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삶이 힘들 때 꺼내 보곤 하는 아빠의 엽서

- 나의 아버지 정채봉

  • 나의 아버지
  • 2025년 여름호 (통권 96호)
삶이 힘들 때 꺼내 보곤 하는 아빠의 엽서

- 나의 아버지 정채봉

정채봉(1946~2001)

동화작가이자 교육자. 전남 순천 출생. 서정적이고 간결한 문장을 통해 『물에서 나온 새』 『오세암』 등을 비롯하여 많은 대표작을 집필했으며, 사람과 사물을 응시하는 따뜻한 시선으로 현대인들의 동심을 일깨운 작가로 평가받는다. 1983년 대한민국문학상, 1986년 새싹문학상, 1989년 한국불교아동문학상, 1991 동국문학상, 1990 세종아동문학상, 2000 소천아동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대산문화재단에서 아버지에 대한 원고 청탁이 들어왔을 때 뇌리에 많은 생각이 스쳤다. 내가 올해 고3 수험생과 아직도 사춘기가 진행 중인 고1 학생,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부쩍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아버지는 자신을 부를 때 ‘아버지’ 말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셨다. ‘아빠’라는 단어가 더욱 친근감 있고 훨씬 마음에 든다고.

아빠는 내가 태어났을 때, 세상에서 유리처럼 맑고 깨끗하게 살라는 뜻으로 이름을 ‘유리’라고 지어주셨다. 그러나 연로하신 집안의 어르신들이 결사적으로 집안의 장손 이름을 어찌 ‘유리’라고 짓느냐고, 와장창 유리가 깨지면 어떡하냐며 족보에 올리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셨다고 한다. 아빠는 다시 고심하다 “남매가 힘을 합하면 언제고 ‘승리’할 것이다”라며 우리 오누이에게 앞 글자를 따서 ‘승태와 리태’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아빠의 첫 동화집 『물에서 나온 새』를 보면 책의 첫 장 제목은 ‘제비꽃’이다. 여기에 ‘승태’라는 주인공이 나온다. 나는 예전에 아버지께 왜 주인공을 ‘승태’로 하셨냐고 여쭤본 적이 있었다. 당시 아빠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니, 아빠의 첫 동화 주인공을 승태라고 정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가슴이 절로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빠는 가장으로서도 정말 최선을 다해 쉬지 않고 일을 하셨다. 회사 생활은 물론이고, 집에서도 밤새워 글을 쓰셨다. 제대로 안 써지면 많이 괴로워하며 힘들게 원고를 쓰셨던 적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빠의 이름이 대중에게 잘 알려진 것은 방송과 언론에 나오면서부터다. 아빠의 인내와 노력 덕에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타이틀이 붙으면서 굉장히 바빠지셨고, 밤늦게 들어온 적도 많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광화문에 자리한 교보문고에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가서 책의 동향을 파악하고, 일주일에 적어도 다섯 권 이상의 책을 꼭 읽으신 것으로 기억한다. 아빠는 일상에서 늘 꼼꼼히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고, 책 읽는 속도도 엄청 빠르셨다. 자식들에게 일기를 매일 쓰고 틈틈이 메모하고 특히 꽃과 나무에 대한 이름에 관심을 가져보라고 말씀하셨다. 책도 수필과 같은 쉬운 것부터 보기 시작해서 『빨간 머리 앤』·『삼국지』·『태백산맥』 등 장편소설을 읽어 보아야 독서의 참맛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세상 변화에 굉장히 민감하셔서 병세가 악화해 혼수상태가 되기 전까지도 매일 아침 신문을 읽으셨다.

  아버지 정채봉 작가(왼쪽)와 필자

되돌아보면, 아빠의 사랑을 가장 많이 느낀 건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건장한 대한민국 남자라면 꼭 가야 하는 군대가, 처음에는 낯설고 힘들고 어려웠다. 좋은 선임병들이 많아서 나중에는 큰 도움을 받았고, 따뜻한 군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평소 지독한 콧물 비염 증세가 있어 고생하던 내게 아버지는 약과 함께 초콜릿을 약처럼 포장해서 보내 주셨다. 내게는 보약과도 같은 초콜릿은 너무나도 맛있는, 그야말로 천국의 맛이었다. 아빠는 내게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엽서를 보내주셨고, 분기마다 면회를 오셨다. 아빠의 엽서는 지금도 삶이 힘들 때 꺼내 보곤 하는, 용기와 힘을 얻는 나의 소중한 보물이다.

제대하기 2개월 전 아빠는 간암을 진단받으셨다. 대수술을 받아 완치되셨지만, 다시 암이 재발해 병이 악화하면서 결국 머나먼 길을 떠나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신은 아빠에게 세상의 일을 정리하라고 수술 후 1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주신 것이었다.

아빠가 혼수상태가 되기 전, 아빠에 대한 ‘어두운 기억의 저편’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이야기였지만,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빠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아빠는 가만히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람이 태어나서 죄를 짓지 말고 살아야 하는데 미안하다.”

 

필자가 군대에 있을 때 아버지가 보내준 엽서

 

그렇게 사과의 말씀을 하시고선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일러 주셨다. 또 “앞으로 가장이 되면, 집안일과 아빠와 관련된 일은 엄마와 항상 상의해 처리해라!”라고 말씀하셨다. 더불어 술과 여자를 조심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질 것. 앞으로 10년 동안은 나 자신 이외에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다. 끝으로 가족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고, 현재 병원에서 하는 의료행위를 멈추라고 말씀하셨다. 살아날 가망이 없으면 미련 없이 삶을 정리하고 죽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아빠의 과감한 행동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곰곰이 그 시절로 되돌아가서 아빠의 말씀을 떠올려 보면 아빠의 모든 말과 행동이 맞았다. 아빠는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내 뒤에서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빠, 존경하고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정승태
정채봉 작가의 장남, 1976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