칠게, 해본 셈 칠게, 하고 말했다. 먹으나 먹지 않으나 가지나 가지지 않으나 해보나 해보지 않으나 별다른 바가 없었다.

서보는 수능을 거기서 거기인 성적으로 치르고 거기서 거기인 대학의 거기서 거기인 사회복지과에 지원했다. 당시 신입생은 필수적으로 과 내 동아리에 가입해야 했는데, 서보가 고른 것은 영화패였다. 노래패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연극패는 극장에서 연극을 올려야 하지만, 영화패는 직접 영화를 찍지 않고 보기만 한다는 게 그나마 마음에 들었다. 영화의 주인이 되려 하지 않고 철저히 손님의 자리에 머무르려 한다는 것이,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그 모임을 다른 무엇도 아닌 그 모임으로 만들어주던 단 몇 글자짜리 이름이.

 

찬 기운이 남아 있던 3월이나 부쩍 무더워진 6월이나 서보는 언덕 위 기숙사에서부터 그 일대의 유일한 영화관이었던 이수역 씨네맥스까지 천천히 걸어가곤 했다. 그러나 서보는 물리적인 출발점이나 도착점과는 별개로 자신이 ( )로부터 ( )까지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무언가로 채워 넣을 수 있는 괄호가 아니라 텅 비워둘 수밖에 없는 괄호였다. 그래서 <플란다스의 개>와 <오! 수정>을 보러 갈 때까지만 해도 괜히 힘 빼지 말고 같이 지하철을 타자고 권하는 동급생이 몇 있었다면, “나는 그리로 가는 게 아니라서…” 하고 되지도 않는 말을 내뱉은 뒤로는 더 이상 아무도 서보에게 말을 붙이려 들지 않았다. 심지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단체 관람하기로 한 어느 날엔가는 모두가 서보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단 한 사람, 설항을 제외하고는 그랬다.

설항을 처음 만난 곳은 복층 구조의 중국집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패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가서는 층고가 낮아 매번 머리를 부딪치기 일쑤인 2층에서 술판을 벌였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솜이 죽은 방석처럼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진 그들은 소위 ‘좆망’에 가깝다는 사회복지학과의 내일 없음 혹은 그날 본 영화의 형편없음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러다 군대에서 막 전역해 복학을 앞두고 있던 3학년 선배가 영화끼리도 서로 결혼을 시키면 어떨까 이 말이야, 하고 갑작스레 화제를 틀었다. 박찬욱도 뭔가 아쉽고 홍상수도 어딘가 살짝 빠지는 데가 있으니 둘의 영화를 짝지어서 유전자가 딱 반씩 섞인 영화를 낳게 하면 좋겠다는 거였다. “둘 다 남자인데 징그럽게 무슨 짝짓기 타령이에요.” 누군가의 야유에 그는 냅다 짜장면에 짬뽕 국물을 부으며 “친구야, 영화에 여자 남자가 어디 있어, 성별이 없으니까 무성영화야 무성영화” 했다. 안 그래? 그의 물음에 서보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사가 가파르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목조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과 접한 벽면에 붙은 종이에는 ‘신발 분실 시 일절 책임 안 짐’이라는 문장이 새빨간 고딕체로 적혀 있었고, 어째서인지 그건 아직 살면서 한 번도 신발을 잃어버려본 적 없는 서보를 다소간 난처하게 만들었다.

계단 앞에 벗어둔 자기 신발이 보이지 않아서 한참을 끙끙댄 끝에야 서보는 계단 밑 공간에 처박힌 신발을 발견했다. 1층은 단체 회식 중인 직장인들로 발 디딜 틈 없었고, 서보는 신발을 빼내어 신다 말고 문득 그들이 먹고 마시고 떠드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손님 하나가 서보에게 여기 소주 한 병이요, 소리쳤다. 서보는 저 여기 알바 아닌데요? 하고 말하는 대신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랬더니 다른 테이블의 손님 하나가 여기 맥주 한 병이요, 소리쳤고, 서보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그 순간 화장실 문 앞에 서서 서보를 지켜보고 있던 설항이 “아저씨, 얘 알바 아니고 손님이거든요!” 쏘아붙이고는 서보의 손을 잡아채 가게 밖으로 이끌었다.

“야, 넌 대체 거기서 뭐 하고 있어?”

“그냥 있었지 뭐.”

“그니까 내 말은 왜 거기서 그러고 있냐고!”

서보는 여전히 설항에게 붙들려 있는 자기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나 어디 안 가니까 이것 좀 놓고 얘기하면 안 될까?”

그날부로 먹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던 서보에게는 먹어야 하는 것과 가져야 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이 생겼다. 서보가 딱히 생각이 없다며 한사코 거절해도 설항은 “그런 게 어디 있어!” 하고는 막무가내로 서보를 데리고 다녔다. 불가피한 집안 사정으로 또래보다 학업이 늦어졌을 뿐 사실 내가 너보다 두 살이나 나이가 많다는 고백에도 “그래? 그래도 그냥 지금처럼 불러도 되지?” 능청스레 굴었다. 설항이 지금 기숙사 앞이니까 나와, 하고 문자를 보내면 서보는 잠자코 신발을 꿰어 신고 밖으로 나섰고 두 사람은 가파른 언덕 위에 지어진 캠퍼스를 동그랗게 거닐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목격한 J 선배가 서보를 따로 불러내서는 “쟤는 사랑불량자니까 너무 가까이하지는 마라” 하든 말든 그랬다.

설항은 서보보다 키가 7센티미터나 작았는데도 걸음은 훨씬 빨랐다. 그래서인지 늘 어디론가 서둘러 향하는 느낌을 풍겼는데, 막상 동기들이 야 어디 가? 하면 설항은 나 아무 데도 안 가는데? 해맑게 되묻곤 했다. 기숙사생이라면 필수적으로 참여해야 했던 수요 예배를 제친 그날에도 설항은 서보보다 약간 앞서 걷다가 중간중간 멈춰 서서는 와, 저거 좀 봐, 하고 말했다. 숨이 차 헐떡거리는 서보를 앞에 두고 설항은 뒷산의 아까시나무를 가리켰고 일명 팅커벨이라 불리던 반딧불을 가리켰고 흙바닥을 뒹구는 흰 돌멩이를 가리켰다. 사실상 모두 보나 마나 한 것이었지만 서보는 걸음을 재촉해 설항과 나란해지고는 그것들을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한번은 이것 좀 봐봐, 하는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갔더니 설항이 손끝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지금 자기 얼굴이 너무 빨갛지 않냐고 물었다. 그때 그 순간 서보는 일전에 J 선배가 입에 담았던 ‘사랑불량자’라는 단어를 곱씹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게 뭐냐면, 신용불량자 비슷한 거야. 근데 불량한 게 신용이 아니라 사랑인 거야. 멀쩡한 사랑은 놔두고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불량한 사랑만 해대는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던 것도. 그리고 어느덧 설항의 옆에 우뚝 선 서보가 아무런 대답 없이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는 동안 설항은 달뜬 얼굴로 말했다.

“근데 웃긴다. 내 얼굴이 빨갛냐고 묻는데 왜 네 얼굴이 빨개져?”

그날 두 사람은 캠퍼스 주변을 정처 없이 걷다가 설항의 집으로, 정확히는 설항의 언니네 집으로 향했다. 설항은 무남 4녀 집안의 막내딸이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둘째 형부가 세상을 뜨면서 잠깐 사당동 둘째 언니네 집에 얹혀살고 있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바로 독립할 예정이라고. 이윽고 회색 벽돌로 지어진, 슬레이트 지붕 위에 타이어 서너 개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단층집 앞에 섰을 때, 설항은 오는 길에 사람들이 나눠주는 전단지를 모조리 건네받아 더 이상 손이 없다면서 “나 여기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 좀 꺼내줄래?” 하고 물었다. 서보는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한참을 머뭇대다가 느리지만 신중한 동작으로 열쇠를 꺼내 건넸고, 설항은 마치 본인이 집주인이라도 되는 양 “잠깐 들어와도 돼” 했다.

“나 말이야?”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살면서 서보는 한 번도 남의 집에 방문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거의 평생을 사랑이네의 창고 방에 세 들어 살았으므로 남의 집에만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몰랐다. 다른 무엇도 아닌 손님으로서. 서보가 머뭇대자 설항은 “걱정하지 마, 안에 아무도 없어. 언니가 역 근처에서 미용실을 하는데, 쉬는 날 빼고는 하루 종일 거기에 있거든” 하고 서보의 팔꿈치를 잡아끌었다. 그렇게 한 발 뒤로 물러났던 서보는 대문을 넘어섬과 동시에 실례하겠습니다, 속으로 말했다. 현관에는 손바닥 다섯 마디 정도쯤 되는 유아용 신발이 놓여 있었는데, 설항은 그 신발 옆에 자신의 발을 대보는 서보에게 “조카 거야” 했다. 그 말의 요지가 ‘조카 거지 네 거가 아니야’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서보는 왠지 모르게 난처해져서는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세면대 수도꼭지는 수전 방향이 반대라 손잡이를 냉수 쪽으로 돌리면 뜨거운 물이, 온수 쪽으로 돌리면 찬물이 나왔다. 그건 또 그것대로 난처한 일이었고, 문득 서보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붙은 감정은 수치심도 부끄러움도 아닌 난처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렵고 또 어려운 느낌. 얼굴이 아려올 때까지 찬물로 세수를 한 서보는 거울에 비친, 벌겋게 달아오른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 )로부터 ( )까지’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수도꼭지를 힘주어 잠갔다. 이제껏 한 번도 채워본 적 없는 괄호 안을 무언가로 채우고 싶어질까 봐 두려워하면서.

그날 서보는 설항의 방에서―사람이 머무는 방이라기보다는 옷방에 가까웠지만―영화를 보았다. 으레 보던 영화와 다른 게 있다면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여러 영화 속 장면들을 조각조각 이어 붙인 것이었다. 발자국으로 치면 한 사람만의 발자국이 아니라 어지럽게 뒤섞인 여러 사람의 여러 발자국이었다.

“너, 얘네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알아?”

설항의 물음에 서보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당연했다. 영화는 보는 둥 마는 둥 한 채 계속 설항만을 힐끔거렸으니까. 그러자 설항은 에이 잘 좀 봐봐, 했고 서보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설항은 손가락 끝으로 모니터 화면 귀퉁이를 가리켰다. 약 3200년 전 그리스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였는데 하늘에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면서 설항은 앳된 얼굴의 케이트 윈슬렛이 그 시대에 아직 출시되지도 않은 필터담배를 피우는 <타이타닉>의 한 장면과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총을 쏘기도 전에 T-1000의 머리가 박살 나고 있는 <터미네이터2>의 한 장면을 연달아 보여주었다. 설항은 서로 다른 시간이 충돌하고 어긋나고 비틀어지는 순간을, 그렇게 지금의 이야기가 지금의 이야기만이 아니게 되는 순간을 마주할 때 시간이 꼭 자신의 편이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더니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네모난 프레임을 만들고는 그 안에 서보의 모습을 담았다.

 

며칠 뒤 예의 그 2층짜리 중국집에서 약속 상대를 기다리는 동안 서보는 만에 하나 이 건물이 무너져버리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철근 뼈대만 덩그러니 남은 그 건물을 있다고 해야 하나 없다고 해야 하나 생각했고 그러든 말든 애초에 그게 자신의 소유는 아니라는 걸 생각했고 그 모든 있음과 없음의 끝에 다다라서는 결국 설항을 생각했다. 얼마나 깊이 생각했는지 자기 몸만 한 쇼핑백을 양손에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사랑이 어, 왔어? 하고 인사를 건넸을 때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였다. 중학교 졸업식 전날 야반도주하면서 잠적을 감췄던 사랑은 어디서 어떻게 번호를 구한 건지 몇 달 전부터 주기적으로 서보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해오곤 했다. 서보니? 사랑이 물으면 서보는 예전처럼 제갈이니? 하고 되묻는 대신 사랑이니? 했다. 여느 때 같았더라면 미안, 내가 요즘 좀 바빠서, 하고 어물쩍 넘겼을 테지만 어째서인지 설항의 집을 방문했던 그날 밤, 부러 먼 길을 돌아 기숙사로 가던 길에 사랑으로부터 또 한 번 만나자는 연락이 오자마자 서보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그래, 했다. 사랑에게는 묻고 싶은 게 딱 하나 있었는데, 그건 왜 자신에게는 한 번도 주인 역할을 시켜주지 않았는지도 왜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잠적해 버렸는지도 아니었다. 오히려 서보는 그때 그 말이 진짜였냐고 묻고 싶었다. 언젠가 티브이에 나오는 슬픈 영화를 보고도 무표정을 유지하던 서보가 사랑에게 “너는 왜 안 울어?” 하고 물었을 때 사랑은 물기라고는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는 서보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뭐래, 나도 너처럼 울고 있어” 했다. 서보는 그때 사랑이 왜 ‘너랑 다르게’가 아니라 ‘너처럼’이라는 단어를 쓴 건지 살면서 문득문득 궁금해지곤 했다.

그러나 정작 몇 년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이 긴 정적을 깨고 처음 나눈 이야기는 중국집 벽면에 그려진 용이 승천하는 건지 하강하는 것인지에 대한 여부였다. 위로 가든 아래로 가든 지금 용이 저기에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텐데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내 사랑은 영화 채널에서 갑자기 중간 광고가 나오듯 화제를 전환하며 “얘, 나는 지금 서울에 있어” 했다. 사랑의 아빠가 운영하던 주물 냄비 공장이 IMF 때 도산한 뒤로 외가 친척네에서 지내다 지금은 다시 서울에 올라와 있다고. 어떤 말을 주워섬겨야 할지 몰라 머뭇거릴 때쯤 짜장면이 나왔고, 사랑은 갑자기 “손님, 여긴 이렇게 먹어야 맛있어요” 하면서 서보의 짜장면에 고춧가루를 투하했다. 그러곤 검붉어진 면을 비비고 있는 서보에게 “근데 너 안 추워?”라고 물었다.

“아직 겨울 되려면 멀었는데?”

“그냥, 서보 네가 추위를 많이 탔잖아.”

“그랬나?”

“그랬지, 완전 그랬지. 너 우리 집에 살 때, 벽이 어찌나 얇으신지 너 잠꼬대하는 소리에 내가 시도 때도 없이 깼잖아. 네가 추워, 하면 내가 추워? 하고 대답했고. 그럼 네가 또 추워, 하고. 그래서 말인데…”

사랑은 옆에 있던 커다란 쇼핑백을 뒤적거리더니 ‘자석요의 10가지 효능’이라고 적힌 카탈로그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게 말로만 들어서는 체감이 안 되고 직접 몸으로 효능을 느껴봐야 한다고. 그때 사랑의 전화기가 울렸고 사랑은 네네 매니저님, 하면서 부리나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소리가 다 전해져오는데도 사랑은 서보가 듣지 못하기라도 하는 듯, 혹은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아래층에서 한참 동안 통화를 이어갔다. 대충 주워듣기로는 이번 달 실적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사랑이 도로 올라와 “우리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하고 말한 건 서보가 테이블 위에 흘린 물로 ‘설항’이라는 글자를 쓰고 있을 때였다. 서보는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말하는 대신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일단 가게를 나와 역까지 걷는데 사랑이 얘, 저기 좀 봐, 하며 허공을 가리켰다. 무지개였다. 사랑은 넋이 나가기라도 한 듯 한참을 고개를 쳐든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서보가 이제 그만 갈까? 하고 말하려는 순간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리라” 하고 중얼거렸다.

“뭐라고?”

“왜 우리 집이 그렇게 되고 나서부터 우리 아빠가 교회를 다녔잖아. 그날도 저녁 예배 갔다 온다고 해놓고서는 그렇게 된 거였어. 이상하게 그날따라 하루 종일 비가 억수같이 왔는데, 딱 아빠가 집을 나설 때만 날이 쨍하게 갰었거든. 배웅해 주려고 잠깐 밖으로 나서는데 아빠가 하늘에 떠 있던 쌍무지개를 보고 난데없이 그러는 거야.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리라, 하고. 성경에 있는 구절이라나.”

“그렇구나.”

“그날 이후로 나는 가끔 궁금해진다? 구름 속에 무지개가 있으면, 무지개 속에는 뭐가 있을까, 하고.”

서보는 거기다 대고 위로를 해야 할지 동조해야 할지 몰라서 잠자코 있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뭐라도 있지 않을까?” 하고 말했다. 그 말에 사랑은 기다렸다는 듯 “아니지, 그건 진짜 아니지, 무지개 속에는 아무것도 없지” 했다. 무지개라는 건 그저 빛이 굴절돼 생겨나는 현상일 뿐이라고, 일종의 허상에 불과하다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서보는 충동적으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상영 시간이 10분이나 지났는데 괜찮겠느냐고 매표소 직원이 말했고 서보는 괜찮다고 했다. 영화의 전체를 보나 일부를 보나 그게 그거였으니까. 졸거나 잠든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서보는 그날 본 영화의 제목이나 줄거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똑똑히 기억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신기해.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서보는 그들이 멈춰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란 결국 정지한 이미지 수십 장을 이어 붙인 환영에 불과할 뿐이라고. 무엇보다 서보는 사람들이 웃거나 우는 대목에서 언제나 무표정을 유지했다. 웃겨도 웃지 않음. 슬퍼도 울지 않음. 그건 아주 어릴 적부터, 이를테면 서보가 네 살이었고 테레사 수녀가 사당동 가마니촌을 방문한 해이기도 했던 1981년 봄 무렵, 테레사와 동행한 서양 양복쟁이의 신발을 실수로 밟았을 때 그가 질색하며 “know your place”라고 말했던 순간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몰랐다. 보통 그 나이대의 기억이란 금방 사라지는 게 일반적일 텐데 그편이 일반적인 데다가 좋기도 했을 텐데, 어째서인지 뜻조차 알지 못했던 그 문장만큼은 고장 난 전철처럼 머릿속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그 후로 서보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깊이 몰두했다. 집에 있건 교실에 있건 극장에 있건 집과 교실과 극장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 있건 자신이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했다. 나 여기 있어, 하고 암만 손을 흔들어봐야 아무도 들어설 수 없는 외딴 공간에 홀로 남겨져 있다고.

그런 서보에게 설항은 “너 거기 있어?” 하고 멀리서 자꾸만 손을 흔드는 존재였다.

서보가 한 발 물러나면 두 발 다가오는 존재였다. 훌륭하든 불량하든 어쨌거나 사랑의 분명한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존재였다. 문득 서보는 자신이 아까 사랑의 이름을 부를 때 사랑아, 하지 않고 설항아, 해버렸다는 걸 기억했다. 그해 여름, 7호선 남성역이 개통되면서 정작 학교 이름이 들어간 총신대입구역보다 남성역이 캠퍼스와 훨씬 더 가까웠던 것처럼 서보는 사랑보다 설항이 더 사랑과 가깝게 느껴졌다.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

 

행복해질 것이다가 아니라 행복하다.

어릴 적 서보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본 아빠는 서보를 앞에 앉혀두고 말하곤 했다.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을 사용하라고. 행복해질 것이다가 아니라 행복하다, 라고 말해보라고. 그렇게 ‘나는 행복하다’라는 문장을 백 번이나 외워야 했던 서보는 살면서 종종 아빠에 대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아빠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은 서보 자신일 때도 있었고 집 나간 엄마일 때도 있었고 늙고 병든 할머니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빠가 삽자루를 휘두르며 당장 집을 비우라고 소리치던 판자촌 불법 거주자들이었다. 누군가 하루빨리 집을 비울게요, 하면 아빠는 양옆으로 느릿느릿 고개를 저으면서 하루 빨리 집을 비운다, 라고 다시 말해보라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아빠와는 절대 같은 길을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어느 날 서보는 문득 자신이 아빠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따라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설항을 떠날 것이다, 가 아니라 떠난다, 라는 문장을 적었기 때문이었다.

전봇대 불량 공중선을 정비하다 사다리에서 추락한 아빠가 오늘내일하니 속히 내려오라는 할머니의 연락을 받고 나서부터 서보는 설항을 보지 않았다. 만나러 가지도 않았고 밤늦은 시간 설항이 자신을 만나러 왔을 때도 거기에 없는 척했다. 설항이 일전에 무성영화 운운했던 선배와 영화관 앞에서 손을 잡고 걷는 걸 봤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에도 스프링이 푹 꺼진 기숙사 침대 위에 멍하니 누워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엔가는 천장의 타공 무늬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양손의 검지와 엄지로 네모난 프레임을 만들고는 그 안에 여러 풍경을 담아보았다. 분주히 움직이는 창밖의 사람들.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건물들. 멈춰 있는 것 같아도 가만 들여다보면 빗방울을 몰고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 구름과 구름과 구름….

비가 오는 둥 마는 둥 하다가도 머리 위의 연보랏빛 먹구름에서 출발한 비가 정수리에 툭, 하고 내려앉던 어느 날, 서보는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이 있는 사당3동에 비가 오는 동안 설항이 있는 사당1동에도 비가 올까. 비가 오는 곳과 오지 않는 곳의 경계에 서면 나는 비를 맞고 있는 건가, 맞고 있지 않은 건가. 그날 오후 서보는 설항에게 지금 어디냐는 문자를 보냈고, 설항은 자신이 있는 곳을 말하는 대신 ‘거기’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렇게 약속 장소인 2층짜리 중국집에서 나란히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다. 설항이 너 그거 알아? 나는 술국이 술을 넣고 끓인 국인 줄 알았잖아, 하면 서보가 소리 없이 웃었고 그럼 또다시 정적이 내려앉을 뿐이었다.

“몰랐는데 서보 너는 갑자기 없어지는 데 뭐 있다.”

“그러는 설항이 너는 나 없이도 잘 사는 데 뭐 있다.”

“내가? 너는 사람 오해하는 데 뭐 있다.”

“그러는 너는……”

“나는 뭐?”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두 사람은 동시에 웃어 보였다. 한 프레임 안에 담겨 있는 두 사람이었고, 서보는 아마 대학을 휴학하고 아빠의 병구완을 하게 될 것 같다고, 그곳이 지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인 것 같다고 말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왔다. 서보가 앞섰고 설항이 뒤따랐다. 2층에서 1층으로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 계단이 한 칸 더 있는 줄 착각한 서보가 허방을 밟으며 중심을 잃었고, 설항은 “하여간 너는 조심성 없는 데 뭐 있다니까” 하면서 그런 서보를 붙들었다. 그물그물한 날씨 때문인지 가게 안에 손님이라고는 두 사람뿐이었는데 내려와서 보니 서보의 신발 한 짝이 사라져 있었다. 신발은 없어도 ‘신발 분실 시 일절 책임 안 짐’이라는 문구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고, 서보는 그 말에 아무런 법적 효력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찮아, 그냥 한 짝만 신고 가면 돼” 했다.

“진짜 그러려고?”

“그럼 가짜 그러게?”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 비는 어느새 그쳤고 하늘 저편에는 희미한 빛깔의 무지개가 떠 있었다. 그 순간 서보는 “있지 설항아, 무지개 안에는 뭐가 있을까?” 하고 말했다.

“거기 있어야 할 게 있겠지.”

“그니까 그게 뭔데?”

“네가 있기를 바라는 게 있겠지.”

“내가 있기를 바라는 건 뭔데?”

“그건 아마…"

그러더니 설항은 이대로는 진짜 안 되겠다며, 자기가 어디서든 어떻게든 신발을 구해올 테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서보는 다른 어디도 아닌 거기에서 설항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한 발은 운동화, 다른 한 발은 맨발 차림으로 오래도록 걸었다. 그리고 기숙사에서 짐을 챙겨 나와 광역버스에 올라타고는 서산 버스터미널에 내려 배차 간격이 180분이나 되는 마을버스로 갈아탄 뒤 집까지 사십 분을 내리 걸었다. 아까 짝이 맞는 멀쩡한 신발로, 것도 높이가 발목 위까지 오는 어그 부츠로 갈아 신었음에도 맨발로 얼음 위를 걷는 것마냥 발이 시렸다. 문득 서보는 설항과 함께 보았던 이름 모를 영화에서 “네가 사랑을 알아? 해봤냐고, 사랑이란 걸” 하고 말한 배우를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랑을 해봤어, 하고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랑에 가봤어, 하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서보는 그게 자신을 지켜주는 주문이라도 되는 양 설항, 설항, 설항, 하고 계속 중얼거려보았다. 그렇게 하면 그 멀고도 아득한 이름을 두 발로 디뎌볼 수 있다는 듯이.

“아빠, 많이 안 좋아?”

그날 자정이 넘어서야 고향집에 도착한 서보는 문을 등진 채 모로 누운 아빠에게 물었다. 잠들었는지 자는 척을 하는 건지 아빠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그럼에도 서보

는 물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빠 어디 불편한 데 없어? 아빠 내가 다리 주물러줄까? 아빠 많이 아파? 아빠, 지금 불행해, 행복해? 행복하면 언제부터 언제까지 행복해? 아빠, 자?
진짜 자? 아빠, 아빠는 지금 어디 있어…?

 

*

 

나 여기에 있어.

설항의 조카 지아를 만나기로 한 2014년의 어느 겨울날 아침, 서보는 잠에서 깸과 동시에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 여기에 있어. 그때 거기의 스물두 살 서보와 삼십대 중반이 훌쩍 넘은 지금 여기의 서보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서보는 여전히 무성영화보다는 유성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계단을 내려올 때 마지막 칸에서 자꾸만 허방을 짚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주문한 지 삼십 분 만에 나온 우동이 도저히 못 먹어줄 정도일 때도 맛이 이게 뭐냐고 소리치는 대신 “중국집 우동이 다 거기서 거기지, 그치?” 해버리는 사람이었다. 괜찮음과 안 괜찮음도 사실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그러나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예컨대 스물두 살이었던 서보가 설항의 집에서 발을 대보았던 그 유아용 신발과, 약속 시간보다 10초 늦게 도착한 지아가 아무렇게나 뒤집어 벗어둔 225밀리미터짜리 운동화는 주인만 같지 결코 거기서 거기가 아니었다.

“이모,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다른 맛있는 집 다 놔두고 왜 맨날 여기로 와요?

여긴 2층이라 올라오기도 번거롭고, 인테리어도 촌스럽고, 뭣보다 전 허리 아파서 좌식 싫어해요.”

“그래? 그럼 다음엔 다른 데서 보면 되지.”

“저번에도 그러고서는 또 이리로 데려와 놓고서는.”

“다음번엔 진짜야. 근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

서보가 물었고, 지아는 스마트폰 화면 이곳저곳을 터치하며 동물 모양 블록이 나란해지도록 만들다가 “재밌어서 하는 건 아니고, 하도 재미난 일이 없으니까 그냥 하는 거예요. 그럼 사는 게 좀 재미있어질까 봐서” 했다.

“지아 너는 네 이모랑 똑같은 얘기를 한다?”

“제가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다고.”

“누가 있긴요, 이모가 있죠. 그건 그렇고 이모, 시간 있으심 저 하트 좀 주실래요?”

서보는 난 네 이모 아니라니까, 하고 퉁명스레 대꾸하면서도 앱을 켜 친구 목록에 있는 지아에게 하트를 보내주었다.

“근데 이건 대체 언제까지 보내줘야 하는 거야?”

“오늘까지요.”

“응?”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왜냐하면 딱 오늘까지만 하고 이거 삭제할 거거든요.”

“그럼 그건 다 어디로 가?”

서보는 이럴 땐 왜 하필 오늘까지만이냐고 먼저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생각하면서도 “어디로 갈까, 그건” 하고 재차 중얼거렸다.

“뭐가 어디로 가요?”

“하트가.”

“하트요? 그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아마,”

그 순간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중국집 사장이 빠각빠각 소리를 내며 부리나케 계단을 올라와서는 “손님, 죄송한데 잠깐만 가게 좀 맡아주시겠어요?” 하고 지아의 말을 끊었다. 서보는 “죄송한데 저희도 이제 곧 가봐야 해서요” 하고 말했다가 지아가 “이모도 참, 어차피 지금 나가나 조금 더 있다 나가나…” 하고 눈치를 주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알겠다고 했다.

“아, 생각났다!”

“하트가 어디로 가는지?”

서보가 질문을 던진 그 순간, 손님이 왔는지 아래층에서 도어벨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전해져왔고 이내 “사장님 여기 울면 하나요!” 하는 커다란 외침이 귀를 때렸다. 아무리 잠깐 가게를 맡아주기로 했다지만 서보는 손님일 뿐이었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서보와 달리 지아는 본인이 주인이라도 되는 양 세상 떠나가라 소리쳤다.

“네! 여기 울면 하나요!”

 

*

 

시름시름 앓던 아빠가 딱 1년 만에 세상을 뜬 뒤 서보는 학교에 복학하는 대신 서울로 올라와 일을 시작했다. 작은 영화 배급사의 경리직이었는데, 처음에는 온통 숫자로 이루어진 엑셀 파일 속 세계에서 발을 헛디디고 넘어지기 일쑤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기부금 계산서니 채권 관리니 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그렇게 7년이나 회사에 몸담은 결과로 남은 건 퇴근길에 지하철 환승 통로를 잠깐 걸었을 뿐임에도 숨이 찰 정도로 무거워진 몸뚱이뿐이었다. 그러나 몸과는 정반대로 마음은 붕 떠 있는 상태였고, 그런 서보를 세상의 중력 속으로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딱 한 사람, 사랑만이 주기적으로 만나자는 문자를 보내오기는 했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사랑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줄기세포 화장품과 홍삼 추출물이 들어간 건강 주스와 여성청결제의 드라마틱한 효능에 관해 이야기했고, 그럼 서보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사랑이 말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래 나도 하나 줘, 했다. 그러나 아빠의 기일 날, 서산에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전화기 너머로 충격 완화에 특화된 운동화에 대한 설명을 듣던 서보는 중간에 말을 끊고 알겠으니까 나도 하나 줘, 체념하듯 말했다. 그러자 전화가 끊겼는지 착각할 정도로 한참을 침묵하던 사랑이 “너, 내가 옛날에 네가 만든 집 부쉈던 거 기억해?” 하고 물었다.

“흰색 블록으로만 지은 새하얀 이층집이었잖아. 한번은 맨발로 그걸 깨부수다가 발톱이 부러졌는데, 내가 엉엉 우니까 너희 아빠가 맨발 차림인 너를 대문 밖으로 내쫓았어. 나는 네가 잘못했다고, 다신 안 그럴 테니 들여보내달라고, 아니 신발이라도 좀 던져 달라고 애걸복걸할 줄 알았거든? 근데 서보 너는 죽어도 안 그러더라. 얼음장 위에서 몸을 벌벌 떨면서도 애초에 발이란 게 없는 애처럼 거기 꼼짝없이 서 있더라. 그때부터였어. 원래도 네가 싫었는데, 네가 죽을 만치 싫어진 게.”

나도 그래.

서보는 나도 그렇다고, 나도 원래 내가 싫었는데 이제는 죽을 만치 싫어졌다고 말하는 대신 묵묵히 전화를 끊었다. 그 사실은 앞으로 서보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의미했다. 유일한 핏줄인 할머니는 일 년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였고 그나마 일주일에 45시간 이상을 강제로 함께 보내는 회사 사람들은 서보를 이름이 아닌 미쓰 배, 하고 불렀으니까.

“서보야. 서보 맞지?"

그러던 어느 날, 사당역 환승 통로에서 누군가 자신을 불러 세우는 소리에 서보는 멈춰 섰다. 문으로 치면 완전히 닫히기 일보 직전이던 문을 누군가 다시 활짝 열어젖혔다.

그날의 재회 이후 서보와 설항은 매일 똑같은 시간에 사당역 안의 작은 분식집에서 만났다. 우연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따로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오늘도 거기 있으려나,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마침 상대방 또한 그랬을 뿐이었다. 며칠 동안 두 사람은 역 내의 프랜차이즈 분식집에 들어가 간단히 끼니를 때운 뒤 헤어졌다. 한 번쯤은 그때 왜 그렇게 사라졌던 거냐고 따져 물을 줄 알았는데 설항은 아무런 말도 없었고,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둘러싼 작은 침묵 속에서 느릿느릿 우동을 먹었다. 하루는 헤어지고 난 뒤 곧장 뒤를 돌아봤다가 눈이 마주쳐서는 또 한 번 작별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날부로 두 사람은 우동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과거의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대부분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곳에 살고, 어떤 영화를 보고 싶은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 보면 어느새 울면 국물은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고, 서보가 어차피 식을 건데 뭐 하러 그래, 하고 한사코 만류해도 설항은 굳이 “사장님! 여기 국물 좀 데워주세요!” 하고 소리쳤다.

“서보야, 내 조카가 학교에서 달리기를 하거든? 맨날 똑같은 길만 달리는데 지겹지 않아? 하고 물으니까 걔가 뭐라고 그러는 줄 알아?”

다시 따뜻해진 우동 국물에서 올라오는 훈기를 쬐며 설항이 물었다.

“뭐라 그러는데?”

“이모, 길을 아는 거랑 그 길을 가보는 건 다르잖아.”

그길로 두 사람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공짜 표가 생겼는데 같이 보러 가겠느냐고 설항이 물었고 서보는 이미 본 영화였는데도 좋아, 했다. 처음 봤을 때는 지루하고 형편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로 봤을 때는 더더욱 형편없고 지루한 영화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형편없음과 지루함의 틈 속에서도 중간중간 웃거나 울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엔딩 크레딧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하나둘 상영관 밖으로 나서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서보가 기억하는 설항은 크레딧이 끝까지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제 다 끝났구나, 하고 모두가 자리를 뜨는데 아직 남아 있는 끝이 더 있다는 듯 제자리에 붙박여 있는 사람.

역으로 가는 길은 교통을 통제 중이었다. 멀리서 카메라와 붐마이크와 반사판을 든 사람들이 한데 뭉쳐 웅성거리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이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 하고 내뱉은 뒤에도 두 사람은 곧장 헤어지지 못한 채 계속 걸어야 했다. 여전히 설항은 걸음이 빨랐고, 서보는 그런 설항과 나란해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멀리서 엔지! 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짐과 동시에 설항은 “너 그거 알아? 우리 같이 활동한 영화패 이름이 뭐였는지” 하고 말했다. 서보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잠깐 손 좀 줘볼래?” 하고 말했다. 그러곤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는 붐마이크에 자신의 목소리가 섞여 들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말없이 설향의 손바닥에 자신이 어릴 적부터 수없이 되뇌었던 주문을 써넣었다. 검지로 획을 그을 때마다 간지럽다며 조용히 웃어 보이던 설항은 거의 다 왔는데, 진짜 거의 다 왔는데, 하다가 가방에서 빨간색 펜을 꺼내 들고는 제 손안의 보이지 않는 글씨 중간에 ∨ 표시를 덧붙였다.

“봐봐, 거기서 거기인 영화만 골라 봐서 거기서 거기인 줄 알았는데, 너무 좋아서 지나가는 개도 멈춰 설 정도인 영화를 보자는 의미에서 거기 서 거기였대. 진짜 웃기지?”

“….”

“안 웃겨? 안 웃긴 김에 고백하는데, 그때 중국집에서 없어진 그 신발, 내가 숨겨둔 거다? 그렇게 하면 그때 거기서, 너랑 좀 더 같이 있을 수 있을 줄 알고.”

에이 거짓말, 하고 웃어넘기긴 했지만 서보는 그것이 진짜든 가짜든 계속 설항과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비록 오래전 사랑불량자로 불렸던 설항이 지금은 진짜 신용불량자 처지가 되어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다는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왕 카스텔라 가게를 창업했다가 동업자가 투자금을 갖고 튀는 바람에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어려워 불법 다운로드 사이트를 이용한다는 걸, 가끔 감당할 수 없는 우울함이 몰려올 때면 정신과 약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랬다. 이따 퇴근하고 잠깐 들를래? 설항이 문자를 보내면 서보는 일을 마친 뒤 아현동 달동네 꼭대기에 있는 설항의 집에 들러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주로 나란히 앉아 영화를 봤고 가끔은 마주 앉아 영화 대신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고 때로는 등을 맞댄 채 누워 각자의 앞에 놓인 어둠을 응시하다 잠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서보가 자신이 웃겨도 웃지 않고 슬퍼도 울지 않는 사람에서 뒤늦게 웃거나 우는 사람이 되었다고, 웃기고 슬픈 순간에 곧장 웃거나 울진 않아도 영화가 끝나고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가장 마지막으로 웃거나 우는 사람이 되었다고, 그건 전적으로 자기 옆에 있는 누군가 덕분이라고 생각한 어느 날엔가 설항은 인제 그만 들러도 돼, 하고 말했다. 잠깐 들렀다 가는 게 아니라 아예 계속 함께 있으면 어떻겠느냐고.

이삿날, 라면 박스 두 개로도 충분할 만큼 단출한 살림살이를 옮기던 서보는 문득 설항과 재회한 2011년의 어느 밤, 저 멀리 검은 점으로 보이던 감독이 자꾸만 엔지! 하고 커다랗게 소리쳤던 걸 떠올렸다. 그리고 어쩌면 설항과 함께하는 미래가 딱히 쓸 만한 장면이 아닐 수도, 마음 같아서는 그냥 넘어가려 해도 입에서는 엔지! 소리가 절로 날 만큼 터무니없는 장면들의 연속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집은 너무 좁고 출근길은 원래보다 두 배는 더 걸리는 데다 무엇보다 누군가와 함께 사는 삶 자체가 이제는 너무나 낯설었으니까. 그러나 설항의 제안에 거리낌 없이 그러자 그럼, 하고 대답할 수 있었던 건 설항이 없는 곳에 사랑 또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잠깐 들렀다 가는 사랑이 아니라 그 자체가 최종 목적지인 사랑이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두 발로 직접 사랑에 다다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랑까지 무사히 도착한다 해도 이따금 서보는 자신이 사랑 바깥을 전전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쯤, 주말 이른 아침이면 미용실을 한다는 설항의 언니가 반찬을 챙겨 준답시고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설항은 서보에게 잠깐 나가 있으라고 했다.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현관에 실내 방향으로 놓여 있던 서보의 운동화를 은근슬쩍 실외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그럼 서보는 언젠가 설항이 “신발 사주면 도망간다던데, 너는 도망가더라도 나랑 같이 가야 된다!”라고 말하며 선물해 주었던 아식스 운동화를 신는 대신 맨발에 삼선 슬리퍼를 대충 구겨 신고서 동네의 낯선 골목을 오래도록 배회하곤 했다.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설항은 꼭 ‘어디야?’ 하고 문자를 보냈다. 그럼 서보는 ‘나 어디게?’ 하고 답장했고 설항은 ‘설마 내 안에 너 있니?’ 하고 철 지난 유행어를 구사했다. 그런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런 순간 안에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서보는 상대방을 향한 서운함이나 원망이 자신에게로 숨 가쁘게 달려오는 걸 모른 척할 수 있었다.

때때로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날도 있었다. “문화가 있는 날에 우리 같이 영화 보러 갈래?” 하고 설항이 말했을 때 서보는 자신이 아직 보지 않은 영화임에도 그거 이미 봤어, 하고 말했다. 며칠 전 팀장이 채권 추심 문제의 책임을 자신에게 덤터기 씌우려 한다며 설항에게 푸념을 늘어놓는데, 설항이 그 사람도 분명 잘못이 있긴 하지만 내가 보기엔 서보 네 잘못도 아주 조금은 있어, 하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너도 가끔 네 위치를 돌아볼 생각이 있다는 거지.”

“그건 그렇고 그 영화는 누구랑 봤어?”

“혼자 봤어.”

“혼자?”

“응, 혼자.”

“좋았어?”

“좋았지.”

“뭐가 그렇게 좋았어?”

“그냥, 안 좋았던 거 빼고 다 좋았어.”

“근데 나 좀 보고 얘기하면 안 돼?”

서보는 설항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진짜 좋았다니까? 했다. 그 말이 ‘너랑 다르게 진짜 좋았다니까?’가 아니었음에도 두 사람 사이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있지, 설항아.”

문득 서보는 궁금했다. 빠른 걸음을 빼면 설항이 설항이 아니게 되고 발에 땀이 많은 체질을 빼면 설항이 설항이 아니게 되듯이, 설항에게서 자신을 빼면 설항은 여전히 설항일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될지.

“…아무것도 아니야.”

 

2011년의 여름에는 비가 많이 왔다. 얼마나 많이 왔냐면 달동네 꼭대기에 있는 집이 침수될 정도였다. 그날 비가 내리치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분명 신발장에 넣어뒀던 아식스 운동화가 발목 높이까지 차오른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진짜 코미디 같지 않아? 이렇게 높은 곳에 사는데도 집이 물에 잠길 수 있다는 게.”

설항이 말했고, 서보는 가만히 서서 플라스틱 양동이로 물을 퍼내기만 할 뿐인데도 설항과 나란해지기 위해서 걸음을 재촉했을 때 숨이 가빠졌던 것처럼 숨이 찼다. 설항은 그런 서보에게 괜찮아? 하고 묻는 대신 오래전 어느 날처럼 엄지와 검지로 프레임을 만들고는 “있지, 영화를 찍고 있다고 생각해 보면 덜 힘들지 않을까?” 하고 말했다.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이 의미 없이 흘러가는 장면이 아니라, 어딘가 쓸모 있는 영화 속 장면이라고 생각해 보라고. 그건 눈앞에 닥친 어려움을 함께 통과해 보자는 설항만의 응원과 격려였을 테지만, 당장 서보는 그런 설항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원래 같았으면 설항이 없는 곳에 사랑은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전국 어느 곳을 가든 롯데리아나 메가박스가 있는 것처럼 설항이 없는 곳에도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예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그렇게 속 편한 얘기나 하고 있으니까 네가 아직까지 여기에 이렇게 있는 거야. 서보는 속으로 말했고, 왠지 모르게 자신이 러닝타임이란 게 없는 길고도 지루한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중간에 상영을 멈출 수도 없고, 잠깐 숨을 돌리고 오고 싶어도 강제로 꼼짝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 기분이었다. 서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설항은 그제야 미안, 그냥 농담이었어, 했다. 그 무렵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그렇게 됐어, 였다. 미안함도 분노도 부끄러움도 모두 그 한마디로 간명하게 정리되었다. 그냥 그렇게 됐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어…. 그러니까 물에 둥둥 떠 있던 신발이 열린 문밖으로 떠밀려간 것도 어느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된 일일 뿐이었다. 서보는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신발을 쥐려고 무리해서 철벙철벙 걸음을 옮기는 설항에게 “됐으니까 그냥 두라니까!” 소리쳤다.

두 사람은 쫄딱 젖은 신발 차림으로 역 앞의 24시간 콩나물국밥집까지 걸어가 끼니를 때웠다. 그런 뒤 여전히 조금도 마르지 않은 신발을 꺾어 신고 집을 향해 걸었다. 아직 비가 오고 있는데도 역 앞 출구에서는 우산을 쓴 사람들이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고, 서보는 도무지 그것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한번 받아주면 밑도 끝도 없이 그래야 한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설항은 됐어요, 하고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는 서보와 달리 굳이 먼저 손을 내밀고는 주세요, 하는 사람이었다. 건네받은 종이를 대충 구겨 버리는 대신 손안에 꼭 쥔 채로 집까지 가져오는 사람이었다. 여기 이런 가게가 새로 생겼으니 다음에 꼭 같이 가보자, 하고는 막상 한 번도 그곳에 데려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있지 설항아,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영화들이 참 많겠지?”

서보는 어느새 손안에 전단지를 한 뭉텅이나 들고 있는 설항에게 말했다.

“전 세계로 치면 한 해에만 해도 수만 편이 개봉할 거고.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 본 영화보다 안 본 영화가 훨씬 많을 거야. 물론 그중에는 내가 지금까지 이런 영화를 모르고 살았다니, 완전 인생 영화잖아, 싶을 정도로 좋은 영화도 있을 테고. 그런데 나는 아무리 인생 영화라 할지라도 그걸 굳이 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

살면서 내가 평생 보고 느끼지 못할 좋음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한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그렇게 말해놓고 서보는 생각했다. 여기란 게 대체 어딜까. 서보에게 ‘여기’란, 더 이상 나란해질 필요도 느끼지 못한 채 각자 나아가는 두 발자국 간의 격차였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기도 전에 서보가 나 먼저 나가 있을게, 하고 일어선 시간과 설항이 홀로 상영관 밖으로 나선 시간 간의 시차였다.

그날 밤 홀로 집을 나선 서보는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묻어둔 문장을 떠올렸다. 나 지금 어디에 있지?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지? 분명한 건 서보가 어디에 있든 어딜 걷고 있든지 간에 설항과 함께 있지는 않다는 거였다. 서보는 멈춰 섰고, 그와 동시에 서보를 둘러싼 풍경도 멈춰 섰고, 그런 서보에게 단숨에 달려온 건 설항이 아니라 설항의 부재였다. 그때부터였다. 서보가 사랑이 아니라 사랑 없음과 나란해진 건.

 

시간이 흘러 설항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집에서 연탄불을 피운 자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사당동 언니네 집으로 다시 들어가 마음을 다잡고 미용 보조 일을 시작했다던 설항이 지하철 선로에 뛰어든 취객을 구하려다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서보는 길을 잃더라도 사랑 밖이 아닌 사랑 안에서 잃고 싶다고 생각했던 어느 환한 밤을 떠올렸다. 그날 밤으로부터 지금에 다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자신을 방문했는지도.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슬픔이 찾아드는 순간마다 서보가 슬픔에 빠져 눈물을 흘린 건 아니었다. 서보는 몰아 쓴 일기처럼 슬픔을 끝의 끝의 끝까지 미뤄두었다. 마음이라는 문 앞에 도착하기 일보 직전인 슬픔을 제자리에 그대로 멈춰 세웠다. 지금 마주해야 할 슬픔의 몫까지 나중에 한꺼번에 다 슬퍼하리라,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무성영화 속 한 장면처럼 너무 시끄러운 침묵만이 맴도는 조문실에서 한 발짝 두 발짝 걸어 나오며 서보는 오래전 2층짜리 중국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신발 한 짝이 없어졌기를 바랐다. 그래서 거기 조금 더 오래 머무를 수 있기를, 그럴 자격이 잠시나마 자신에게 주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250밀리미터짜리 아식스 운동화는 다른 어디도 아닌 거기에 분명히 자리하고 있었다.

 

*

 

두 사람은 헤어지고, 두 사람은 재회한다.

2011년 사당역 환승 통로에서 설항을 다시 만났을 때, 설항이 뒤에서 서보를 불러 세우고 그렇게 11년 만에 두 사람이 한 프레임 안에 담겼을 때, 서보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은 헤어지고, 두 사람은 재회한다. 물론 그때 서보는 머지않아 두 사람이 다시 헤어질 것이고, 그 헤어짐 이후 설항이 세상을 떠날 것이고, 그렇게 서보가 그 문장을 또 한 번 이렇게 정정해야 하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재회하고, 두 사람은 영영 헤어진다.

그리고 그 뼈아픈 사실을 견딜 방법 하나는 언제나처럼 거기서 거기, 거기서 거기, 거기서 거기, 하고 주문을 외는 것이었다. 그건 사이즈가 작은 신발을 길들이듯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길들이는, 나아가 슬픔이 무사히 제 갈 길을 갈 수 있도록 안녕을 빌어주는 서보만의 비법이었다.

“조심히 가세요.”

설항의 발인 날, 서보를 마지막으로 배웅해 준 건 기껏해야 중학생 나이 정도 됐을 법한 여자애였다. 뒤통수가 유독 동글납작했던 그 애는 서보의 운동화에 제 발을 넣어다 뺐다 하다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이번에도 제가 데워놨으니까 가는 길에 발이 시리지는 않을 거예요” 했다. 서보는 난생처음 보는 꼬마애가 ‘이번에도’라는 단어를 쓸 자격이 있나 싶어 아리송해하면서도 작고 희미한 온기가 남아 있는 신발에 발을 꿰고는 평소보다 천천한 걸음으로 한 발짝 두 발짝 걸었다. ‘( )로부터 ( )까지’라는 문장 속 괄호를 여전히 텅 비워둔 채로. 세상은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결국 늘 어딘가에 도착해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서.

‘신발 분실 시 일절 책임 안 짐’이라는 문구로 서보를 난처하게 했던 사당역 앞의 2층짜리 중국집이 빈티지 옷 가게가 되었다가 통신사 대리점이 되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양 다시 중국집이 되었듯이, 의도치 않게 잠깐 주인 행세를 했던 서보 역시 진짜 주인이 돌아옴으로써 도로 손님이 되었다. 울면이 도통 나올 생각을 않는데도 30분이나 불평불만 없이 기다렸던 손님은 “죄송해서 어쩌죠? 제 조카가 장난을 쳐서요” 하는 서보의 사과에 뭐 그럴 수도 있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기도 그렇게 주인 행세를 해봐야겠다고.

중국집을 기점으로 서보는 위쪽으로, 지아는 아래쪽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지아는 곧장 아랫길을 따라 걷는 대신 “저는 아직도 배웅이랑 마중이 너무 헷갈린 거 있죠?” 하고 말하면서 서보를 역까지 바래다주었다. 사당역 4번 출구 앞에서 서보는 지아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 봐도 될까? 하고 물었다. 지아는 배웅이 아니라 마중 나온 사람처럼 환하고 반가운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고 서보는 그런 지아의 뒤통수를 오래도록 동그랗게 쓰다듬었다.

“이모, 저희 엄마가 미용실에 손님 오면 뭐라고 묻는지 알아요?”

“글쎄, 뭐라고 하려나.”

“언니, 어떻게 해줄까? 해요. 저는 아직 너무 어리고 돈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고, 그러니까 이모를 어떻게 해줄 수는 없는데요. 그래도 이모가 정 원하면 가끔 하트 정도는 보내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언제 어디서든 잘 지내세요. 트리트먼트도 꼬박꼬박하고, 머리에도 몸에도 마음에도 영양을 만땅으로 주시고요.”

한사코 먼저 가라고 해도 지아는 이모 가는 거 보고 갈게요! 고집을 피웠다. 마지못해 먼저 등 돌린 서보가 지하로 이어진 계단의 마지막 칸을 딛고 시야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 지아는 양손의 검지와 엄지로 네모난 모양을 만들고는 “이모, 제 마음속에 저장, 할게요! 그리고 신발 끈 풀렸어요!” 소리쳤다.

이번 차를 놓치면 다음 배차까지 한참 기다려야 했으므로 서보는 마음속에 대체 뭘 저장하겠다는 건지 묻거나 잠시 주저앉아 신발 끈을 고쳐 매는 대신 승강장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렇게 간발의 차로 지하철에 올라타자마자 옷소매로 얼굴을 훔쳤다. 슬픈 상황이 전혀 아닌데도 땀과 섞여 흐르는 눈물 때문에.

나 지금 어디에 있지?

인파 속에서 한바탕 울고 난 뒤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서보는 자신이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서보는 숨 가쁘게 내선순환 중인 열차에서 내려 다시 반대쪽으로 외선순환하는 전철을 타는 대신 ‘조심히가너도’ 하고 띄어쓰기도 되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 수신인을 잘못 입력하는 바람에 대충 묶은 신발 끈같이 엉성한 그 안부가 도로 반송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이미 너무 많은 정거장을 지나온 뒤였다. 이윽고 앞차와의 간격 조절을 위해 지하철이 잠시 정차했을 때 서보는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자신의 마음속에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의 이름을 배웅하듯 천천히 헤아려보았다.

이선진
소설가
소설집 『밤의 반만이라도』, 단편소설 『빛처럼 비지처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