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 김숨 소설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영역 김숨 소설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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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의 일생을 다룬 영역 「기러기 할머니(Granny Wild Goose)」(한국어 원제 :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의 매력은 다양한 종류의 긴장에서 찾을 수 있다.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 진실에 대한 증언 사이, 일상 언어와 관습적 문학 언어 사이, 역사적 사실과 기억 사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로 다른 두 문화 사이.
김숨 작가는 독자들이 길 할머니의 목소리를 직접 접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독백 형식을 선택했는데, 우리 공동 번역자들이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할머니의 음성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담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독백 형식이야말로 때로 시처럼 들리는 할머니 말씀에 작가가 숨결을 불어넣어 아름다운 문학작품으로 꽃 피운 데 주효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품 맨 앞에 나오는 문장 하나를 두고 장시간 토론을 벌였다. “흙을 땅에 묻어주었어….” 이 문장이 간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영어 단어로 흙(dirt)·땅(ground)·대지(earth)·토지(land)·토양(soil) 등이 떠올랐지만, 선택은 쉽지 않았다. ‘길 할머니는 과연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셨을까’라는 질문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따지고 또 따졌다. 이 문장 하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수없이 텍스트 전체를 살펴봐야 했다. 결국 ‘흙’은 ‘dirt’로 결정했는데, ‘dirtiness’, 즉 물리적·감정적 그리고 정신적 오점에 가깝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땅’과 관련해서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길 할머니에게 ‘earth’는 너무 넓다고 여겨졌다. 같은 취지에서, 소유의 의미인 ‘land’도 제외되었다. 결국 ‘ground’를 골랐는데,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작은 영토란 뜻과 함께, ‘현실에 바탕을 둠(groundedness)’이란 의미도 포함하려고 했다. 결국 이 첫 문장을 길 할머니가 떨쳐버린 과거의 트라우마를 땅에 묻는 것으로 이해하여 “I buried the dirt into the ground”로 옮겼다.
이 밖에도 어려운 점들이 많았다. 가장 어려운 것 하나는, 길 할머니의 말씀에 원래 들어있는 시적인 요소를 살리는 일이었다. 흥미롭게도, 마땅한 영어 표현을 찾지 못해 원문을 그대로 옮길 때 이런 일이 가능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3장 앞부분에, “입이 어디로 가버려서 하고 싶어도 못 해”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입이 어디로 가버려서”를 어떻게 옮길지 고민해야 했다. 영어로, “침묵하다(I keep my mouth shut)”나 “형언할 수 없다(I can’t find the words)”, 혹은 “할 말을 잃다(I’m speechless)” 등이 있지만, 이 중 어느 것도 원문을 그대로 옮긴 “입이 어디로 가버려서(My mouth has gone somewhere)”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영어로 다소 어색하긴 하지만, 길 할머니의 교육 수준을 드러내는 것은 물론, 이 부분에 들어있는 시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작품의 압축된 언어와 이미저리(imagery) 역시 작품을 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한다고 보고, 이것이 김숨 작가가 작품 곳곳을 연(stanza)으로 나누고, 연 사이사이에 ‘숨 쉴 공간’을 만드는 데서 구현된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예로, 5장에서 길 할머니가 예고 없이 일상생활을 묘사하다가 고통스러운 플래시 백으로 바꿀 때 이 공간이 돋보인다.
“나는 밤이 싫어./ 밤은 지우지. 나무도, 집도, 길도…. 내 얼굴도./ 내 얼굴은 지우지 마! // 피가 내 얼굴을 지웠어….(I hate the night./ The night erases. Trees, houses, roads…and my face./ Don’t erase my face! // Blood erased my face….)”
“내 얼굴은 지우지 마!(Don’t erase my face!)” 다음에 간격이 있어, 얼핏 독자는 숨을 돌리는 가운데 길 할머니가 겪은 정서적 고통에서 전해지는 긴장감을 일시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모노톤의 “피가 내 얼굴을 지웠어….(Blood erased my face…)”라는 행에 다다르면, 독자는 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이렇듯, 길 할머니의 목소리와 김숨 작가가 되살린 할머니의 기억이 긴밀한 시너지 효과를 발하고 되어, 이 작품 전체는 하나의 긴 시가 된다.
영문 제목이야말로 번역가들이 으레 범하는 ‘반역’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원제인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는 길 할머니가 일본군 스스로 참회할 가능성과 그에 대한 용서에 대해 성찰할 때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시 ‘위안부’ 경험을 한 김복동 할머니가 길원옥 할머니 성함에 착안해서 붙인 ‘기러기 할머니(Granny Wild Goose)’라는 별명을 선택했다. 영문 제목에 할머니를 등장시켜 이 작품이 길 할머니의 이야기이지, 익명 군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한 것이다.
작업하는 동안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다. 하나는 길원옥 할머님 생전에 책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 할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안타깝게도 올 2월,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이 책을 할머님 영전에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