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창간과 신춘문예의 탄생
신춘문예의 시작은 우리 신문의 창간과 맥을 같이 한다. 매일신보가 창간된 것은 1910년이고, 신춘문예가 시행된 것은 1914년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된 것은 1920년이며, 신춘문예가 시행된 것은 1925년과 1928년이다. 경향신문의 경우에는 1906년에 창간됐지만, 어디까지나 종교지로서의 위상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종합일간지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경향신문이 본격적인 종합일간지로 거듭 창간된 해는 1946년이며, 신춘문예의 시행은 그 이듬해인 1947년이다. 한국일보와 중앙일보는 그 창간 연도가 각각 1954년과 1965년이고, 신춘문예의 시행 연도는 1955년과 1966년이다.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를 개명한 서울신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신문이 창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춘문예를 시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신문의 창간과 함께 시작된 신춘문예는 순탄한 과정을 걸어온 것은 아니다. 신문이라는 매체에 의해 제도화된 이상 그것은 또한 신문의 운명과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시대와 해방, 6·25, 군부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각 신문이 휴간과 폐간 그리고 복간을 거듭하면서 여러 해에 걸쳐 신춘문예가 시행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매일신보의 경우에는 1916년~1919년, 1926년~1929년, 1944년, 1945년, 동아일보의 경우에는 1926년, 1928년~1931년, 1937년, 1941년~1954년, 조선일보의 경우에는 1933년, 1936년, 1937년, 1941년~1954년, 경향신문의 경우에는 1948년~1958년, 1960년, 1963년, 1969년, 서울신문은 1957년, 1958년, 1962년에 각각 신춘문예가 시행되지 않았다. 대체로 신춘문예가 새롭게 시작된 해는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사회 체제와 제도가 정비된 1955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춘문예의 대체적인 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1955년 이전, 다시 말하면 1914년부터 신춘문예를 실시해 온 매일신보와 1920년대부터 신춘문예를 실시해 온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제도화된 형식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춘문예 제도의 발생단계와 대체적인 모습에 대한 이해는 이 세 신문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을 통해 볼 때 신춘문예의 발생 기점은 1914년 매일신보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논자들이 그것의 발생을 1925년 동아일보로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다. 먼저 매일신보의 경우 신춘문예라는 용어를 1914년부터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1914년 신년문예모집, 1915년 신년기고모집, 1916년 신년문예모집, 1919년 신년호소재산시모집, 1920년 신춘문예, 1921년 신년문예 등으로 썼다. 1920년에 처음으로 신춘문예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동아일보의 경우는 1925년 시작부터 이미 신춘문예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 후 이 용어가 굳어지면서 신춘문예의 시작을 동아일보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또한 매일신보가 대한매일신보(1904)-매일신보(1910)-서울신문(1945)-대한매일(1998)-서울신문(2004) 등으로 제호가 바뀌면서 단절의 문제가 제기되고, 총독부 기관지로서의 매일신보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감이 작용하면서 우리 문단사에서 잊히게 된다. 아울러 1914년부터 1943년까지 오랜 기간 동안 신춘문예를 시행하고도 제대로 된 문인을 배출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신춘문예라는 제도의 성립과 그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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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의 발생 기점을 1914년 매일신보로 보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신춘문예 제도가 신문이라는 매체를 통해 성립된 근대적인 문학 제도라는 점에서 이러한 인식은 보편타당성을 지닌다. 그뿐 아니라 매일신보의 이 제도는 모집 장르와 형식 면에서 일정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1914년 12월 10일자 매일신보(제이천칠백오십육호)를 보면 삼(三) 면 중앙에 ‘新年文藝募集(신년문예모집)’이라는 공고가 등장한다.
‘新年文藝募集(신년문예모집)’이라는 이 공고문은 근대적인 등단 제도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新年文藝募集(신년문예모집)’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제도는 신년에 시행된다. 이 공고문에서처럼 그것은 12월 10일에 공고해서 12월 20일 마감하고, 그것을 심사해서 ‘신년’(1월 1일)에 발표한다. 여기에서 ‘新年文藝募集(신년문예모집)’라는 용어가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新年文藝募集(신년문예모집)’이라는 이 용어는 이후 ‘新年寄稿募集(신년기고모집)’(1915), ‘新年文藝募集(신년문예모집)’(1916), ‘新年號素材漢詩募集(신년호소재한시모집)(1919)’을 거쳐 1920년에 ‘新春文藝(신춘문예)’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1920년 매일신보의 ‘新春文藝(신춘문예)’라는 용어가 완전히 여기에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매일신보의 경우 이후에도 ‘新年文藝(신년문예)(1921), ‘新年懸賞文藝(신년현상문예)’(1922, 1923, 1924, 1925, 1927) ‘新年號原稿懸賞募集(신년호원고현상모집)’(1926) 등의 용어가 사용되기에 이른다. 이 용어가 어느 정도 고정된 형태를 갖춘 것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신춘문예를 시행하고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난 1930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930년 이후 세 신문사가 공히 ‘新春(신춘)’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한국적 문인 등단 제도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新春文藝(신춘문예)’라는 용어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新春文藝(신춘문예)’가 역사적인 용어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이것은 한국 근·현대문학이 견고한 제도성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도의 견고함 차원에서 보면 신춘문예의 효시가 된 1914년 매일신보의 ‘新年文藝(신년문예)’는 온전한 형식을 갖춘 것이 아니다. 등단 제도의 형식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항목 중의 하나가 모집 장르와 그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種目及課題(종목 및 과제)’에서 ‘종목’과 ‘과제’ 모두 그 형식면에서 근대적인 문학 제도의 특성을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 ‘종목’으로 되어 있는 모집 장르를 보면 ‘詩(시), 文(문), 時調(시조), 언문줄글, 언문풍월, 우슘거리, 歌(창가, 唱歌), 언문편지, 단편쇼셜, 畵(화)’ 등이다.
매일신보의 경우, ‘種目及課題(종목 및 과제)’로 내건 장르 중 ‘詩(시)’는 오늘날의 자유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의 ‘詩(시)’는 한시(漢詩)를 말한다. 오늘날과 같은 자유시를 모집한 것은 1920년이다. 따라서 시의 경우 오늘날과 같은 자유시를 모집한 진정한 신춘문예의 효시는 1920년이라고 할 수 있다. ‘文(문)’은 어린이를 겨냥한 동화적인 이야기를 말하며, ‘언문줄글’은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산문 형태의 글이고, ‘언문풍월’은 운문 형식의 리듬이 있는 짧은 글을 말한다. ‘우슘거리’는 신변잡기적인 재미있는 이야기를, ‘언문편지’는 서간 형식의 글을 그리고 ‘畵(화)’는 전문적인 형식의 그림이 아니라 가벼운 데생 정도의 그림을 의미한다.
1914년에 실시된 매일신보의 신춘문예는 차츰 근대적인 문학 장르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면서 ‘新詩’(자유시)(1921)와 ‘童話(동화)’(1922)와 ‘童謠(동요)’(1924) 등 근대적인 새로운 장르와 용어를 사용하기에 이른다. 매일신보 신춘문예의 제도적인 틀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로 이어진다. 1925년과 1928년에 각각 신춘문예를 처음 시행한 두 신문의 모집 공고를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1924년에 이미 ‘懸賞文藝大募集(현상문예대모집)’을 통해 문인 선발을 시작했던 동아일보의 경우에는 1925년에 ‘新春文藝募集(신춘문예모집)’이라는 이름을 걸고 ‘短篇小說(단편소설), 新詩(신시), 家庭小說(가정소설), 童話(동화), 童謠(동요)’를 모집했으며, 조선일보의 경우에는 1928년에 ‘詩歌(시가), 隨筆(수필), 콘트(콩트), 繪畵(회화), 童話(동화), 童謠(동요), 日記(일기), 自由畵(자유화), 短篇小說(단편소설), 傳說(전설)’을 모집했다. 1914년 매일신보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이 두 신문의 모집 장르가 비교적 근대적인 문학 개념에 근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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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과 같은 신춘문예의 토대를 마련한, 근대적으로 분화된 문학의 틀을 갖추게 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1933년 동아일보 ‘新春文藝懸賞募集(신춘문예현상모집)’ 공고를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해에 동아일보에서 공고한 모집 장르는 ‘文藝評論(문예평론), 短篇小說(단편소설), 戱曲(희곡), 新詩(신시), 時調(시조), 歌謠(가요), 童話(동화), 童謠(동요), 自由畵(자유화), 習字(습자), 作文(작문), 傳說(전설)’ 등이다. ‘歌謠(가요), 自由畵(자유화), 習字(습자), 作文(작문), 傳說(전설)’ 등이 오늘날의 신춘문예 모집 장르와 비교해서 낯설기는 하지만 나머지 장르는 근대적으로 분화된 문학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신춘문예에 ‘文藝評論’(문예평론)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동아일보는 ‘文藝評論(문예평론)’을 이미 1926년부터 모집 장르에 포함해 왔다.
‘文藝評論(문예평론)’이 여타의 다른 장르와 다른 점은 그것이 근대적인 문학 개념 내지 이데올로기를 한층 공고히 수렴하고 논쟁할 수 있는 내적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대적인 문학 개념이 이광수의 「文學이란 何오(문학이란 하오)」(1916), 「朝鮮 文士와 修養(조선 문사와 수양)」(1921), 염상섭의 「個性과 藝術(개성과 예술)」(1922), 「文藝批評家의 態度·其他(문예비평가의 태도·기타)」(1927), 김기진의 「新興文藝의 構圖에 對하여(신흥문예의 구도에 대하여)」(1927), 박영희의 「文藝批評의 形式派와 마르크스主義(문예비평의 형식파와 마르크스주의)」(1927), 김환태의 「藝術의 純粹性(예술과 순수성)」(1934), 김문집의 「言語와 文學 個性(언어의 문학 개성)」(1936), 김기림의 「詩의 方法(시의 방법)」(1932)과 「藝術(예술)에 있어서의 리얼리티ㆍ모럴 問題(문제)」(1933), 「午前의 詩論 Ⅰ·Ⅱ(오후의 시론)」(1935), 「科學으로서의 詩學(과학으로서의 시학)」(1940), 최재서의 「現代 主知主義 文學理論의 建設(현대 주미주의 문학이론의 건설)」, 「批評과 科學(비평과 과학)」(1934) 등의 비평적인 통찰과 논쟁적인 형식을 통해 발전해 왔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근대적인 문학 개념와 제도의 정립에 비평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1914년에서 1928년에 걸쳐 하나의 제도로 성립된 신춘문예는 그 저널성 만큼이나 빠르게 근대적인 문학 제도의 하나로 정착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각 신문사 나름의 전략이 내재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전략은 근대적인 문학 제도의 정립에 일정한 영향을 행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문학, 특히 근대문학에서 대중성의 문제는 신춘문예를 통해 그 의미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점은 우리의 근대문학이 가지는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매일신보 ‘新年文藝募集(신년문예모집)’의 ‘種目及課題(종목 및 과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詩(시), 書(서), 畵(화)’라는 조선시대의 문인의 자격 조건과 등용의 한 양식을 모방 내지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각의 ‘種目(종목)’에 ‘課題(과제)’가 주어지고 있다는 것은 문사(文士)형 지식인을 뽑던 중세적인 과거제도의 무의식적인 잔재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課題(과제)’는 국가가 요구하는 이데올로기 혹은 신문사가 요구하는 이데올로기를 표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種目及課題(종목 및 과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전문적이지 않은 가벼운 언문을 주된 표현 형식으로 향유하고 있는 부녀자 등 일반 대중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매일신보의 ‘新年文藝募集(신년문예모집)’이 드러내는 이러한 점은 대중성 확보를 통해 신문사 홍보와 판매 부수를 높이기 위한 의도가 포함된 저널리즘의 대중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신춘문예를 통한 대중화 전략은 문자 및 인쇄 매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매체 환경과 향유 조건에서 비롯된다. 이런 점에서 신문사의 ‘學藝面(학예면)’은 저널리즘의 대중화 전략에 더없이 좋은 활용의 장이었다. 따라서 각 신문사들은 앞다투어 문예 작품을 모집하고 소개하는 난(매일신보의 ‘부인의 친구’, ‘아헤 차지’, ‘일요부록’, ‘매신문단’, 동아일보의 ‘부인란’, ‘아동란’, ‘소년란’, 조선일보의 ‘학생문예’ 등)을 만들어 그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했고, 신춘문예의 발생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문사의 대중화 전략은 오늘날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당대의 시대적인 상황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있어야 하리라고 본다. 매일신보의 대중화 전략이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확산이다. 이에 비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민족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각각의 신문사들의 의도는 일정 부분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매일신보의 대중화 전략은 이후 당대의 대표적인 문인인 이인직, 조중환, 이해조, 이상협, 이광수, 김동환, 노천명, 모윤숙, 서정주 등을 주요 필진으로 끌어들이면서 문인으로서 이들이 가지는 선각자적인 이미지를 빌려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에 이른다.
이에 반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신춘문예 제도와 학예란을 적극적으로 활성화하기에 이른다. 홍명희 등 당대의 민족주의적인 문인들을 편집장으로 영입하고, 신춘문예 제도를 당대의 의식 있는 문학 청년들의 발표의 장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매일신보와는 차별화된 대중적인 전략을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이들 신문이 추구하는 바가 서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들이 시행한 신춘문예라는 제도가 근대적인 문학 제도를 형성한 것은 사실이다. 매일신보가 비록 반민족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견지한 제국주의적인 신문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근대적인 문학 제도에 영향을 행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세적인 과거제도에서나 볼 수 있는 ‘課題(과제)’의 형식을 답습하고 장르에 대한 인식이 부재한 매일신보의 ‘新年文藝募集(신년문예모집)’ 제도의 원인을 제도 운영 주체의 의식 문제와 함께 근대적 제도로서의 문학에 대한 당대적 의식의 미성숙이라는 상황을 동시에 고려할 때 신춘문예를 둘러싼 근대적인 풍경은 보다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