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순간
초록의 죽음과 부활

  • 결정적 순간
  • 2025년 여름호 (통권 96호)
초록의 죽음과 부활

지난 4월 10일 두봉 주교님께서 96세 일기로 선종하셨다. 그 소식을 나는 산불 피해지 현장에서 피해 실태를 조사하다가 들었다. 3월 22일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이 청송과 안동과 영양과 영덕을 넘나들며 남긴 자국은 참으로 말도 안 되게 참혹했다. 다 타서 없어진 숲과 그 숲에서 탈출하다 질식해서 죽은 노루를 보았다. 목줄에 묶인 채 불타 빳빳하게 몸이 굳은 개의 사체도 보았다. 대피하던 길에 화염에 휩싸였다고 하는 전소한 차량의 흔적을 보았다. 그 차에 타고 있던 모두가 화마에 목숨을 잃었다 한다. 믿을 수 없는 광경 앞에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통신선의 복구가 덜 된 안동시 남선면 어느 마을에서 전화를 받았다. 통화 음성이 뚝뚝 끊기는 중에도 두 단어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두봉 주교”, “위독”. 그로부터 몇 시간 후에 부고를 접했다. 내 앞에 펼쳐진 산불 피해지 풍경처럼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불과 보름 전에 찾아뵈었을 때만 해도 주교님은 무척 생기가 넘치셨기 때문이다.

2023년 가을부터 매달 주교님을 만났다. 안동교구청에서 발행하는 《가톨릭 주보》에 내 가톨릭 세례명을 건 「플로라의 초록목록」을 연재하던 중에 추가로 교구의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일에도 도움을 줄 수 있겠냐는 교구청의 요청이 있어서였다. ‘안동교구사 편찬’ 업무를 담당하는 신부님과 교구청 연구원 한 분과 나는 주교님 댁을 방문해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주교님의 이야기를 듣고 받아 적었다.

두봉 주교님은 프랑스 사람이다. 1954년, 스물다섯에 한국에 왔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에 속해 있던 경상북도 북부 지역 11개 시와 군이 안동교구로 새롭게 설정되면서 1969년 5월 초대 주교가 되셨다. 그러니 주교님의 경북 북부 지역에서의 삶은 곧 안동교구의 역사이기도 했다. TV에서 이미 본 적이 있거나 인터뷰 기사를 통해 읽은 내용도 주교님께 직접 들으니 매번 새로웠다. 그간 어디서도 꺼내지 않은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우리 아버지는 농부였어요. 꽃 농사를 지었어요. 말하자면 원예사였지요. 아버지는 배를 타고 영국에 가서 원예 기술을 배워왔어요. 집은 늘 꽃으로 가득했지요. 하느님의 사랑은 식물에도 공평하게 깃들어 있어요. 아름답죠. 참으로 오묘하죠.”

부끄럽지만 나는 애써 식물을 키우지 않는다. 어떤 식물을 곁에서 보고 싶으면 그 식물이 사는 자리를 내가 찾아가면 되니까. 한편으로는 다른 속내도 있다. 내 개인 공간에 나 아닌 생명체를 들일 엄두가 안 나는 마음. 그런데 이제는 식물 하나가 내 방에 산다. 주교님을 찾아뵌 지 한 해가 흐른 초가을이었을 것이다. 주교님 댁 창이 큰 거실에 한낮의 볕이 쏟아져 들어오던 날이었다. 주교님은 당신이 키우던 호야 화분을 거의 맡기다시피 내게 안겨 주셨다.

경북 의성군 봉양면 ‘두봉 천주교회’가 문패로 적힌 집에서 주교님은 혼자 사셨다. 가톨릭 신자이건 아니건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집이었다. 뇌경색으로 쓰러지던 날에도 당신을 찾아온 이들과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고 들었다. 대화를 이어가다 돌연 의식을 잃은 주교님은 급히 안동병원으로 옮겨졌고 응급 수술을 받았으며 다행히 호전되셨다 한다. 당시 간호를 맡은 신부님이 전한 그 이후 상황은 이렇다.

“주교님 상태가 좋아져서 중환자실을 벗어나 일반 병실로 자리를 옮겼어요. 대화할 수 있었고, 당장 잡힌 일정도 조정하셨죠. 돌이켜 보면 안간힘으로 마지막 정리를 하신 거구나 싶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호흡이 가빠지셨으니까요. 숨을 밭게 쉬시며 예감하신 듯 제게 고해성사를 청하셨어요. 고해를 다 보시고는 감사하다고, 그 모든 것에 정말 깊이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하시며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어 보이셨어요. 이내 평온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선종을 맞이하셨습니다.”

4월 14일 열린 장례미사에서 주교님 생전에 녹음한 음성이 흘렀다. 나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돌아가신 날로부터 딱 1년 전, 2024년 4월 10일 주교님 댁 거실에서 나눈 대화구나. 내가 죽음에 대해 여쭈었는데 주교님은 사랑에 대해 대답하셨다.

“묘한 것이 뭐냐 하면 낮은 사랑은 낮은 행복하고 연결돼요. 말하자면 아주 낮게 사랑하면 낮게 행복해요. 더 높은 사랑에는 더 높은 행복이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최고 사랑에 분명 최고의 행복이 있을 것이 아니겠어요? 내가 최고 사랑을 안다면, 남들에게 최고 행복을 알려주게 될 것 아닌가. 내가 신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입니다. 살다 보니 정말 그랬어요. 내가 다른 무엇도 아닌 신부가 된 것은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한국에 온 지가 올해로 70년이에요. 그동안 그래도 사랑했고, 행복했다. 언제 세상을 떠날진 몰라도, 이제 얼마 안 남았을 거예요. 그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장례미사가 끝날 무렵 비가 내렸다. 가시는 길도 참 주교님답다고 생각했다. 산불 걱정은 잠시 내려놓으라고, 농민들 농사에 보탬이 되라고 뿌리는 봄비. 나는 벅차도록 슬펐고, 길게 이어지는 운구 행렬 속에서 우산을 펼칠 생각도 못 한 채 아이처럼 엉엉 오래 울었다.

초록빛 호야와 동거를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내가 일하는 백두대간수목원에 주교님께서 다녀가신 적이 있다. 수목원을 다 둘러보고 나서 주교님은 말씀하셨다. “플로라가 맡은 일이야말로 일종의 성소(聖召)입니다. 그 거룩하고 특별한 은총을 씩씩하게 잘 지켜나가세요.”

사라져가는 식물을 지키고 훼손된 숲을 되살리기 위해 지금 당장 내 앞에 떨어진 일을 해내다가 문득 눈앞이 캄캄해질 때, 주교님이 해주신 그 말씀을 떠올리며 나는 각오를 다시 한다.

호야의 평균 수명은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다. 사람이 죽이지 않는다면 화분 안에서 사람보다 오래 살 수 있다. 두봉 주교님은 가셨지만 나에게 온 호야는 자신의 품을 조금씩 더 늘일 것이다. 앞으로 오래도록 그럴 것이다.

 

 

필자와 동거 중인 초록빛 호야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식물분류학자, 1986년생
저서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숲을 읽는 사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