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현장
수상작리뷰|희곡 부문

  • 문학현장
  • 2025년 겨울호 (통권 98호)
수상작리뷰|희곡 부문

희곡 부문

 

연극의 물성을 오롯이 품은 희곡의 언어

 주은길 희곡 「양떼목장의 대혈투」

 

 

 

지난 수천 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희곡 작가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언어로 인간과 세상을 오롯이 품은 자신들만의 언어를 지면에 차곡차곡 담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지면을 하나하나 넘기면서 자신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놓지 않고 쌓아가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을 이어왔다. 그런 가운데 어느 때보다 인간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과 자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절실해지고 있고, 이것은 희곡의 글쓰기에도 전례 없이 커다란 숙제가 되고 있다. 세상을 흔드는 요란한 파동들은 기호화된 언어에 기반한 선형적 서사로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희곡에 대한 기존의 틀에서 보면, 주은길의 「양떼목장의 대혈투」는 매우 거칠 뿐 아니라 뭔가 미완성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희곡은 주제도 주제지만 글쓰기 자체가 세상을 뒤흔든다.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가 전혀 달라지지 않는 세상, 그동안 무수하게 쌓아온 자성과 결심이 무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중심적 욕망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간종을 조롱하는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희비극의 도끼를 품고 있다. 행간에서 그 도끼날을 접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그러나 그 불편한 계곡을 넘어서는 순간, 지금/여기 인간은, 나는 대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이미 식상한 질문이겠지만, 나는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인가.

주은길의 다른 희곡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는 동물들이 등장한다. 이때의 동물은 인간과 다른 종(種), 인간에 의해 사육되고 도살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다름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동물과 인간 사이에서,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행위자들이다. 희곡 안에서 내내 세로에서, 가로, 대각선으로 거듭 이름이 다르게 호명되는 얼룩말 세로는 희곡에 등장하는 많은 양들을 하나로 합친 어떤 존재다. 2023년 그가 서울어린이대공원을 탈출했을 때, 인간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기를 쓰고 그를 다시 포획해 동물원 우리로 돌려보냈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난 사건이었지만, 작가 주은길은 그 얼룩말 세로에게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난 지금 느껴. 우린 서비스를 위해 태어난 생명이 아니야. 우릴 그렇게 정의할 수는 없는 거야. 난 계속 뛸 거야. 아무도 없는 곳까지.”

그의 다른 한편에는 ‘아빠’의 양떼 목장에 살고 있는 여러 양들이 있다. 실체를 보이지 않고 저 먼 곳 어느 방에 웅크리고 있는 ‘아빠’는 목동들과 개를 시켜 이 양들의 털을 깎아 팔고, 그것도 안되면 도 살해버린다. 처음부터 양떼목장이 자기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착하게 길들여진 순한 어린 양은 꿈속에서 얼룩말 세로를 만난 후 이제껏 당연하게 생각했던 자기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이곳저곳을 두드리며 자기 안에 생긴 낯선 감정의 실체를 알고 싶어한다. 하지만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꿈속에서 얼룩말 세로를 만난 후 어린 양은 이제껏 당연하게 생각했던 자기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이곳저곳을 두드리며 자기 안에 생긴 낯선 감정의 실체를 알고 싶어한다. 하지만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유롭게 자기로 살고 싶으면서도 그냥 양인 척 사는 양도 있다. 또 한때는 자신 역시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곤 했으면서도, 이제 늙었다는 이유로 젊은 세대의 고통과 하소연에 그저 ‘왜 그러니?’만 반복하다 ‘햇빛이 좋다’라고 에둘러치며 그냥 착하게, 눈치껏 적당히 살라고 말하는 늙은 양도 있다. 양떼목장으로부터의 탈출이 무조건 자유를 주는 것도 아니다. 어느 순간, ‘아빠’처럼 되기 위해 ‘아빠’ 옷을 입고 바깥으로 나간 검은 양은 세상이 자극하는 온갖 비틀어지고 형체 없는 욕망에 중심을 잃고 흔들리다 아무 것도 아닌 모습이 되어 다시 목장으로 돌아온다. 희곡에서 동물원 우리에 다시 갇힌 얼룩말 세로는 밀렵꾼에게 자신을 죽여달라 부탁한다. 하지만 결말은 세로가 그, 정확히 자신의 엄마와 아버지를 포획해 동물원에 팔아넘긴 밀렵꾼을 총으로 쏴 죽이고 동물원을 다시 탈출하는 것으로 급반전된다.

무엇이 진정한 나인가를 놓고 불안과 절망, 혼란과 자괴감, 무력감 사이를 오가는 동물들, 아니 인간들. 작가 주은길은 연극성까지 오롯이 품은 자신의 언어 자체로 잔혹하고 냉소적으로 헤집어 드러내고 있다. 그의 언어가 담긴 지면이 극장 공간 이상으로 입체적으로 출렁거린다. 

이경미
연극평론가
공저 『연극의 고전 다시 읽다』 『동시대 연극비평의 방법론과 실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