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인터뷰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무는 그 이름, 장국영

- 다시 만난 장국영과의 가슴 먹먹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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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여름호 (통권 96호)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무는 그 이름, 장국영

- 다시 만난 장국영과의 가슴 먹먹한 인터뷰

장국영(張國榮, Leslie Cheung, 장궈룽, 1956.09.12.~2003.04.01.)

홍콩의 영화배우 겸 가수. 1977년 ATV 아시아 뮤직 페스티벌에서 2위를 하며 가수로 데뷔했다. 1980~90년대 홍콩 영화 전성기의 대표 배우이자 가수이다.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홍콩 스타로, 그가 떠나고 2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많은 팬들이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고 있다. 생전 총 63편의 영화(카메오 출연 포함)와 19편의 드라마에 참여했고, 30장의 음반을 발매했다. 대표작으로 <영웅본색>(1986)·<천녀유혼>(1987)·<아비정전>(1990)·<패왕별희>(1993)·<해피투게더>(1997) 등이 있으며, 앨범 <총애(寵愛)>(1995)는 국내에서만 5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국내 중화권 앨범의 판매 기록을 경신했다. 투유 초콜릿 CF(1989)가 선풍적 인기를 끌기도 했다. 꺼거[哥哥, 형/오빠]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장국영은 나의 우상이었다. 사춘기보다 덕질에 먼저 눈을 뜬 나는 여느 여중생이 그렇듯 자타공인 ‘장국영 부인’으로 그의 흔적을 열정적으로 쫓았다. 내한한 장국영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통역사가 부러워 중국어를 공부했고, 언젠가 그의 통역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꿈은 아쉽게도 기약 없는 바람이 되었지만, 그 덕에 중어중문학을 전공하고 중국어로 밥벌이하고 있다. 2003년 그가 떠나고 22년이 지난 현재에도, 장국영은 여전히 우리의 곁에 머물고 있다. 여전히 스크린에 오르는 그의 영화를 보고, 새롭게 소개되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어쩌면 그는 한 번도 우리의 곁을 떠난 적이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크린 속 그의 앳된 얼굴에서 이제는 노년이 되었을 그의 얼굴을 상상하며 그와의 가슴 먹먹한 인터뷰를 진행한다.

 

오유정 꺼거가 어딘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은둔의 삶을 즐기고 있을 거란 상상을 하고는 했어요. 가끔 SNS에 닮은 사람이 목격됐다는 소식이 들릴 때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기도 했고요. 언젠가 꺼거를 닮은 한 버스기사가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지요. 그랬는데 정말 22년 만에 다시 뵙게 되었네요. 살짝 눈물이 나려고 해요.

 

장국영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이렇게 잊지 않고 기억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저를 기억해주는 팬들 덕에 다시 여러분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네요. 그곳에서도 항상 팬들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장국영은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여러분, 팬들 덕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매년 4월과 9월이면 여전히 저를 위한 다양한 추모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오유정

맞아요. 지금도 매년 봄과 가을이 시작될 즈음이면 중국·홍콩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정말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어요. <패왕별희>·<아비정전>·<영웅본색>·<해피투게더> 같은 꺼거의 대표작들이 다시 스크린에 걸리기도 하고, 미발표곡이나 재편집 곡이 세상에 소개되기도 해요. 그러고 보니 올해에는 완전 초기작 <열화청춘>(1982)이 처음으로 한국에서 개봉되기도 했어요. 팬들이 직접 주최한 영상회나 음악회를 통해 꺼거의 작품을 감상하기도 하죠. 10주기, 20주기 때에는 굵직한 콘서트나 영화제,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고요. 사실 꺼거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위한 활동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웃음).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은 사랑을 보내줄 수 있는지, 정말 감사할 따름이네요. 생각해 보면 지금껏 제가 기억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저의 작품을 소환하고 저를 세상에 소개해 준 덕분이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오래전에 여러분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 거예요. 그래도 수십 년이 지난 영화와 노래가 여전히 여러분의 공감을 끌어내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네요.

 

명작(名作)의 가치는 영원하니까요! <아비정전>·<영웅본색>·<패왕별희> 같은 작품들은 지금 작품들과 비교해도 스토리나 구성이 전혀 뒤처지지 않는걸요. 화면만 살짝 촌스러운 정도? 하하. 꺼거의 콘서트 무대는 다시 봐도 전위적이고요. 그래도 워낙 많은 것을 남겨 주셔서, 다양한 필모그래피와 디스코그래피 덕에 영화든 음악이든 팬들은 늘 새로운 느낌으로 즐길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때 홍콩 영화계는 다작(多作)이 당연한 분위기였지요. 일 년에도 몇 편씩 영화를 찍었으니까요. 그래도 저 나름으로는 장르도, 캐릭터도 다양한 작품을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음반이나 콘서트에서도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싶었죠. 아마 그 덕에 여러분이 조금은 덜 질리고, 오래도록 저를 사랑해 주는 것 같네요.

 

사실 저 같은 홍콩 영화 마니아들은 홍콩 영화가 주는 그 정취에 가슴 설레하고, 감동을 하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영화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요.

 

그 시절이 홍콩 영화, 홍콩 음악의 황금기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홍콩 영화만이 가진 특유의 장르와 정서가 살아있는, 골라 보는 재미가 가득한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시기라고 할까요? 여러분이 좋아하는 <영웅본색>이나 <첩혈쌍웅>(1989) 같은 가슴이 웅장해지는 누아르부터 <황비홍> 시리즈나, <소오강호>(1990), <소오강호2: 동방불패>(1992) 등 전통 무협물, <가유희사>(1992) 같은 홍콩 특유의 코믹 신년물, 그리고 은유와 미장센의 대가 왕가위 감독 작품이나 관금붕 감독의 예술 영화, 성룡의 액션물, 주성치의 코믹물 등 정말 다채롭고 다양한 영화가 공존하던 시기였어요. 하지만 너무 많이 소비해 버렸죠. 지나치게 상업적이었고 아류작이 넘쳐나는 것을 막지 못했어요. 우리 스스로 지키지 못한 것이지요. 물론 당시 시대적 상황도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홍콩 반환을 앞두고 많은 이들이 불확실한 미래에 두려움을 느꼈으니까요. 결국 그렇게 짧은 전성기가 끝나버렸어요.

 

그 시절의 홍콩 영화, 아마도 짧았기에 더욱 오래도록 진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이번에 논문을 쓰면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한국 팬들은 꺼거의 대표작을 <아비정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영웅본색>을 꼽는대요.

 

한국에서 <영웅본색>이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은 잘 알고 있어요. 저보다는 주윤발 형님이 더 사랑받았던 것도 알고요. 하하. 농담이고요(웃음). <천녀유혼>과 함께 제 영화 인생에 전환점이 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요. <아비정전>은 저에게도 꽤 의미 있는 영화이지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홍콩 금상장 남우주연상을 선사한 작품이고, 왕가위 감독과의 악연(웃음)이 시작된 영화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아비정전> 속 ‘쉬자이’는 저 자신과 정말 많이 닮았다고 생각해요. 한국 팬들이 정확하게 본 거죠. 그래도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꼭 멋지고 매력적인 미남자나 버림받은 외로운 영혼의 역할에만 얽매이고 싶지 않았지요. 그래서 실패한 증권 매니저(<유성어(流星語)>(1999)), 살인에 매료된 미치광이 사수(射手)(<창왕(槍王), 스피드 4초>(2000)), 귀신을 보는 정신과 의사(<이도공간>(2002)) 등 다양한 역할을 시도했죠. 장국영의 이미지를 정해진 틀에 가두고 싶지 않았어요. 어때요, 성공적인가요?

 

꺼거의 넓은 스펙트럼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럼에도 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했던 모습에서 장국영의 가치가 더 높이 평가되는 것 아닐까요? 사실 저는 꺼거의 그런 생각은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장국영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영화 속 캐릭터도 다른 누구도 아닌 장국영이 연기한 것이지만, 콘서트 무대에서만큼은 장국영다운 모습 그 자체였다고 할까요? 2000년 “热·情(열·정)” 콘서트는 정말 꺼거의 예술성이 정점에 이른 무대였다고 생각해요.

 

배우와 가수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건 없어요. 각기 다른 매력이 있지요. 그래도 무대 위에서만큼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보여줄 수 있었어요. 영화 속 캐릭터가 결국 감독의 창조물이라면, 무대 위 장국영은 정말 장국영 나 자신일 수 있었죠. 그래서 곡 작업에도, 무대 연출에도 관심을 가지곤 했어요. 같은 맥락에서 내가 감독한 내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온전히 나의 색깔이 담긴 나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요.

 

감독 장국영을 만나지 못한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에요. 영화 제목이 <투심(偷心)>이었지요? 그때 한국 배우 캐스팅도 적극적으로 고려했다고 들었어요. 지금의 K-컬처가 그 시절 홍콩 영화, 음악 이상으로 사랑받고 있는데, 역시 타고난 안목으로 시대를 앞서가셨네요.

당시 한국 문화의 저력을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아쉽게도 캐스팅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한국의 배우, 가수들과 협업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요. 실제로 <신 상해탄>(1996)에서 정우성 배우와 함께 작업하기도 했고요. 지금은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봉준호 감독이나 양자경·양조위 배우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K-팝 스타가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국적도, 인종도, 언어도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양자경·양조위 배우가 할리우드에 진출해서 사랑받고 큰 상을 받는 것을 보면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솔직하게는 너무 질투가 나요. 만약 꺼거가 있었다면 누구보다 먼저 저 자리에 섰을 텐데 생각하면서요. 저 참 못났지요(웃음)?

 

그 당시만 해도 동양의 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었어요. 야쿠자나 악역이 전부였지요. 그렇게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홍콩 영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시간이 흘러 그런 편견이 사라진 것은 정말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해요. 내 친구 양조위나 양자경이 이룬 성취는 그래서 더욱 중요하죠. 너무 축하할 일이에요. 앞으로 더 많은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사실 저도 그렇지만, 꺼거 팬들은 꼭 특정 영화나 노래로만 꺼거를 기억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장국영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죠. 꺼거의 많은 선행이 회자하고, 꺼거의 가치관이 재조명되고 있어요. 이번에 보니 중국 팬들은 특히 꺼거 추모 행사를 다양한 자선 행사와 연계해서 진행하는 것 같더라고요. 대단한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꺼거 팬 중에는 정말 잘 자란 분들도 많은 것 같아요. 학계에도, 문화계에도, 산업계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필자의 저서 『아무튼, 장국영』

분야에서 자기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종종 뜻하지 않은, 반가운 만남이 생기기도 해요.

 

우리 오 선생님만 해도 제 통역사가 되려고 중국어를 공부하다가 교수까지 되었잖아요(웃음)?

 

중문과 출신 선생님 중에는 꺼거 팬이 아니었던 분이 거의 없을걸요(웃음)? 그만큼 장국영의 영향력이 대단하더라고요. 저는 그중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고요. 하하. 꼭 어떤 특별한 일을 하는 누군가가 아니더라도, 평범한 일상 속 팬들 모두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참 성실히, 열심히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팬은 스타의 얼굴이라 더 열심히, 잘 살아야 한다면서요. 하나같이 완벽주의자 꺼거를 닮아서 그런가 봐요.

 

우리 팬들 어찌나 기특하고 고마운지. 혹시나 저의 선택이 여러분에게 안 좋은 기억이 될까 내심 걱정이 많았는데, 그런 걱정이 미안할 만큼 잘 자라줘서 정말 고마워요. 괜히 제가 다 어깨가 으쓱해지네요. 인간 장국영이라고 했지만, 사실 저도 한때는 꽤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고 말썽도 많이 피웠지요. 언론의 불합리한 보도, 편향된 시선에 힘들어하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아요. 그런 시선에 신경쓰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소중한 사람들을 더 아끼고 내가 하고 싶은 영화와 노래를 하고 나답게 사는 거죠. 나는 나이니까요.

 

“I am what I am, 我永远都爱这样的我 (나는 영원히 이런 나를 사랑할 거야).”(장국영이 작사한 노래 <나(我)>의 가사 첫 소절) 그 말이 지금까지도 참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것 같아요. 특히 ‘후영미’(後榮迷, 장국영이 사망한 이후 그를 좋아하게 된 팬)들은 꺼거의 이 메시지에서 많은 위안과 위로를 받았다고 입을 모아요.

 

정말 어린 팬들이 그렇게 많이 있나요? 여러분이야 제가 활동하던 시기를 함께 살아온 팬들이지만, 이 어린 친구들은 어떻게 저를 알고 또 저를 좋아하게 되었을까요? ‘후영미’라는 명칭까지 있다니 분명 적지 않은 규모인 것 같긴 한데, 참 고마우면서도 신기하네요.

 

저도 그 부분이 신기해서 ‘후영미’를 만나면 도대체 잘 알지도 못하는 장국영의 어디가 좋은지 물어보곤 했어요. 그러다가 한번은 “왜 동시대도 아닌 스타를 좋아하는지 늘 묻는 거죠? 지금은 인터넷, 인터넷, 인터넷 시대잖아요! 왜 좋아하냐고요? 매력적이니까요!”라는 한 팬의 댓글을 보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어요. 어찌나 머쓱하던지(웃음). 다양한 미디어가 발달한 덕도 있겠지만, 최근 재개봉한 영화들이 새로운 팬들이 유입되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해피투게더>나 <패왕별희> 재개봉 이후 ‘후영미’들이 급격히 늘어난 느낌이에요. 처음에는 꺼거의 잘생긴 외모와 연기에 반했다가, 인간 장국영의 가치관과 각종 미담을 알아가면서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 것이지요.

 

우문현답이네요(웃음). 지금은 언제라도 지난 시절의 영상과 음악을 재생하고 심지어 새롭게 재생산할 수도 있는 시기인데 말이죠. 지금까지도 제 생각을 이해해 주고 기억해 주는 팬들이 많다니, 장국영 그래도 잘 살았던 것 같네요. 열심히 일한 그때의 나, 칭찬해야겠어요.

 

네, 정말 칭찬합니다.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많은 것을 남겨주어서, 이렇게 우리의 삶 가까이 남아있어 주어서 고마워요. 짧은 기간일지라도 끊이지 않고 전해오는 꺼거 영화의 스크린 개봉 소식에, 미발표곡이든 재편집 곡이든 간간이 들려오는 새로운 앨범 발매 소식에 여전히 꺼거가 우리 곁에서 건재하다고 느껴요. 그리고 좋은 사람이어서 감사해요. 저는 사람의 진짜 가치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하거든요. 남의 뒷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꺼거에 관해서 만큼은 다른 이야기를 해요. 의연하게 최고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늘 배려심 넘치고, 사람을 사랑하고, 매너 좋은 우아한 사람이었다고. 그런 사람의 팬이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런 스타의 팬일 수 있게 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처음에도 이야기했지만, 여러분이 있어서 제가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때의 장국영도, 지금의 장국영도 팬과 함께 성장했고, 그래서 존재할 수 있었지요. 여러분의 한결같은 사랑이 없었다면, 저는 이미 오래전에 잊혔을 거예요. 여러분의 곁에서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며 함께 나이 들어갈 수 있었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언제고 다 같이 모여 허물없이 이야기 나누는 ‘디너쇼’라도 할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여러분의 마음속에 남아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영원히 늙지 않는 아이돌로 기억되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요(웃음)? 정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오유정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저서 『아무튼, 장국영』, 논문 「후(後) 장국영 시대 팬덤의 정체성과 사회문화적 함의」 「빅데이터 기반 장국영 한·중 팬덤 인식 비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