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대담
두 언어 사이, 그 새의 기억과 기록

- 김혜순·다와다 요코 대담

  • 특별대담
  • 2025년 여름호 (통권 96호)
두 언어 사이, 그 새의 기억과 기록

- 김혜순·다와다 요코 대담

편집자 주 | 대산문화재단은 다와다 요코 작가를 초청하여 를 개최하였다. 5월 19일부터 22일까지 교보인문학석강, 낭독회, 북토크 등 다양한 부대행사가 진행되었으며, 많은 독자들이 그의 목소리와 문학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다와다 요코가 방한 일정 중 한국의 대표적 시인인 김혜순과의 대담을 희망했고 김혜순 시인이 이에 응해 두 작가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이번 대담은 5월 22일 오전에 비공개로 진행되었으며, 사회는 김혜순 시인의 작품을 비롯해 활발한 시 평론 활동을 이어온 김나영 평론가가 맡았다.

 

이제는 김혜순을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말하기에 주저하게 된다. 얼마 전 그는 미국 내외 지식사회 리더들을 규합하여 공동선과 민주주의 가치 증진 등을 목표로 1790년에 설립된 학술 연구 단체인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AAAS)에 명예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올해 문학 섹션에 합류한 8인 가운데 김혜순 시인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은 미국인이다. 2019년 그리핀 시 문학상 수상과 더불어 지금까지 그에 대한 세계의 주목을 떠올려 보면 그의 시와 활동들은 이제 세계 시민의 것으로서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제 김혜순은 한국이 아니라 시인 세계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로 이주한 이후, 독일어와 일본어를 넘나들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다와다 요코는 오랜만의 방한 일정 중에 김혜순을 만나고자 했다. 이들은 국제 행사에서 이전에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고, 그때 나눴던 대화를 여전히 의미 있는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엑소포니 작가로서 모어와 외국어의 광활한 사이를 여행하며 글을 쓰는 다와다 요코와 한국어 안에서 이름을 갖지 못하는 존재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시인 김혜순의 대화에는 구절마다 비/인간의 역사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세계 시민으로서 언어를 단련해 온 이들 특유의 사유와 감각의 내용이기도 했지만, 모어 바깥의 언어를 받아들여 저마다 새로이 갖춘 신체로서 글쓰기, 즉 변신의 기록이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어와 일본어로 대화했지만 동시에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닌 말들이 이들 사이를 가득 메웠다. 무엇으로도 번역할 수 없고 모든 것으로도 번역 가능한 언어, 그것으로 ‘쓺’과 ‘삶’을 ‘하는’ 두 작가를 만나보았다.

 

왼쪽부터 다와다 요코, 김나영, 김혜순

 

 

김나영
평론가,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983년생
평론집 『말과 말 아닌 것』 등

 

김혜순

시인, 1955년생

시집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날개 환상통』, 산문집 『여자짐승아시아하기』,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시하다』 등

 

다와다 요코

소설가, 1960년생
소설 『헌등사』 『눈 속의 에튀드』 『개 신랑 들이기』 『목욕탕』 『태양제도』,
산문집 『여행하는 말들―엑소포니, 모어 바깥으로 떠나는 여행』 『글자를 옮기는 사람』 등

 

김나영 김혜순 시인과 다와다 요코 작가를 포함해 최근 한국, 일본, 그리고 그 밖의 국가에서도 여성 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문학상이라는 권위가 작품의 수준이나 독자에 관한 영향력 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인 문학상에서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국내 문학상에서도 여성 작가의 활약이 돋보인다.

 

김혜순(이하 김) 문학 작품 낭독회에 가보면 젊은 여자 독자가 거의 90%입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문학 서적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성별, 나이를 나타내는 통계 그래프를 보면 대부분 젊은 여성이 책을 삽니다. 우리나라에선 야구 경기장에도 여자가 많고, 영화관, 힙합 공연장에도 여자가 많습니다. 더구나 대통령을 탄핵해 달라는 집회에도 여자가 많습니다. 여자들이 문화적, 정치적 경험의 장에 많이 참여합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자연히 문해력이 낮아지고, 문해력이 낮으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서사를 만들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서사를 만들 수 없으면 심각한 정신적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요. 이때 문해력이란 생태적, 문화적, 문학적인 것을 다 포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문학 생산자들이었던 남성 작가들의 반대편에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 그 속에 숨어 있었던 다른 발성,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독자의 탄생이 먼저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학적 타자였던 여자들이 글 쓰는 주체의 자리로 들어선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와다 요코(이하 다)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독일의 경우에도 낭독회에는 여자 독자가 확실히 많긴 합니다. 젊은 여자도 많지만 60대 이상의 여성 독자들이 월등히 많습니다. 그 이상 연령대의 독자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들은 젊은 시절에 책을 많이 읽었고 낭독회라는 문화에 이해가 깊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일본의 경우도 비슷한데 다만 독자 간 성별의 차이가 그렇게 크다고 보진 않습니다. 문학 안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두드러지게 된 것은 여성들에게는 ‘쓰다’라는 행위가 아주 근원적이고 유리한 수단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혜순 선생님께서 자신의 서사를 만들 수 있는 능력에 관련한 말씀을 하셨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그와 동시에 이미 만들어진 서사를 받아들이는 일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관람 같은 것이요. 요즘 사람들은 모니터로 영화를 보면서 서사의 소비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때의 서사는 대부분 성공 스토리나 행복한 에피소드입니다. 그들이 그런 것을 보고 그렇게 되지 않는 자신의 삶을 쉽게 비관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일본에서 젊은 사람들의 자살률이 높은 데에는 그런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Hiruko(히루코) 3부작’(『지구에 아로새겨진』, 『별에 어른거리는』, 『태양제도』)에서는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서 수다를 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서사를 스스로 말할 수 있게끔 하고 싶었어요.

 

문학이 저마다에게 삶의 감각을 일깨울 수 있을까. 김혜순 시의 저변에는 여성으로서의 삶에 관련한 사유와 감각이 있다. 이 사유와 감각이 화학 작용하며 반응하고 쓰이는 언어가 그의 시라면 그 중심에 여성의 몸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동일성에 대한 강요로부터 ‘삐져나온 것’, 그 타자성을 ‘시하는’ 것이 김혜순 시의 중요한 특징이라면 그 익명적인 것은 또한 몸으로만 행할 수 있는 무엇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다와다 요코의 목소리에 대한 강조를 떠올려 보게 된다. 모어와 외국어의 구분보다는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에서 신체에 새겨진 모어의 습관과 발성법이나 익숙한 글자의 나열과 조합 등이 제3의 언어를 창조하게 하고 그 언어가 다와다 요코 문학을 창출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새로운 언어에 둘러싸여 그것의 발성을 감각하는 일을 두고 “모든 자음과 모음 그리고 어쩌면 모든 쉼표가 신체 세포를 뚫고 들어가 말하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몸은 김혜순과 다와다 요코 문학의 교집합이라 할 수 있다. 그 자신의 몸, 여성의 몸은 문학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제가 2003년부터 《파라21》이라는 문예지를 편집하면서 ‘여성의 시각으로 읽는 한국문학사’를 기획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소월 한용운을 여성의 시각으로 다시 읽고 그 수용 양상마저도 다시 보는 겁니다. 그러자 그들의 여성 화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더불어 그 시인들의 다른 의도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면면히 이어지는 우리나라 남성 시인들의 젠더 의식이랄까 그런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식민지에 사는 남성들의 식민지인 여성의 목소리의 전유가 있었던 셈이죠. 그럴 때 여성은 다시 목소리를 빼앗기고 구멍이 되는 겁니다. 저는 언제나 우리나라 여성에게는 부과된 정체성이 있고, 그 부과된 정체성에 대한 어떤 저항이 저의 시에도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젠더는 일종의 가면이 되어 여러 성을 명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역으로 그 젠더에 대한 시인 자신의 인식 때문에 시가 써지기도 합니다. 시를 쓰는 것은 이 명명에 대한 일종의 거부, 위반, 소수자적인 인식으로부터 발현되기도 하지요. 저는 젠더의 토대이자 기원인 이 몸의 모습이 사실 사회 규범에 의해 규정된 것이라는, 성별과 섹슈얼리티마저 모두 젠더라는, 그래서 젠더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정체성은 비정체성입니다. 젠더는 여성들이 그동안 받아왔던 불평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또 어떤 사회 활동이나 문학적 인식의 토대가 되기도 하는 이중구속입니다. 저는 언제나 시인은 그 사람이 어떤 섹슈얼리티를 가졌든 간에 여성적 몸의 포지션에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탄생과 돌봄의 자리이지만, 쫓겨나거나 변방에 있는 소수자의 몸 말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시에 관한 글들을 모은 세 권의 에세이집을 출간했습니다. 그 책들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생체시학’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몸에게서 이름과 인종과 피부 색깔과 취향과 그 모든 것을 제거한 몸, 돼지와 다를 바 없는 그 몸을 ‘여자짐승’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몸의 직감으로, 그 모든 것을 떨군 몸의 내밀성으로 저는 시를 감지하겠지요.

 

독일에 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독일어 발음이 너무 어려워서 항상 내 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의식했습니다. 모어(母語)로 이야기할 때 저는 혀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아요. 이런 상태를 저는 혀의 부재라고 부릅니다. 머릿속으로는 하나의 문화에서 다른 하나의 문화로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어를 배우면 독일어로 말하는 방법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발음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혀에는 몸에서 감지한 기억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덴티티라는 것에는 사회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예를 들어 여자다, 아시아 여자다, 이런 기호 같은 게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여자라거나 아시아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지는 않아요. 그렇더라도 밖으로부터 그런 시선을 받았을 때 거기에 반항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어떤 하나의 정체성을 스스로 주장할 생각은 더욱 없습니다. 나는 여자가 아닙니다, 나는 코스모폴리탄입니다 같은 명명 같은 것이요. 저는 규정된 아이덴티티라는 것은 없다고, 없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밖에서 나를 보는 반응과 안에서 쌓여온 기억 같은 것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정체성에 관련한 대화 가운데 이들이 그 자신의 젠더를 글쓰기로 드러내는 방식이 궁금했다. 다와다 요코는 한 에세이에서 “젠더는 ‘성(性)’보다 ‘류(類)’에 가까울 수 있다. ‘성’은 태어나며 가진 성질이나 숙명을 가리키지만 ‘류’는 ‘이런 식으로 삽니다’ 같은 행동 방식이다”라고 썼다. ‘여류의 인간이 쓴 작품’이라는 의미에서 여류 문학이라는 분류가 여성 문학보다 차라리 낫다는 맥락의 이야기 중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와 관련해 김혜순 시인이 어느 인터뷰에서 누구도 시키지 않았으나 가사 노동의 대부분을 스스로 도맡아 한다고 말했던 게 문득 떠올랐다. 가사 노동은 여성의 몫이라는 사회적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보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서서 하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면 그것이 자신과 타인을 돌보는 일의 핵심 원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의 말이 새삼스레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조건 없이 그저 ‘하는’ 것이다. 저 두 개의 자기 고백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자기 삶에 대한 자발성이 깃들어 있었다. 이 자발성이야말로 하나의 정체성으로서 말해지는 여성이라는 단어에 취소선을 긋고 일종의 수행성으로서의 젠더 혹은 삶의 방식에 주목하게 하는 힘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인간은 병들거나 다치지 않는 한 자신을 돌보는 일을 스스로 해야겠지요. 저는 『여성, 시하다』에서 시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시를 써오면서 혹은 여성들의 시를 읽으면서 발견한 지점이 여성들이 시선을 대상에 보내 은유하지 않고 스스로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성은 가사노동을 하고, 아이들을 기르듯 시에서도 합니다. 그것이 ‘시하다’이지요. 수행은 한 번 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견디는 것입니다. 가사 노동도 반복을 견디는 것이지요. ‘시하다’도 이와 같아요. 한 편의 시만 쓰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견디며 쓰는 것이지요.

 

사회자가 ‘류’라는 것을 이야기해서 오랜만에 다시 생각해 보며 재밌었습니다. 여류 문학이라는 표현이 일본에 있었습니다. 에세이에서도 썼지만 여성 작가에 대한 차별적 의미가 있었고 여성 작가들의 반대로 인해 이제는 여성 문학이라고 합니다. 사실 저는 여성 문학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여자인 사람이 쓰면 여성 문학이고 남자가 쓰면 남성 문학이라고 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거든요. 일본의 유명한 페미니스트인 우에노 지즈코와 도미오카 다에코(오구라 지카고를 포함해 3인 집필, 『남류문학론』으로 번역됨)가 『남류문학』이라는 책을 냈는데 말 그대로 남류 문학이라는 특수한 문학을 여자가 한번 읽어보자는 의도에서 쓴 것입니다.

저는 이 ‘류’라는 글자의 의미를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흔들리거나 흘러가는 움직임을 포함하는 한자로서는 좋아합니다. 아무튼 여자도 복수형이고 시대에 따라서 의미의 변화가 있을 말인데 하나의 의미로 흐름을 고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어요. 예를 들어 제가 생물학적인 여자 시점으로 소설을 쓰자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프로젝트에 불과할 것입니다. 물론 여자라는 성으로 경험한 것들이 있기에 그게 제 소설의 토대나 배경이 된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젠더 아이덴티티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동물의 입장에서 사회를 바라보면 어떨까요. 독일의 통일을 동물의 관점에서 보고 쓴 것을 저는 ‘곰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눈 속의 에튀드』를 의미함).

 

한 사회의 구조나 정치 행위가 개인을 규정하면서 그에 반하는 사유와 감각을 생성하기도 한다. 김혜순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사회와 국가의 강력한 규정으로 인해 그로부터 삐져나오고 일그러지는 존재로서 타자, 이름을 갖지 못하는 존재를 마주하게 된다. 다와다 요코는 어느 산문에서 직간접적으로 겪은 인종차별의 경험을 쓰기도 했다. 고급 손님만 상대하는 프랑스 식당에서는 일본의 “추상적 서양”에 대한 우상화를, 아프리카에서 일본으로 온 일본문화 연구자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을 통해서 “유럽의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인 일본의 “미묘한 열등감”을 실감한 사례(영화 <다른 곳에서 온 사람>(1979)에 관련한 것)가 그렇다. 이처럼 끝없이 개인을 규정하는 체제에 연관한 분노는 문학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제가 ‘Hiruko 3부작’의 배경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선택한 이유는 그곳에 인종차별이나 불평등이 가장 빨리 해결된 나라라는 사회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이 그 지역에 산다면 아이덴티티가 어떻게 형성될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기도 합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어떤 편견이나 아집도 없고, 자기 목적도 없으며 그저 소파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크누트라는 덴마크 남자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분노라는 것은 어떤 것을 깨닫게 해주는 기회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왜 이렇게 분노가 올라올까 하는 상황에서 숨어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사회자가 말씀하신 프랑스 식당 일화는 1980년대 일본 버블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프랑스의 문화를 좋아합니다만 일본이 프랑스를 이용하는 방식은 굉장히 오묘하다고 느낍니다. 가령 프랑스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일본 사회에서 상류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하는 구조 자체가 열등감에서 비틀어진 우월감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이라는 저의 책에서 여성은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반드시 어느 기간 그로테스크의 강을 건넌다고 썼습니다. 여성 시인에게는 견딜 수 없는 분노의 시간을 지나가면서 광기에 찬 험한 말들을 내뱉는 시기가 있습니다. 타자화된 자신의 여성성, 소외된 주변부의 목소리로서 자신의 타자성을 그대로 구현하려 할 때 분노에 찬 외침이 출몰합니다. 텍스트 행위로서의 자신의 독백뿐만 아니라, 그 독백을 지배하는 시대 정치, 사회적 문화적 담론들이 텍스트를 건드릴 때 모국어라는 이 억압적인 그릇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분노가 표출되는 겁니다. 소설은 현실에 대한 거짓말이고, 시는 언어에 대한 거짓말입니다. 시에는 분노에 대처하는 다른 방향으로의 전개, 언어에 대한 거짓말이 있는 겁니다. 언어를 가지고 할 수 있는 타자성에 대한 최대한의 처벌이 자기 몸에 내려지는 겁니다. 시인이 죽음을 일상처럼 자신 곁에 두는 것도 자기 공간, 자기 언어에 대한 위협, 자신의 바깥과의 갈등으로 인한 분노 때문입니다. 바깥과의 미해결이 계속 자기 파괴와 자기 혐오를 불러옵니다. 이것은 자기 몸에 대한 처벌이면서 또한 억압하에 있는 현실 자체에 대한 훼손을 역으로 표출하는 겁니다. 너를 처벌할 수 없으니 나를 처벌하는 것이지요. 여성 시인들이 끝없이 자신의 영토 없음을 다른 차원에서 찾는 것도 이 상황에 이르게 한 대타자에 대한 분노 표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혜순과 다와다 요코는 자주 여러 나라의 크고 작은 도시를 오가며 강연과 낭독회에 참석하고 그곳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의 주된 활동 배경은 주로 서울과 베를린과 도쿄 등 세계적으로도 대도시라고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도시는 한 나라의 문화적 감각과 활동이, 또한 자본과 권력이 집중되는 곳이지만 언어를 포함한 초국가적인 것이 뒤섞인 공간이기도 하다. 그처럼 대도시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장소인 동시에 그 나라의 고유성이 가장 미약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대도시는 어떤 의미를 갖는 장소일까.

 

 다와다는 도시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삶을 사는 유목민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서울에 고착되어 있습니다. 홍콩에서 다와다의 여권을 본 적이 있는데 더 이상 입국스탬프를 찍을 수 없을 만큼 너덜너덜한 여권이었습니다. 다와다는 ‘Hiruko 3부작’에서 ‘도쿄라고 소리 내어 말할 때 가슴속에 일어나는 두근거림, 술렁거림, 열기 등을 사랑하는 마음… 특산물을 만들어 마을을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 도쿄에도 있다’라고 하면서 공업화 이전의 도쿄의 매력을 되살리기 위해 ‘에도’라는 브랜드명을 붙인 신제품 프로젝트를 가동합니다. 소설에서 국가는 사라지게 했지만 도시는 작은 공동체로 쪼개진 채 그 이름의 향수를 간직합니다. 나는 서울의 익명성이 좋습니다. 내 집에서 나가면 아무도 내가 누군지 모릅니다. 같이 있지만 서로 잠적한 상태로 있는 것. 하지만 재난 공화국인 우리나라에서 지하철을 타거나 공연장에 갔을 때 홀연히 저는 깨닫곤 합니다. 우리는 태어난 날은 모두 다르지만 같은 날에 죽을 수 있는 죽음의 공동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애드거 앨런 포의 『군중 속의 남자』에서처럼 ‘도시는 드러나지 않는’ 범죄 현장 같습니다. 그는 ‘도시를 기사와 칼럼처럼 읽으며 살피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서울은 나에게 하나의 텍스트입니다. 텍스트의 재현이기도 하고 상상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2022년 10월 29일의 이태원,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있는 우리들의 탄핵 집회 현장이 기입된 곳이 서울이라는 텍스트입니다. 텍스트에는 인간과 풍경이 있습니다. 서울은 하나의 텍스트처럼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의미의 집합체입니다. 서울은 또한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언어 또한 하나의 오래된 도시입니다. 도시와 텍스트는 모두 물리적,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각기 다양한 각도에서 이미지와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도시는 늘 새롭게 써지는 커다란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도시의 지정학과 맞붙은 채 유동하는 모국어를 앓는 시인이지요. 다와다의 ‘Hiruko 3부작’을 읽으면 어딘가 북유럽 스타일이 느껴집니다. 등장인물 문문은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킹덤>의 병원의 식기세척기 담당 인물, 코러스를 하는 그 다운증후군 인물이 연상됩니다. ‘Hiruko 3부작’에서도 지하 병원 세척기 앞의 인물들의 대화는 노래입니다. 이 3부작은 어디서 쓴 것인가요? 글쓰기의 지정학 같은 것을 느끼면서 소설을 쓰는지도 궁금합니다.

 

질문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는 여행하고 이동하며 소설을 씁니다. 하지만 실제의 여행과 소설 속의 여행은 전혀 섞이지 않고, 오히려 실제 여행에서의 이야기는 아주 나중에 다른 소설에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유럽의 경우 대도시 자체가 특유의 존재감을 갖고 있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그렇죠. 예를 들어 바르샤바는 한때는 독일의 도시였고 한때 갑자기 없어졌다가 다시 폴란드의 도시로 나타납니다. 시대와 국경의 변화와 무관하게 바르샤바라는 도시는 꾸준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국경이라는 것은 그렇게 믿을만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독일의 경우는 프랑스 파리처럼 모든 게 집중되는 곳이 있는 건 아닙니다. 여러 도시들 각각이 자기가 지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혜순 선생님 말씀처럼 도시를 역사적인 텍스트라고 생각한다면 독일은 그것을 의식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도시 곳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길에는 ‘걸려서 넘어지게 하는 돌’(Stolperstein)이라는 이름을 가진 금색의 판이 있는데 거기에는 유대인 누가 언제 태어났고 어느 수용소에서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반면에 도쿄에 가면 제2차 세계대전을 생각나게 하는 기념물 같은 것은 안보입니다. 그 도시에는 역사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있는 것은 희생자로서의 기록입니다. 저는 가해자로서의 기록은 일본에서는 지워진 상태라고 봅니다.

 

이들의 말 속에는 지금 일어나는 일로 이 다음을 모두 알 수 없다는 식의, 새로움을 기약하고 예비하는 감각이 들어있었다. 번역도 그런 것일까.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문학은 ‘최초에 쓰인 것’의 번역을 통해서만 다른 언어와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한계를 지닌다. 반면 다와다 요코는 서로 다른 언어 ‘사이’를 일종의 가능성과 잠재성을 지닌 공간으로 여긴다. 하나의 작품이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그 자신의 모어가 아닌 언어권의 독자들에게 큰 호응과 공감을 받고 있는 김혜순과 다와다 요코에게는 번역과 관련한 특별한 경험이 많을 것 같았다.

 

번역이라는 것은 예술의 창의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번역이 원본의 모든 의미를 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 자체가 오히려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게 합니다. 김혜순 선생님의 시집이 공역으로 번역된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어에 가까운 번역자와 독일어에 가까운 번역자, 혹은 한국어는 잘 모르거나 독일어는 잘 모르는데 시를 잘 아는 경우의 조합으로 번역이 됩니다. 저는 김혜순의 시를 독일어로 너무 즐겁게 잘 읽고 있습니다.

문학이란 것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문학의 언어 자체를 예술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저는 사실 번역 자체는 불가능하다는 말도 지지하는 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열심히 번역해보려는 일이 가능하겠고요. 그런 식으로 독자들에게 뭔가 진짜를 전달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독자들 속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번역은 나중에 어떤 새로운 것을 독자 안에서 생기거나 느낄 수 있도록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로 쓰인 시가 독일어로 번역되었을 때 완벽히 전달되지 않더라도 그로 인해 한국적인 영향을 주거나 한국에 관한 문화나 정서가 독일어 독자에게 깃들지 않을까요.

 

특별한 경험이 있냐고 물으셔서 답변을 드리자면 저는 제 시를 번역한 번역자들이 제 시를 번역하고 나서 스스로 시인이 되는 것이 경이로웠습니다. 그들이 제 시를 번역하면서 시의 나라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자신들의 시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을 지켜보는 경험 말입니다.

번역은 엑소포니 작가인 다와다 요코에게 중요한 테제입니다. 다와다의 ‘Hiruko 3부작’에 등장하는 일본신화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Hiruko의 판스카 언어라든지 동화 구연은 마치 다와다 요코의 소설 언어가 쌓여가는 모습 같습니다. 저는 수잔 버노프스키가 영어로 번역한 『파울 첼란과 티벳 천사(Paul Celan and the Trans-Tibetan Angel)』가 궁금합니다. 미국 뉴디렉션스 출판사의 제프리 양이 몇 달 전 메일에서 다와다 요코가 뉴욕에 와있다고 저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엔 티베탄이 아니고 “중국 천사(chinese angel)”이었는데 그것이 티벳으로 바뀐 배경이 궁금합니다. 다와다에게는 파울 첼란 시의 구두점의 인상을 기술한 에세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 에세이에서 첼란 시에 사용된 모든 형태의 문장부호를 탐험하지 않았습니까? 다와다는 ‘첼란이 때때로 알파벳 기호들을 그래픽식으로 관찰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시들의 글자 표면에서 그러한 빛이 발산될 리 없다’고 했습니다. 시인은 문자 자체, 그 형상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내세의 마이크」, 「모음의 이중생활」, 「죽으면 미치게 되는 건가?」, 「쌍비읍 부끄러워」, 「쌍시옷 쌍시옷」 같은 시에서 그런 관심을 시로 쓴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세의 마이크」에는 “ㅎ이 붙은 단어들은 다 이마에 귀 달린 생쥐의 얼굴처럼 보였다. / 해변 희망 희미 회전목마 한 번 흥분 환각 한국 혜순 혀 / 나는 ㅎ 자 때문에 미칠 지경이 되었다 / 모든 문장에서 ㅎ자를 일단 먼저 까맣게 칠하고 책을 읽었다”라는 구절들이나 “a는 임신한 여자가 바닥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고 / b는 임신한 여자가 산달이 가까워 몸이 무거운 것처럼 보였고 / c는 임신한 여자가 우는 것처럼 보였다. / d는 임신한 여자가 차마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고 / e는 임신한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 나는 원치 않는 아기를 임신한 여자처럼 모래 베개에 모래 머리를 올렸다 / 하지만 나는 밤새 모래를 임신한 p가 되었다가 모래를 임신한 q가 되었다가 하면서 / 알파벳을 브리태니커 사전처럼 무한수열 오가다가”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다와다는 첼란이 미래의 번역자를 위해 수많은 표지들을 시에 남겨 놓은 것으로 느꼈습니다. 그 언어들은 그냥 나열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들을 보여주는, 연금술적인 과정을 통해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한국어 번역가가 다와다의 그 소설을 번역해 주길 기다립니다. 정말 시인들은 그렇게 언어의 모습, 구두점, 자모의 조합에 민감하고 그것들의 생물학에 관심이 있거든요. 시인들은 모국어의 억압을 단숨에 알아채고, 언어를 피해 도망가면서 언어의 조합을 변경하거나 신경씁니다. 그것은 아주 병적인 태도이기도 한데요. 그런 내밀한 것은 번역되기 힘들지요.

 

김혜순 시인은 어느 자리에선가 시는 설명하지 않는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요즘 시대만큼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일이 당연시되는 사회가 있을까. 기사문에 달리는 ‘3줄 요약’ 같은 댓글은 전달하려는 의미가 분명한 글에서조차 이해를 돕는 설명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의 일면을 보여준다. 모든 것에 ‘해석의 여지없음’이 강요된다. 이런 시대에 시처럼 짧은 글의 형식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제가 어디선가 우리가 언술할 때의 형태들, 묘사, 서사, 설명, 고백, 논증 중에 시라는 장르는 설명을 두려워한다는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시가 설명을 할 때가 있는데, 그때는 시를 쓰는 사람이 풍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때나 자신의 서사를 신화나 우화로 발설하고 싶을 때입니다. 이럴 때 시인은 시에서 서사적 전개에 이어서 그야말로 사변적인 전개를 하게 됩니다. 그런 의도가 없을 때 시인은 정동으로 직접 달려듭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감각적 지각과 고백적 진술만으로 정동에 이르려고 합니다.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법에 의하면 서정시이지요. 말하자면 설명이 시에 들어오는 것은 어떻게든 독자를 가르치려는, 뭔가 자신의 삶의 내용과 의견을 드러내려는 의지가 밑바닥에 있는 겁니다. 애초에 설명은 남자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가르치려 듭니다. 시가 짧다는 것은 양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시는 짧지 않습니다. 함축적일 뿐이지요. 한 권의 시집이 한 편의 시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의 ‘죽음 3부작’으로 불리는 시집 세 권이 있는데 그게 한 편의 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는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이 더 많습니다. 이 시대가 그리고 점점 더 그 말해지지 않은 것을 잘 읽어내고 견뎌 줄 것 같진 않네요.

 

저도 동감합니다. 독자들이 왜 글이 말해주지 않은 것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게 되었을까요. 저는 시도 음악도 하나의 생산물이자 소비되는 상품이 되어서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시를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지점에서 스스로 생각해 보는 행위를 즐길 수 있는 사람만 좋은 독자가 될 수 있습니다. 혼자 생각하면 오해하게 되지 않을까 불안해지기도 하는데 그것조차 즐기고 견딜 수 있지 않으면 시를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년 후에 이런 의미였을까 하고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고, 결국은 거기서 아무 답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답이 없음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런 문화가 아직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부디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파일 형식의 시와 소설을 AI에게 보여주면 단숨에 요약과 분석을 해서 돌려준다. 사람들의 일상과 문학의 자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와 문장 사이의 관계를 음미하고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말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기존 언어의 세계보다 한 마디나마 넓어진 세계를 꿈꾸게 하는 게 여전히 문학의 역할일 수 있을까. 모든 것이 0과 1로 전환되어 손쉽게 복제되고 유통되는 디지털 시대에 활자 예술로서의 문학, 종이책과 서점은 어떤 가치를 지니게 될까.

 

저는 머지않은 장래에 시라는 장르가 유통의 장에서 소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만의 시적 발견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시를 가동할 겁니다. 그렇게 시는 다른 곳으로 스며들어가 살 겁니다. AI는 학습한 지식을 요약하고, 기술적 오류가 없는 문장으로 출력해 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쓰는 문학 작품처럼 주어진 텍스트에서 잠재된 맥락을 상정하는 의미 구성의 층위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생태적이거나 문학적인 문해력을 갖춘 인간이 쓴 텍스트는 확장 가능하고, 함축적이며 다른 텍스트와 연결되어 있고, 다른 텍스트와 접속한 순간에 다시 실현되어 다른 존재를 가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텍스트는 잠재적 공간에도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AI 텍스트는 그런 것을 갖출 수 없겠죠. 그렇게 되면 누가 있어, 누군가 쓴, 쓰게 될 글쓰기의 위대함을 감당해 줄까요?

 

저는 종이책을 굉장히 좋아하고 종이 문화를 사랑합니다. 종이는 아주 훌륭한 문화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어요. 지난 일요일에 서울에 도착했는데 청계천에 가보니 그곳에서 젊은 사람들이 종이책을 읽고 있더군요. 요새는 종이책을 읽는 게 힙한 문화여서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독일에 ‘아티스트 북’이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예술가와 시인이 함께 하나의 오브젝트로서 책을 만드는 겁니다. 저도 몇 권 만들어본 경험이 있어요. 그중에 하나는 『오코노미야키』라는 책인데요, 종이에서 일본의 오코노미야키 같은 냄새가 납니다. 또 다른 예술가는 일본 기후현의 미노가미라는 고지(故紙)를 만드는 방법으로 책을 넘길 때 큰 소리가 나는 종이를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소리에 특화된 책을 만들려는 것이었지요.

 

아무래도 최근 문학의 관심은 인간이 아니라 그 바깥에 있는 듯하다. 이른바 우리가 비인간이라 부르는 존재들. 김혜순의 시에는 일찌감치 인간 곁의 동물들에 대한 공감이 있어왔고, 많은 이들이 이를 김혜순 시의 타자성의 사유로서 읽어보기도 했다. 그는 『날개 환상통』에 수록된 시를 쓰면서 “유한성과 무한성을 인간과 공유하는 존재로서의 동물, 그래서 이중 구속적 존재인 동물로서의 ‘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혜순의 시에서 “새는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보여주는 동물”이며 새가 주어나 목적어가 되지 못하게 하는, 새의 수행을 가리킬 뿐인 ‘새하다’와 같은 조어는 그 자체로 김혜순 시세계의 중요한 특징을 짚어주는 말이다. 다와다 요코 역시 낯선 언어에 둘러싸여 그것을 듣고 말하는 자신을 새에 비유한 적이 있다.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류 관찰자가 된 것 같은 경험을 고백한, “낯선 혀로 말하는 사람은 조류학자이자 한 마리의 새입니다”라는 문장은 무척 인상적이다. 북극곰 삼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중심적인 문명을 비판적으로 보게 하는 『눈 속의 에튀드』는 그의 대표작 중에 하나다. 두 사람의 최근 관심에는 어떤 동물(성)이 있을까.

 

 

2018년에 쾰른 세계 문학 축제(Poetica 4. Festival fǖr Weltliteratur)에 갔었습니다. 그 행사의 큐레이터는 다와다 요코였습니다. 그때 우리들의 주제가 The Art of Transformation, Inter-Art Metamorphoses였지요. 다와다의 시학 강의 모음집이 『변신』이었는데, 그 행사의 여러 장소에서 참가자들은 거듭 카프카의 「변신」을 소환했습니다. 다와다만큼 알파벳 문자의 여행에 대해서, 그렇게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문학가는 일종의 번역가입니다. 다와다의 『변신』은 언어적 변환의 번역이기도 한데 그때 쾰른에 모인 사람들 중에 그것을 말하는 분은 드물었습니다. 토론장 밖에서 베이 다오와 제가 한참 동안 거기 모인 사람들의 토론에 대해 얘기를 나눈 기억이 납니다. 동양의 변신에 대해 얘기할 기회를 안 준다고 불평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다와다의 ‘변신’은 알파벳 문자의 소통적 기능 밑에 숨겨진, 억압된 측면들을 다시 환기시키려고 합니다. 문자가 단순히 말의 기록이 아니라 제의적 맥락에서 초혼의 글쓰기가 될 수 있고, 문자라는 신체로서의 시각적 형상의 생성, 그 변신 능력으로 문자는 동물의 생명력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문자가 환상적인 동물로 변신하는 것이 제의적인 맥락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저의 시집 속의 ‘새’도 마찬가지입니다. 『날개 환상통』의 첫 시에서부터 저는 이미 그것을 말했습니다. 한글은 표의문자와 표음문자가 합체된 것입니다. 한글이라는 표음문자 안에 표의문자인 한자가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글도 얼마든지 동물적인 생명력과 제의적인 것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저의 책 『여자짐승아시아하기』는 여자하기와 짐승하기와 아시아하기가 어째서 시인의 ‘하기’인지를 드러내는 책입니다. 저는 동물 되기라는 은유에서 나아가, 동물의 주변지대, 혹은 분자적 식물의 지대로 들어가는, 말하자면 어떤 수행, 행위로서의 시를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저의 ‘시하기’, ‘여행하기’는 일종의 ‘여자하기’와 ‘짐승하기’입니다. 저의 시는 여자하기와 짐승하기라는 끝없는 ‘하기’의 도정 속에 있는 일종의 작용입니다. 시는 저와 다른 것, 제가 아닌 것, 낮은 것, 분열된 것, 작은 사람들을 향해 가는 ‘하기’의 과정입니다. 짐승하기의 여행은 저의 외부를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짐승의 외밀성의 지대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의 일의성 안에서 일의성의 영토를 힘껏 밀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왔습니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를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나의 신체와 짐승의 신체가 자발적으로 혼종의 비체를 만들어가는 것. 여성을 짐승과 동일시하면서 비천하게 여기는 언어들을 오히려 내가 받아들여 나와 짐승하기를 자연스럽게 도모해 보는 것. 그리하여 닥쳐오는 괴물인 미래가 되는 것. 새로운 생기의 장에 도착하는 것.’ 이것이 저의 짐승하기이며, 변신입니다. 다와다는 그것을 ‘세탁소에 맡긴 스웨터가 줄어들었을 때 그 스웨터를 보여주며 메타모르포세스, 연인에게 마음이 변했을 때는 심장을 누르며 메타모르포세스’라고 시적 운율로 말했습니다.

 

저는 동물을 볼 때 굉장히 강한 타자성을 느낍니다. 동물을 마주할 때 도저히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그런 감각에 휩싸이게 됩니다. 나를 압박하고 절박하게 하는 그 마음은 동물 앞에서는 언어가 아무 힘이 없다, 그러한 불가능에 가까운 무력함을 받아들이는 일과도 같습니다. 그 느낌이 저에게는 글을 쓸 때 굉장히 중요한 동력이 됩니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두 시간을 가득 채운 대화였다. 며칠 뒤에 두 사람은 각자의 이유로 독일로 간다고 했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말을 경청하는 두 사람을 지켜봤을 뿐인데, 한국도 일본도 아닌 곳에서의 재회가 그들 사이에 가장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모르는 언어로 대화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본 적도 없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들은 모어와 외국어라는 구분까지도 온몸으로 넘나들면서 자유롭게 춤추고 노래하듯 쓰기를 한다. 저 창밖의 새들처럼 기꺼이.

 

※ 통역 : 오영아(번역가)

김나영
편집자 주 : 대산문화재단은 다와다 요코 작가를 초청하여 <2025 세계작가와의 대화>를 개최하였다. 5월 19일부터 22일까지 교보인문학석강, 낭독회, 북토크 등 다양한 부대행사가 진행되었으며, 많은 독자들이 그의 목소리와 문학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다와다 요코가 방한 일정 중 한국의 대표적 시인인 김혜순과의 대담을 희망했고 김혜순 시인이 이에 응해 두 작가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이번 대담은 5월 22일 오전에 비공개로 진행되었으며, 사회는 김혜순 시인의 작품을 비롯해 활발한 시 평론 활동을 이어온 김나영 평론가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