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역 박태원 장편소설 『천변풍경』
- 불역 박태원 장편소설 『천변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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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의 『천변풍경』은 한국 현대문학이 태동하던 시기에 그 중요한 축 하나를 이룬 작품이다. 1930년대 청계천 주변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을 옴니버스식으로 그리되, 각 인물의 이야기가 띄엄띄엄 전개되는 기법을 구사하고, 뚜렷한 결말을 맺지 않는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빈곤과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 구조에 시달리고 있는데, 각자 순응하거나 소극적으로 저항하며 자기 방식대로 대처한다. 이야기들을 이끌어가는 인물들이 주로 여성들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인은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면서 시댁의 부당한 대우를 감내해야 하거나, 혼자서 돈벌이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반면 모든 유부남은 외도하고 아내의 행복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작가는 연민과 눈물을 자아내는 신파로 빠지지 않고 이런 기구한 운명들을 경쾌한 문체로 유머 있게 펼쳐놓는다.
거의 백 년 전 서울 생활의 풍경은 현대 한국 독자들에도 낯설고 이국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물며 프랑스인이 이 작품을 읽고 프랑스어로 그 분위기와 맛을 제대로 옮겨 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짐작한다. 이처럼 어려운 작업을 기욤 장메르와 아르노 뒤발은 훌륭하게 해냈다. 『Chroniques au fil de l’eau(천변풍경)』은 일제 강점기 한국의 서민적인 정서가 듬뿍 스며들어 있는 이 작품에 대한 매우 충실한 번역이라고 평할 수 있다. 우선, 프랑스어 문장이 유려하여 잘 읽히면서도 작품의 분위기를 잘 살려낸다. 특히, 상당 부분 이야기의 진행이 인물들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졌는데, 인물들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소박한 말투를 생생하게 되살려서 시끌벅적하게 주거니 받거니 리듬감 있게 오가는 수다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심지어는 프랑스어에서 오는 약간의 어색함이 (이는 번역이 어색하다는 뜻이 아니라 한국인, 한국적인 풍토를 프랑스어로 재현했을 때 언어 자체에서 오는 부조화를 말한다) 한국인 독자인 나에게도 이 시대의 생활상이 주는 생소함을 잘 전달해 주는 느낌이다. 역자들은 구어체를 과장 없이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아이씨’와 같은 토속적인 감탄사는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는 전략을 택한다. 또, ‘다방’, ‘다듬이’, ‘봉채’와 같은 낱말들도 문화적인 함의를 유지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원발음대로 표기하고, 책의 끝에 어휘 해설을 첨부한다.
위에서 언급한 분위기, 정서, 인물들의 말투와 별개로, 일제 강점기의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상황들이 다른 문화권의 언어로의 표현 자체가 까다로운 경우가 많다. 단지 적절한 단어가 없어서만이 아니라, 생활의 습관들이 언어에 스며들어 있어서 그렇다. 따라서 그런 생활의 수많은 디테일들을 다른 언어로 옮기려면 설명조로 흐르기 쉽고, 말이 부자연스러워진다. 이때 역자는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가령 한국의 전통 혼례 장면, 새댁의 삶, 아낙네들의 빨래하는 냇가의 광경, 다방에서 벌어지는 관행들이 그런 부분들이고, 그 외에 인물들의 이야기에도 문화적인 함의들이 수없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부분들도 무겁지 않게, 그러면서도 외국인 독자가 이해하고 어감을 전달받을 수 있는 선에서 매끄럽게 처리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번역은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만을 옮기는 작업이 아니다. 그 자체로 문학적인 글쓰기여야 하고,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 정신, 주제 의식을 다른 언어로 재탄생시켜야 한다. 동시에 역자는 원작에 대한 충실도와 가독성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추기 위해 매 순간 선택에 직면한다. 그래서 번역은 반역이라고 했던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고도로 의식적인, 아니 의도적인 반역이다. 이미 챗GPT와 같은 AI의 번역이 사람이 하는 번역을 점점 대신하고 있지만, 문학 번역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유이다. 『Chroniques au fil de l’eau(천변풍경)』과 같은 번역들이 이런 확신을 더 굳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