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공이 우물에서 항아리로 물을 긷고 있는 한 노인에게 기계(두레박)의 사용을 권하자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기계를 사용하는 자는 반드시 그 기계에 의존하게 되고, 그렇게 기계에 복속된 자는 기심(機心)을 가지게 되오. 마음속에 기심을 가진 자는 순수한 마음을 잃게 되어 신성(神性)이 불안정해지기에, 결국 도를 얻지 못하는 법이라오.”
- 『장자』, <천지 11>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물음 중 하나는 “무엇이 진화하는가?”라는 물음이다. 개체인가, 종인가, 아니면 개체군인가, 유전자인가? 어느 경우를 취하든, 그러한 대답은 어떤 자연적 실체를 특정한 외연에 따라 분절한 결과를 전제한 것이다. 이런 방식들과는 크게 다른 방식을 취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는 진화를 주체성의 진화로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서 주체성은 특정한 실체가 아니라 진화의 거대한 흐름에서 나타난 어떤 굵직한 경향에 붙은 이름일 뿐이다. 진화 전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곧 주체성의 진화라는 이 흐름이다.
주체성의 진화는 동그란 구와도 같은 세계에서 어떤 부분이 조금씩 불거져 나오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거대한 도약이 세계 전체를 달걀 - 존재론적 달걀 - 과 같은 모양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 불거져 나온 부분이 곧 작위의 차원이다. 그것은 더 이상 ‘진화’의 차원이 아니라 ‘진보’의 차원이다. 이 차원은 더 이상 생물학적 주체성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주체성 차원이다. 그렇다면 이 차원, 작위의 차원이 불러온 불연속성은 어떻게 이해되고 평가되어야 하는가?
이런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장자의 물음은 근본적이다.1)
그렇다면 과연 도 자체에 이런 퇴락[成與虧(성여휴)]이 내재해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도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할까?
- 「제물론 4」
작위란 도의 이지러짐이다. 도 자체는 본래 완벽한 구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이지러짐이 생겨나 작위/문명이 발생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이런 이지러짐의 가능성은 도 자체에 내재해 있었던 것인가?
도 바깥을 생각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가능성 자체도 도에 본래 내재해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위의 차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장자는 계속해서 말한다.
‘도’ 자체에 이지러짐이 내재해 있기에, 소문(昭文)이 거문고를 뜯는 것과 같은 문화가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도에 이지러짐이 내재해 있지 않았다면, 이런 문화적 성취 같은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 하나 이들[소문 등]의 편애는 본래의 도와는 같지 않은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장자의 사유는 흔히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과는 결을 달리한다. 장자는 작위를, 문명/문화의 성취를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작위에 집착할 때, 더욱이 작위의 어느 한 부분일 뿐인 것에 집착할 때, 그리고 작위일 뿐인 것을 본래의 도로 생각할 때 생겨난다.
이 관점을 염두에 두고서 물음을 던져 보자. 작위/주체성의 차원이 진보의 차원이라 할 때, 문제의 핵심은 이 진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물음을 지금 우리의 맥락으로 좁혀 제기한다면, 기술의 발달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기술의 발달을 그대로 진보로 간주할 때 기술 중심주의가 성립한다. 이는 곧 작위, 특히 기술로서의 작위를 단순히 긍정하는 관점이며, 달걀의 작은 부분이 한없이 커질 때 도래할 사태에 둔감한 관점이다.
나는 한 과학잡지에서 인간의 수명 연장을 다룬 글들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기고한 과학자들이 오로지 생명 연장의 기술적 가능성만을 논하고 있음을 보고 놀랐다. 이들의 논의에서는 생물학적 질서의 동요가 인간의 실존에 미칠 영향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그만두고라도, 그러한 변화가 초래할 사회적 혼란에 대한 관심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노인들은 늘어나고 아이들은 줄어가는 현실에서, 수명을 자꾸 늘리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런 맹목적인 기술주의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존재론적 원리는 역운(逆運)이다.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을 개발하면 그 개발된 기술은 더 큰 운명을 도래시킨다. 역운이 동반하는 아이러니는 운명의 극복이 잉여적일 경우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빨라야 한다”라는 과잉된 욕망은 자동차 등의 교통수단들을 도래시켰고, 오늘날 하루에 수천 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있다. 전자 매체들의 발달로 한국인 10명 중 6명이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고 한다. 양자컴퓨터가 완성되어 실용화될 때 그것이 불러올 후유증은 상상을 불허할 것이다. 기술이 진정한 필요,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에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에 봉사하는 하수인으로 머물 때, 기술 중심주의는 우리는 멸망으로 몰고 가는 폭주 열차일 뿐이다.
그러나 장자에게서 보았듯이, 사실 인간에게 기술은 불가결한 것이다. ‘성여휴(成與虧)’는 도 자체에 깃들어 있는 성격이기에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본성이 ‘자기차이화’이고 그 인간적 판본이 ‘욕망’이기에 시간의 흐름에서의 열려-감은 생명과 인간의 근본 경향이다. 기술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경향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도 같다. 기술의 의미는 긍정이나 부정을 넘어 보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런 수준의 파악을 보여주는 경우로서 하이데거의 기술론을 들 수 있다. 하이데거가 보는 서구의 역사는 퇴행(‘존재 망각’)의 역사이며, 그 극한에서 기술론이 등장한다. 하이데거는 플라톤 이전에는 세계가 ‘퓌지스’로서, 존재와 인간 공속성의 장에서 밝혀져-드러나는 현존(Anwesen)으로서 이해되었다고 본다. 플라톤 이래 존재/퓌지스는 ‘대상’으로서 ‘표상’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퓌지스’로부터 ‘나투라’로의 이행을 통해 이런 존재 망각은 더욱 심해지게 된다.2) 그러나 결정적으로, 데카르트에서 시작해 니체에게서 절정에 이르는 서구 근대 철학이야말로 존재 망각사의 정점을 이룬다. 하이데거는 서구 근대 철학이 존재하는 것을 주체에게서 표상되는 것과 동일시함으로써 세계를 인간화하는 길을 밟았다고 진단한다. 그는 데카르트에게서의 ‘앎에의 의지’는 서구 근대 철학을 줄곧 관류해서 마침내 그 귀착점으로서의 니체의 ‘힘에의 의지’에 도달했다고 파악한다. 니체의 철학은 ‘존재’를 ‘힘’으로 전락시킴으로써 근대적 주체 철학을 최고조로 이끈 개념으로서 고발된다.3)
하이데거에 따르면, 니체에게서 절정에 달하는 인간중심주의는 결국 현대인을 허무주의와 기술주의로 몰아넣는다. 하이데거는 고대의 ‘테크네’와 근대 이래의 기술=테크놀로지를 구분한다. 테크네도 테크놀로지도 공히 ‘만듦=작위’이다. 그러나 테크네가 자연으로부터 그것이 허락하는 것을 이끌어내는 것[Hervorbringen]이라면, 테크놀로지는 자연을 닦달해서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쥐어짜-내는 것[Herausfordern]이다. 전자가 고대적인 ‘포이에시스’의 행위라면, 후자는 근대적인 조작(‘오퍼레이션’)의 행위이다. 기술의 몰아-세움은 자연을 기진맥진할 정도로 채굴하고 가공하는 것이며, 그 산물을 축적하거나 폐기하는 것, 그리고 상품화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몰아-세움4)에는 큰 위험이 따른다는 점을 경고하거니와, 그가 가리키는 위험은 원자폭탄 같은 구체적 기계 자체에 있기보다 차라리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써 세계를 철저히 지배하려 하고 있고 또 그 점에 대해 낙관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하이데거는 이런 근현대 기술에 대한, 넓게 보면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발본적 비판에 따라 존재 사유에로의 전향을 역설한다.
기술을 바라보는 하이데거의 관점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하이데거가 그리는 근현대의 기술은 인간의 자연 정복과 힘에의 의지라는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기술 발달이 인간적 삶의 절박함이 요구하는 필연적인 것이라는 사실에는 둔감하다. 생명체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차이 생성을 소화해내고 스스로의 동일성을 바꾸어야만, 즉 자기차이화를 행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지능을 가지고서 생존해 가는 인간에게 기술은 절박한 필요의 문제이지 잉여적인 문제가 아니다. 하이데거는 기술의 능동적 측면을 부각시키지만, 실제 기술의 발달은 인간적 삶의 수동성이 요청하는 상황인 것이다. 다만,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일어나는 일이지만 기술은 과잉될 수 있다. 하이데거의 논의가 의미를 가지게 되는 곳은 바로 이런 과잉 기술이 등장하는 맥락에서이다. 확실히 우리는 과잉 기술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맥락에 초점을 맞추는 한에서도, 기술의 역사에 대한 하이데거의 파악에는 취약점이 있다. 하이데거는 서구 문명에 있어 이끌어-냄으로부터 쥐어짜-냄으로의 이행을 논했지만, 역사에서의 이 이행을 실체적으로 분절해 내는 것은 곤란하다. 소를 몰아서 밭을 가는 것은 우리에게 거의 낭만적이기까지 한 정경으로 다가오지만, 농경 이전의 삶의 양식에서 보면 그것은 동물에 멍에를 메고 쇠로 대지에 생채기를 내는 행위였다. 역으로 100년 후의 사람들이 볼 때 지금의 디지털 기술은 원시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흐름의 각각의 현재에서 과잉 기술의 임계점을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의학이 사람들의 고통을 치유해 주는 것은 필요한 기술이지만, 멀쩡한 신체를 뜯어고치는 의료 ‘상품’을 추구할 때 과잉 기술이 된다. 우주에 대한 호기심과 과학기술 발달을 위해 우주선을 쏘아 올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고통받는 수만 명, 아니 수십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그 또한 과잉 기술이다. 도시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기술들은 좋은 기술들이지만, 자본의 논리에 따라 마구잡이 개발을 하는 것은 과잉 기술이다. 기술은 특정 시대로써 실체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그 발달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관련되는 사람들의 숙의를 통해 과잉 기술의 임계점을 잡아내는 것이다.5)
하이데거의 기술론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여러 글에서 기술론을 펼쳤음에도 기술의 문제점들에 대한 내재적 대안의 제시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가 제시하는 것은 기술에 전적으로 외재적인 길, 존재 사유와 시작(詩作)의 길일 뿐이다. 물론 현대적 삶 전체에서 기술이 내뿜는 독기를 존재 사유와 시작으로 통어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없지 않지만, 기술론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런 외재적 대안만이 아니라 기술 자체에 내재적인 해결책들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장자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작위의 단순한 긍정이나 부정이 아니라, 철학적 달걀 전체를 염두에 둘 것을 강조했다. 작위는 그 자체 자연의 한 갈래 경향의 현실화로서,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작위의 성취가 도 자체와 동일시되거나 도를 벗어나 폭주할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우리는 ‘역운’ 개념을 통해서 이 점을 음미했다. 하이데거는 이끌어-냄과 쥐어짜-냄을 대비시킴으로써 유사한 논지를 전개했다. 그러나 우리는 ‘과잉 기술의 임계점’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그의 논리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1) 이정우, 『파라-독사의 사유』, 그린비, 2022.
2) “이미 플라톤에게서 저 알레테이아[퓌지스라는 진리의 드러남]가 그것의 시원인 근본 경험[존재 현현]으로부터 떨어져 나오지 않았던가? (...) 그것은 실존하는 자로서 서구인이 그 바탕을 잃게 되고 결국 오늘날과 같은 바탕 상실[존재 망각]에 이르게 되는 과정의 출발점인 것이다.”(하이데거,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 이기상 옮김, 까치, 2004, §16)
3) 하이데거는 이런 전락이 그리스적 ‘로고스’가 로마-라틴적 ‘ratio’=지능으로 전락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며, 세계를 표상해서 즉 주체 앞으로 불러-세워서(vor-stellen) 하나의 ‘상(像)’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런 관점은 니체에게서 절정에 달했다고 본다. 세계가 주체 앞에 불러-세워져 상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존재자 안에서 주체가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힘에의 의지’에 입각해 갈수록 강화된다.
4) 하이데거는 인간을 집결시켜 [자연으로부터] 쥐어짜-내자는 요구, 축적을 위한 것으로서의 인적 자산을 수립하자는 요구를 몰아-세움(Ge-stell)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인적 자산’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쥐어짜-냄의 대상으로 삼음을 뜻한다. 보다 상세한 연구로서 이기상,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서광사, 2003)을 참조
5) 과잉 기술의 임계점을 잡아내는 것은 기술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원칙적으로는 사회 전체가 참여해서 논해야 할 중차대한 문제이다. 과학기술자들, 더 넓게 말해 ‘학자들’은 자본과 국가라는 두 힘의 그림자 아래에 있기에, 과잉 기술의 임계점을 논할 때 반드시 자본과 국가 바깥에서 사유하는 사람들, 역사적 전망과 철학적 사유 능력이 있는 ‘사상가’들을 포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