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에 활약한 미국 작가 러브크래프트는 크툴루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괴물과 그와 관련된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두려운 것들에 대해 소설을 썼다. 이후 그의 소설에 대해선 내용 그 자체보다 소설에 등장한 소재들이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자 여러 다른 작가들의 개입과 팬들의 의견 교환 속에서 러브크래프트가 상상한 무시무시한 괴물들의 세계는 크툴루 신화라는 이름을 얻은 장대한 이야기들의 체계로 성장했다.
요즘도 각종 공포물과 SF물에서 종종 소재로 활용되곤 하는 크툴루 신화의 핵심은 바닷속 깊은 곳에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주 강력하고 무서운 무엇인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크툴루 신화의 재미는 우주의 거대한 힘 앞에서는 사람의 노력이나 의지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서 공포와 경이를 동시에 끌어낸다는 데 있다. 이렇게 우주의 압도적인 알 수 없음과 무의미함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람의 무력함을 주로 다룬 이야기들은 종종 ‘코스믹 호러’ 또는 ‘우주적 공포’라고 하는 하나의 경향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짐작해 보자면 러브크래프트는 아마도 바다의 거대함을 보고 이런 공포물을 처음 떠올렸을 것이다. 바다는 너무나 크고 넓으며, 그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기 어렵다. 그렇다 보니 러브크래프트 이전에도 바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동경과 숭배의 대상인 동시에 공포와 환상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예로부터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바다에 거대한 괴물이나 세상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대한 신령 같은 것이 산다는 전설과 신화를 만들어 왔다. 크툴루 신화는 그러한 옛 바다 전설과 신화를 20세기의 현대 문명에 걸맞게 더욱 깊이 끌고 간 결과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옛 전설 속에도 다양한 바다 괴물, 바다의 신령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삼국시대 이후 한국 전설에는 흔히 용의 모습을 하고 바다를 다스리는 임금인 ‘용왕’이 등장한다.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 계통의 문헌을 보면 바다 세계의 신비롭고도 위대한 생물로 용과 용왕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아마 삼국시대 불교문화의 확산과 함께 한국의 용왕 이야기는 점점 더 풍부해지고 다양해졌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에 실린 거타지 이야기 속에는 신라 말기를 배경으로 거타지라는 활을 잘 쏘는 젊은이가 서해의 용과 힘을 합해 승려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늙은 여우와 맞서 싸우는 독특한 내용이 나온다.
![]() 『삼국유사』에 실린 수로부인 이야기 ⓒ국사편찬위원회 |
용이나 용왕 같은 전형적인 전설 말고도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이상한 괴물 이야기는 찾아보면 더 있다. 『삼국유사』에 실린 수로부인 이야기를 보면 바다에 사는 괴물조차도 수로부인의 미모에 빠져 바닷속 세계로 부인을 납치해 갔다는 내용이 나온다. 처음에는 괴물을 단순히 해룡, 즉 바다의 용이라고 언급하지만, 나중에 나오는 노래 가사에는 그 괴물을 향해 사람들이 “거북”이라고 부르는 대목이 실려 있다. 그렇다면 수로부인을 납치해 간 그 괴물은 용과 같은 점이 있으면서도 거북과도 비슷한 점이 있는 더욱 괴이한 생물이라는 상상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다 괴물에 대한 한국의 옛이야기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조선 후기의 작가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 수록된 「상기」라는 글이다. 이 글의 원래 목적은 박지원이 코끼리를 실제로 본 목격담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박지원은 코끼리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우연히 동해에 갔을 때 보았던 신비로운 형체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늘어놓고 있다. 글 속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바닷가에서 멀리 파도 위에 꼭 말처럼 서 있는 커다란 것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 숫자는 매우 많았다. 그게 물고기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한 괴물 떼거리 같은 것들이 집채같은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어디론가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도대체 박지원은 무엇을 본 것일까?
혹시 다양한 한국의 바다 괴물 이야기 중에 크툴루 신화나 코스믹 호러 같은 느낌을 주는 이야기도 있을까? 한국 괴물 전설 중에 하나 골라 보라고 하면 나는 꼭 짚어 보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바로 남해신 이야기다.
![]() 임하필기ⓒ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남해신에 관한 내용이 가장 풍부하게 남아 있는 책은 19세기 조선의 기록인 『임하필기』다. 이 책에 실린 글 중에 ‘남해신묘’라는 사당에 대한 대목을 보면 굉장히 이상한 이야기가 나온다. 호남 지역에는 남쪽 바다의 신령, 즉 남해신을 떠받들고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해 둔 남해신묘라는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사당이 있는 장소는 영광과 무안의 경계 지점이었다.
본격적으로 기괴해지는 것은 바로 그다음이다. 가끔 남해신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면 남해신이 바다에서 직접 등장하기도 했단다. 그런데 그 장면은 대단히 웅대한 장관이었다.
『임하필기』에 실린 묘사를 살펴보면 “헤아릴 수 없이 크다”라는 표현을 사용해 모습을 드러낸 남해신의 크기를 짐작케 한다. 게다가 물속에서 물 밖으로 나왔다가 빠르게 몸을 움직이면 비가 내리는 것 같고 풍랑이 휘몰아치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한다. 남해신이 신비로운 힘을 발휘해서 폭풍처럼 비와 바람을 불러오는 것인지, 아니면 남해신의 덩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남해신은 굉장한 위력을 지녔으며, 이를 과시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 ※편집자주_AI를 활용하여 만든 남해신의 이미지 |
세부적인 묘사는 더욱 이상하다. 남해신이 등장했을 때 갈기가 보였다는 사실을 책에 분명히 써 두었다. 특히 그 갈기가 마치 창과 같았다고 한다. 창 중에서도 흔히 극이라고 부르는 옆을 공격할 수 있는 꺾어진 부분이 달린 꺾창 느낌의 무기와 닮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런 표현을 보면 남해신의 갈기가 그냥 단순히 동물의 기다란 털 모양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무엇인가 다른 특별한 모양이 갈기처럼 달린 괴물이었던 것 같다. 『임하필기』 속 이야기는 남해신이 자주 나타나곤 했지만 기유년 이후로는 어쩐지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으로 마무리한다.
도대체 남해신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전설일 뿐인 이야기이니 분명 과장된 내용도 있었을 것이고, 누구인가의 상상을 덧붙은 내용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신화와 전설에서 찾아 보기 어려운 독특한 형상의 신령이 상당히 구체적인 정황과 함께 서술되어 있다. 나는 아마도 남해신 목격담을 낳은 어떤 실제 사건이 있기는 있었을 거라는 생각한다. 즉, 조선 후기 전라도 남해안 사람들은 어떤 이상하고 강렬한 광경을 몇 차례 보았을 것이다.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충격이 소문으로 퍼지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이리저리 과장되면서 『임하필기』 작가가 글을 남길 때쯤에는 이렇게까지 이상한 이야기가 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남해신의 진짜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조선 후기 남해에 큰바다사자 같은 커다란 해양 포유류 동물이 등장한 것일까? 큰바다사자는 보통의 물개 같은 동물보다는 크기가 확연히 더 크므로 “큰 괴물을 보았다”라는 소문을 낳을 만하다. 또 바다사자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목 주변에 갈기를 닮은 제법 굵고 긴 털이 나 있기도 하다. 한국 남해안에 큰바다사자가 나타나는 일은 매우 드물긴 하다. 그러나 2023년 6월 22일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에 큰바다사자가 발견되어 큰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영리한 바다사자 한 마리가 한동안 남해안을 떠돌며 바다에 제물을 던져 줄 때마다 그것을 먹으려고 나타나곤 했고, 그 사실이 소문 속에서 과장되어 남해신 전설이 탄생한 것일까?
묘사 내용을 보면 남해신의 등장 장면은 거대한 고래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한반도 인근에서 대형 고래가 발견된는 일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수염고래 계통의 아주 커다란 고래가 모습을 드러냈다면 이빨이 있어야 할 자리에 수염이 나 있는 그 특이한 모습을 보고 조선 시대 사람들이 “기괴한 갈기가 달린 바다의 신령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 남해신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남해신의 신비로운 모습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던 ‘남해신묘’라는 장소조차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남해당지’라는 이름으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97호로 등재된 폐허 유적이 있다. 현지에서는 흔히 ‘남해신사 터’라고 부르기도 하는 유적이다. 건물이 있던 장소인 것은 분명하지만, 조선 시대에 어떤 식으로 운영되던 무슨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 정도로 장소는 파손돼 있다.
1997년에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그 터를 조사해 보니 주변을 두른 담장 터, 2단으로 된 제사 장소 유적, 건물 흔적,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분명 그곳이 남해신을 향해 제사를 지내던 장소였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누가 무슨 제사를 지냈는지, 남해신을 향해 뭐라고 제문을 읽었고, 무슨 말을 했는지, 그 시절 사람들은 어떤 경외감으로 기도했는지 등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발굴된 유물 중에 동전이 아홉 개가 있었다는 소식이 들려올 뿐이다.
![]() 남해당지 ⓒ국가유산청 |
한국의 옛 괴물 이야기들을 살펴볼 때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위대한 민족의 얼을 자랑하기 위한 유적이나 대단한 영웅호걸의 기상을 기념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면 보존되고 계승될 기회를 얻지 못했던 우리 옛것들이 너무나 많다. 별것 아닌 것, 그냥 동네 사람들이 특이한 일을 하던 곳 정도로 무시하는 바람에 그 내용을 보존·공유하지 못한 채 사라지게 했다. 생각해 보면, 평범한 옛사람들의 정서와 문화를 드러낼 수 있는 곳은 오히려 남해신묘 같은 장소 아니었을까? 이런 부류의 문화가 지금까지 많이, 또 상세하게 남아 있었다면 현대에 그 전통은 크툴루 신화 못지않는 소재로 활용돼 수많은 소설·만화·영화·게임을 낳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나마 다행히 지금 장소가 보전되고, 그 장소가 옛사람들의 믿음이 서린 장소였음을 알리는 건물이 세워져 옛 전설을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