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송재학 선생과의 만남
- 시인 송재학 선생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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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 1955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포항과 금호강 인근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1982년 경북대학교를 졸업한 이래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다. 1986년 계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소월시문학상과 목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검은색』 등이 있다. |
시와 음악과
검은색
송재학 나는 시의 기원에 관심이 많아요. 물론 정확한 기원이라기보다는 그저 짐작만 하는 건데, 몇 년 전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팀이 이라크 샤니다르 동굴에서 발굴한 7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 화석의 현장을 보면, 그들이 망자에게 꽃을 바쳤다는 거예요. 물론 어디서 날아왔을 수도 있죠. 꽃이 네 가지인가 그런데, 나머지는 근처에서 자라지만, 무스카리라는 꽃은 먼 데서 나는 거였죠. 꺾어 와서 뿌렸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저는 그게 서정성의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죽음에 대한 생각, 아니 죽음에 대한 감각이 궁극에서는 서정과 닿아 있다고. 그는 자신의 변함없는 관심사를 꺼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죽음을 처음 인식했던 인류는 하이델베르크인입니다. 그들은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뇌를 파먹었어요. 아마 당시에는 그것이 망자의 기억을 공유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추억을 나눌 수도 있고. 어쩌면 죽음을 공유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서정이라고 불릴 만한 그 마음으로부터 예술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것은 끔찍함이 아니라 놀라움이라고.
시인은 최초로 도시가 세워졌던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지역의 거주 공간에 시신을 매장했던 문화부터 두개골 문화까지 에두르는 이야기와 더불어 죽음을 가까이 두며 그것을 가늠하려는 노력에서부터 시가 시작되었다고 믿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삶과 세계의 불가능성을 상실과 그리움이라는 몸의 실감으로 껴안는 과정 같은 것.
어두운 감정이잖아요. 알 수 없는 깊이를 가진. 이를테면 사냥감을 발견하고 잡았을 때, 그래서 음식을 놓고 둘러앉았을 때 서정적인 감정이 생겨났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그건 그냥 즐거운 거잖아. 하지만 왜 죽는가 하는, 혹은 왜 아프지 하는, 질문에서부터 비로소 ‘인간’의 사유가 생겨났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도구를 잘 쓰기 위해 발달한 이성이 아니라. 저 죽음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장례가, 장식이, 심지어 음악이 시작되었다고 믿어요. 그것은 어둠과 관계가 있죠. 온통 검은색이에요. 우리를 둘러싼 저 밤의 정체처럼.
시인은 여전히 “검은빛은 죽음이 아니다, 비애가 아니다 검은빛은 환하다”(「주전」, 『푸른빛과 싸우다』, 문학과지성사, 1994)고 말하며, 그것이 ‘세계’라고 덧붙인다. 기원으로서의 세계, 아니 기원과 분리되지 않는 세계이자 현재를 구성하는 재료 말이다. 적어도 시인이 말한 ‘밤’은 어쩌면 모두 진저리 칠 때 홀로 기다리는 어떤 자세에 대한 소묘처럼 느껴진다.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긴다는 그에게 어둠과 죽음과 음악은 그 ‘기원’의 파장 안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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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시인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최초의 악기는 피리입니다. 동물의 뼈에 구멍을 내서 숨으로 바람을 불어넣었다는 거죠. 인류가 최초로 그 악기를 불었을 때 무슨 기분이었을지, 그런 생각들이 끝없이 드는 겁니다.
기실 음악은 시인의 시력 전부에 걸쳐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가령 『푸른빛과 싸우다』(문학과지성사, 1994)에 「푸른빛과 싸우다 2-김해선의 가얏고 산조 유성기 음반 복각본」과 「철아쟁」이 연달아 실려 있다. 거기 소리가 공간을 채운다고 쓰지 않고 풍경을 ‘갈아 끼운다’고 쓰고, 다음 시에서 “빛일까 어둠일까 쇠 같은 허공을 긁어대자 어딘가 숨어 있던 울음이 계자난간을 붙들고 몸 안으로 들어와 푸른 방 자주 소반을 만든다 그가 부르짖는 소리가 띠살문 너머 매화처럼 여위는 것도 보인다”라고 쓰며, 소리가 풍경이자 세계 자체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와시표 일츅죠선소리반-가야금 독준 진양됴 안기옥 장고 이흥원」 등등의 시들에서 음악은 이제 ‘신의 부재에 항거한 싸움꾼’ 등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 수동 레버 에스프레소 추출기로 커피를 내리는 시인 |
곧 나올 시집에 「습이거나 스페인」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어요. 촉촉하다 할 때 그 ‘습’. 편집자가 보도 자료를 써야 하는지 제목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데, 곤혹스러웠어요. 아무래도 ‘습’이라는 단어를 두고 여러 의미론적 추측을 할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그냥 ‘습이거나 스페인’이라고 하면, 그 공간이 습지에서 스페인까지 확장이 되죠. 상상력의 공간이라고 해도 좋고, 이미지의 공간이라도 해도 좋습니다. 여하튼 그 개념을 얘기하려고 하면 내가 언어에 천착해 왔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어려웠어요. 사실 나는 그것이 음악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해요. 마치 죽음의 이미지와도 비슷하고요. 부분의 이해와 해석이 아니라 한꺼번에 어떤 전체를 가지고 몰아닥치는 것 말이에요. 이곳과 저곳, 시작과 끝, 삶과 죽음이 하나죠.
정말 삶은 매 순간 난간 같은 걸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 그 자리에 있는 모든 것들을 깨우는 것이 음악이라는 말로 들렸다. 마치 죽음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이런 예는 어떨까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소월의 「첫치마」라는 시를 조수미가 부른 게 있어요. 평안도 지방에서 시집가 처음 부엌에 나갈 때 입는 옷을 ‘첫치마’라고 부릅니다. 시도 시지만 노래도 아주 절묘해요. 조수미의 노래 중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설움이나 서글픔 혹은 그리움 같은 감정이 왈칵 쏟아지는데, 내가 음악에서 그런 걸 찾더라고요. 맹렬하면서 모든 것을 장악하는 어떤 것. 그 순간 음악이 죽음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목을 친 노래”(「가객」)라든가, “노래… 그것은 뒤돌아보면 갈 수 없는 길의 입구”(「노래는 왜 금방 꽃핀 홀아비꽃대를 찾아가는가」, 『푸른빛과 싸우다』)라는 표현 뒤에 “노래에는 어둠을 껴안는 마음이 먼저 보인다”라는 표현이 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음악이 꼭 그의 인식을 구성하는 어떤 틀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한 바로 그 ‘음악’의 속성으로 인해 그의 시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허물어뜨리기 때문이다.
‘매혹’의 자리와
울림의 공간
사실 음악에 대해 묻기 전, 그의 시에 등장하는 수많은 서브 텍스트을 거쳐 가야 한다. 말하자면 “내간체를 얻다”(『내간체를 얻다』, 문학동네, 2011)고 말하거나 “이름 대신 슬프고 아름다운 계면을 얻었다”(「이름 대신 슬프고 아름다운 계면을 얻었다」,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고 말함으로써, 시인은 시의 원인으로부터 자신을 지우곤 한다. 식민지 시대 시인의 언어를 빌려온 『슬프다 풀 끗혜 이슬』(문학과지성사, 2019)도 마찬가지. 그것은 고전과 고고학과 자연과학을 포함해 주변 장르(첫 시집에는 ‘자코메티’ 연작이라 불릴 만한 시들이 있다)를 넘나드는 박학다식에 이유가 있다는 설명으로는 분명 부족하다.
시를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향가를 접하면서입니다. 「제망매가」 같은 것을 보면서 다른 무언가를 느꼈던 것 같아요. 그냥 감정이 아니라 언어와 세계의 차원을 가르는 어떤 것. 역시 이과적인 사람이라서 말하자면 작품과 세계의 ‘구조’를 들여다보곤 했던 거겠죠. 나는 단어의 의미보다는 문장이 환기하는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만일 ‘담배’가 앞에 있다면 그 단어에 휘둘리지 않고 담배가 들어간 문장들을 써보는 거죠. 사실 향가를 읽는 방식도 비슷해요. 소리 나는 대로 읽을 수도 있고 고어로 읽을 수도 있죠. 물론 해석의 영역도 있어요. 나는 그게 다 다른 시처럼 느껴져요. 단어의 차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 생성되는 각자의 울림이 있으니까요.
요컨대, 시인은 시어의 의미보다는 전체적인 이미지가 중요하고, 더불어 그 시들이 만들어내는 세계의 구조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어떤 시가 울림을 주려면 그 안에 애매모호함이 있어야 해요. 울림을 만드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것은 문장의 단위에서만 가능한데, 그에 관한 한 최고의 시인이 백석이 아닐까 합니다. 백석은 서정성이 강하지만 모더니스트잖아요. 그 역시 세계의 구조를 드러내는 서정이 있어요. 백석 시가 가진 울림은 언어와 언어 사이의 이격과 통합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매혹’이라고 부르죠. 이를테면 그러한 공간 단위의 매혹이 제 시가 가닿고 싶은 지점입니다. 물론 그게 정석이라거나 옳다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언어라는 기본 전제 위에 수없이 많은 것들이 뒤섞이는 과정, 그러니까 하이브리드로 무언가가 들어오는 과정 같은 거겠죠.
시인은 그 뒤섞임을 말하면서 역시나 저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아우르며, 내적으로는 영웅 서사 속 욕망의 뒤섞임을 외적으로는 아시리아의 마지막 명군 아슈르바니팔이 융합과 번역을 통해 집대성한 문화의 뒤섞임까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길가메시’의 원래 뜻은 ‘깊은 곳을 본 자’예요. 지금 우리가 사유하는 시의 정의와 다르지 않죠. 그들의 시적 시도는 범상치 않습니다. 지금 봐도 클리셰가 없어요. 주인공이 잘생긴 것도 아니고 사실 좀 나쁜 놈이죠. 그러니까 선함도 미학도 단순하게 제시하지 않아요. 삶과 존재의 이쪽과 저쪽, 경계의 전후가 있습니다. 다양한 버전들이 이합집산을 했겠지만, 나는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크다고 봐요.
그 과정은 단순히 인칭 전환이나 객관화의 이름으로 포섭될 수 있는 영역 밖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게 만드는데, 그때 세계는 「어떤 꽃은 차라리 짐승에 가깝고 또 어떤 벌레는 차라리 꽃에 가깝다」(『진흙얼굴』)라는 제목처럼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거나 서로를 허무는 목소리가 되고, 급기야 「수선을 위해 속을 뜯어낸 서쪽 노을에 정념의 벌레가 도착했다」(『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와 같이 세계의 모든 주체가 서로 자리를 내주는 지경에 이른다.
이쯤에서 나는 시인의 첫 시집 첫 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돌아왔다. 칠월. 어느 날.
비름풀 밟으며. 들끓는 노을에
가슴 뜯긴 채. 몇 권의 책. 지지한
세월 마른 먼지로 풀썩일 때
절벽 아래. 으깨
지는 물과 바위. 흰 파편 따위 잊고.
죽음처럼 걸어왔다.
불 붙은 고요 길 위로. 숱한
사람들 산산이 부서져간 어둠의 켜켜로
이 땅 한숨 안으로. 검은 눈의 그가.
다가와. 불끈 손 내밀고.
- 「서시」, 『얼음시집』(문학과지성사, 1988)3)
여기서 다가오는 ‘그’가 누구인지 묻는 일은 불우한 시절을 거쳐 온 우리 시사의 습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보다는 그를 포함한 시의 장면이 하나의 전체성를 품고 다가온다. 때는 울창한 칠월인데, 맞춤인 듯 겹겹의 죽음으로 껴입고 어둠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는 듯한 이미지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내민 손은 사회학적 해석이 쉽게 도달하는 역사적 만남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저편에 드리워진 깊고 어두운, 한 마디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어떤 심연의 손짓처럼 보인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 손은 40년 가까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상재한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에까지 이르도록 ‘죽음’과 ‘검은색’과 그것을 매개하는 ‘노을’에 대한 그의 천착은, 우리 시사에 흔한 자기 연민과 자기 투사 너머에 이르는 일종의 ‘문’처럼 보이는 것이다.
첫 시집을 내고 최승호 시인이 연락해서 두 번째 시집을 ‘세계사’에서 내자고 했어요. 그래서 원고를 준비하고 있을 즈음이었는데, 충격적인 엽서 한 통을 받았어요. ‘왜 당신은 죽지 않느냐?’는 것이었죠. 첫 시집에서 그런 기세가 강하니까. 내 시를 새삼 돌아보게 되었죠. 그때 나는 앞서 말한 하이델베르크인이 시신을 먹거나 네안데르탈인이 꽃 장례를 치르는 것을 몰랐지만, 내 여정도 그들과 비슷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시인은 스스로 이과생이라며, 자신이 가진 세계를 겸손하게 뒤로 물렸다. 그래서 자신의 시 세계, 말하자면 시인만의 목소리를 갖게 된 것은 『기억들』 때부터라고 말한다. 그 이전 시기는 젊음이 으레 그렇듯 삶의 고뇌와 시적 방황의 흔적들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 시집과 예외적인 몇몇 시들을 제외하면 그의 시에서 일인칭 화자의 목소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시인은 ‘자신이 무엇을 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보았다’라고 말함으로써 시를 자신의 자리에서 일으켜 세계의 자리로 돌려보낸다. 자신의 경험을 과장하지 않는 자리에서 정념을 구성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빽빽하게 에워싼 물질성으로부터 존재의 심연과 세계의 비밀을 추궁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아무래도 여기서 출발했을 것이다.
‘말’이라는
물질의 미래
시인은 여전히 시에 대해, 그 기원과 주변에 대해, 시를 구성하는 단어와 문장에 대해 탐구하는 일이 즐겁다고 했다.
초기 PC 통신 서비스인 ‘천리안’에 ‘우리만의 사전’이 있었어요. 한 50쪽짜리였는데, 그걸 다운받아 수년간 한 3백 페이지로 만들었어요. 시와 소설에 나오는 우리말을 모았는데, 홍명희와 김성동의 소설이 가장 많았어요. 알고 보면, 그 두 사람 고향인 충청도가 우리말이 가장 풍성한 곳이에요. 물론 박완서 선생도 우리말을 아주 많이 사용했고, 김원일 선생도 빠지지 않았죠. 나중엔 엄청나게 양이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채집한 말들을 늘 쳐다보고 있었어요. 말의 결들도 좋아했지만 어느 순간 내가 그것을 나누고 가르며 구조적으로 분류하고 있더라고요. 그 말들의 물질성을 따지고 있었던 겁니다.
말하자면 단어 하나도 그 하나로 두지 않고 그것의 위아래와 앞뒤를 살피고 그것이 마주 보는 것과 돌아선 것들 사이의 틈새와 메움 새를 함께 보는 것. 시인은 다만 그것이 태생적인 이과생 특유의 사고방식 때문이라며, 감성은 그것을 가다듬는 과정에서 어떤 흐름을 형성할 뿐이라며, 낮추어 말하지만 그만의 방식이 그만의 특이점을 만들고 다시 그만의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우리 시사는 한층 두터워졌다.
![]() 신용목 |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민음사, 1997)를 냈을 때 오탁번 선생한테 연락을 받았어요. 긴 통화였는데, 요지는 내 시가 주술적인 데가 있다는 거였죠. 주술은 흔히 비의(秘儀)라고 하죠.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시는 주술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의라는 게 시의 공간성을 확장시키는 굉장히 중요한 매개니까요. 네 번째 시집을 내면서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공간성에 대해 고민했던 기억이 있어요. 물론 그 후로 시가 좀 더 단정해졌지만, 그때부터 나름대로 내 방식을 믿고 계속 써나갈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다. 단어와 문장에서 다시 시간과 공간에서 그 사이를 가르고 나누며 어느 순간 건너뛰는 그의 이야기 앞에서, 우리가 잠시 이 도시의 체계 바깥으로 이탈해 무중력의 새로운 시공에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이해한 그의 시론대로, 세계가 개인의 경험으로 구조화되어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물질과 물질이, 말과 말이 마주 보는 순간을 문으로 열고 나온다고 한다면, 그런 느낌이 나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바다가 자신을 덮쳐온다고 느끼지만, 지나고 보면 하나의 물방울이었고 한 자락의 파도였고 긴 인생 가운데 짧은 여정이었다는 게 좀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안에 갇혀 있을 때는 잘 몰라요. 예를 들어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죽음이 자신을 덮쳤을 때는 그 슬픔이 어떤 형태인지 어떤 색깔인지 모르는데 지나고 보면 색깔과 크기를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그는 기쁨과 슬픔도 색깔과 형태로 분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으로 그는 완성해 왔다. 의미를 넘어선 이미지 속에서 말과 말이, 물질과 물질이 겪는 작은 만남과 결별의 전부로서의 세계를. 단언컨대 그 세계에는 예배당도 법당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깜빡대는 수은등을 심은 간판을 건 흥신소는 분명 개점 중이다. 그곳에서 구원과 해탈을 구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시와 함께 우리는 이 진흙의 삶을 이루는 재료들과 작은 너트와 볼트로 이어진 감각과 감정의 구성품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가 거짓 천국보다 진짜 세속을 원한다면 말이다.
시인은 12번째와 13번째 시집 두 권을 탈고 중이라고 했다. 여전히 자신의 시에 대해 돌아본다고 말했지만, 그에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다. 시력 40년에 이르며 자신의 세계를 진즉에 완성한 시인을 여전히 치열한 현역으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저 태도란 것을 이제 알고, 그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1)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문학동네, 2022)의 첫 구절로 송재학 시인의 몸이자 그의 공간이며 더불어 시가 그 같다는 생각에 제목으로 삼았다.
2) ‘내간채’란 명패가 붙은 송재학 시인의 작업실은 한 상가 건물 옥탑에 있는데, 작년 이맘때에 이어 이번이 우리(그날 같은 직장에 있는 고명재 시인이 동행했다)의 두 번째 방문이었다. 교실 크기 정도 넓이 절반가량은 크고 작은 스피커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중에는 웬만한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것들도 있었다. 벽마다 차려진 책장에는 책과 함께 LP판들이 서지처럼 연번까지 달고 꽂혀 있었다. 그의 시에도 자주 등장하는 바지만, 그에게 음악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리고 한편에는 그가 최근 취미를 붙였다는 바리스타 설비들이 한가득 자리를 차지했다. 이번에도 시인은 완력을 압력으로 삼는 수동 레버 에스프레소 추출기를 이용한 수동 에스프레소를 한 잔씩 내려주었는데, 그 작업의 과정부터 커피의 맛까지 무척 인상적이어서 우리는 자주 공간을 꽉 채운 음악과 커피향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3) 고백하자면, 나는 고향인 거창의 한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의 시를 만나고 있었다. 그의 첫 시집이 신경림, 김남주, 황지우의 시집 옆에 나란히 꽂혀 있었던 것이다. 당시 대학생 선배들이 모교에 찾아와 우리가 몰랐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대구로 진학한 한 선배가 송재학 시집을 선물했다.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75’ 뒤표지 산문에는 “며칠 전에는 그곳엘 가보았습니다. 1951년의 시점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거창 신원의 사람들과 나는 무슨 맥락으로 꿰뚫어져 있는 것인가요.”라는 구절이 있었다. 나는 그 산문의 내력에 대해서 물었고, 시인은 젊은 시절 잡다한 방황과 관심의 도중에 김원일의 『겨울 골짜기』를 본 뒤 거창 사건이 가진 비극성에 마음이 가 자료를 수집하고 또 거창을 찾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 일들에 대해 쓰고 싶었으나 결국 쓰지 못했다는, 마음의 깊은 자리를 슬며시 내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