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현장
수상작리뷰|소설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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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겨울호 (통권 98호)
수상작리뷰|소설 부문

소설부문

 

이렇게나 명랑하게 날카로운

- (인간) 이야기 너머 (비인간) 이야기 너머, 그것만은 아닌

이기호 장편소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장편소설이 점차 짧아지고 가벼워진다는 판단과 그러한 경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기호의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문학동네, 2025)은 긴 이야기를 한 호흡으로 읽을 수 있게 하는 흡입력을 발휘하며, 작가 특유의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그러한 우려를 일거에 해소할 수 있을 서사의 힘을 보여주었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은 전라도 나주, 광주, 서울 청담동, 경기도 용인으로 질주하는 로드형 소설이자 유럽의 정세가 어지럽고 정신 사납게 흘러가던 시절 스페인의 한 훌륭한 집사와 그가 지켜낸 비숑 프리제 혈통의 역사 기록이기도 하다. 이시습의 반려견 이시봉을 중심으로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몰려오기를 반복하면서, 표면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감정들이 선명하게 부상한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을 중심으로 사랑과 증오, 상실감과 죄의식, 열망과 원망, 의도와 충동 그리고 그것 이외의 다른 것들이 휘몰아치면서,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은 우연과 운명이 만들어내는 삶으로 가득 찬 대서사시가 된다.

놀랍게도 소설 속 화자 이시습이 전하는 길고 긴 이야기는 인스타그램에 소개된 삼십 초 분량의 짧은 영상에서 시작된다. 심야 산책 중 고양이 연쇄 학살범을 쫓고 위험에 처한 고양이를 구한 이시봉의 새벽 추격전 영상이 폭발적 반응을 얻은 이후의 일이다. 화자인 이시습도 독자인 우리도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뒤를 이어 숨 가쁘게 펼쳐진다. 고귀한 혈통 비숑 프리제의 후손인 이시봉이 어떻게 이시습의 반려견이 되었나를 추적하는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소설은 곧 이시봉을 구하려다 급작스러운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 이시습의 아버지에 대한 애도이자 가족의 상처에 대한 치유의 소설이 된다. 이기호 소설의 인물들답게 모범적인 인생과는 거리가 먼 미워할 수 없는 불량한 존재들 사이를 통과하며 소설은 다시 한번 전환의 순간을 맞는다. 화자 이시습의 시선을 넘어선 예측 불허의 이야기로 질주하듯 나아가면서 이야기의 경계는 제어할 수 없을 만큼의 폭으로 빠르게 확장된다. 더 먼, 더 오래된 이야기들이, 이시습이 전해 들은 수많은 사연이 이시습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이시봉을 통해 자신의 옛 연인을 찾아 헤매던 정채민이 전해준, 이시봉의 선조를 한국에 들여온 박유정과 김상우의 이야기, 박유정의 동생이 전하는, 박유정과 김상우, 정채민과 김태형에 관한 이야기, 박유정이 전해준 이시봉의 엄마와 아빠 이야기, 박유정의 아들이 전하는, 박유정이 자신의 아이와 함께 은둔하듯 이시봉의 선조 개들을 키워야 했던 이야기, 그리고 이시봉의 혈통이 시작된 때의 유럽인 집사 이야기에서 비숑 프리제가 (이시습의 아버지 회사 동료의 이름이기도 한) 이시봉으로 불리게 된 사연에 관한 이야기까지 가까운 과거와 먼 과거의 이야기들이 어디선가 이어 붙으며 길고 긴 인간과 비인간의 이야기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다. 정확하게 짚어두자면, 그 이야기들의 연쇄가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는 게 작가 이기호가 생각하는 이야기의 본령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언제나 누군가의 이야기이며 누군가를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관점과 초점에 따라 이야기의 강조점도 질감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때로는 진위가 달라진 것처럼 여겨져도 어쩔 수 없다. 본래 이야기란 그런 것이다. 사태의 경위나 진위의 판정이 필요하다면, 그 판단은 언제나 듣는 사람 아니 읽는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까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이 로드형 이야기의 질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이것을 허풍선이의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 다발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작가는 결정적인 사건이나 장면을 정교할 만큼 날카롭게 베어내고 그곳에 관점과 초점이 다른 이야기들을 정확하게 채워 넣는다. 독자인 우리에게 무엇을 왜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따라가게 하는 동시에 사유하게 한다. 이기호 소설의 대체 불가의 매력은 이 사유를 부르는 이야기라는 성격에서 나온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은 당위나 윤리와는 거리를 유지한 채로 인간과 동물, 인간과 비인간의 세계가 경계를 넘어 서로 개입하고 관여하면서 내내 지속되어 왔음을, 아니 결코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뒤엉킨 채 이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음을 놀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입증한다. 이시봉의 과거를 뒤쫓아갈수록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이시봉과 분리할 수 없는 인간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다. 이시봉의 혈통의 역사에 대한 추적은 인간과 동물의 이야기가 분리될 수 없이 뒤엉켜 있음을 보여주는 비밀의 발설인 셈이다. 시대와 국경 그리고 세대를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직조된 이야기들의 갈래 길을 정신없이 뒤쫓다가 독자인 우리는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낯선 세계를 낯선 방식으로 조우하고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개의 이야기와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개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람과 ‘다르지 않은’ 개의 이야기들 혹은 사람으로 연결된 동물의 이야기와 동물로 연결된 사람의 이야기들, 우리가 그간 보지 못했던 이 세계의 절반, 아니 그 이상의 면들을 그렇게 소설 속에서 실감으로 확인하게 된다. 우리 곁에 있었던 이 수많은 국면을 왜 이제야 소설로서 만나게 되었는가를 의아해하게 된다. 이기호의 이야기들이 마련해준 통찰을 통해 우리는 성찰의 시선을 절반의 세계에 갇혀 있는 우리 스스로에게 되돌리게 된다. 우리의 세계가 이기호의 소설 덕분에 한층 넓어졌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여기가 끝은 아니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은 웃기고 찡하고 진저리나는 사연들을 관통하면서 불쑥 사람과 동물 사이에 여전히 강고하게 놓여 있는 위계 구조를 환기한다. 사람과 동물 사이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위계 구조를 비유하는 자리에서도 내내 동물이 사용되고 오용되어 왔음을 깨닫게 한다. 분리될 수 없을 만큼 뒤엉켜 있는, 이 엉망진창의 세계를 서늘하게 돌아보게 한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은 이렇게나 명랑하고 날카로운 소설이다. 

 

 

소영현
평론가,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아카데미 교수
저서 『올빼미의 숲』 『하녀』 『광장과 젠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