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아버지 박용래
- 나의 아버지 박용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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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1925~1980) 충청남도 강경에서 태어났다. 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에 입사했으나 은행 업무에 대한 환멸과 시에 대한 열망으로 3년 만에 그만두었고, 그 뒤 몇 차례의 짧은 교직 생활을 제외하고는 줄곧 시 쓰기에 전념했다. 1955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 6월호에 「가을의 노래」, 1956년 1월호와 4월호에 「황토길」과 「땅」을 발표하며 시단에 나온 그는 등단 13년 만에 첫 시집 『싸락눈』을 간행하고 이듬해 제1회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으며, 1975년 두 번째 시집 『강아지풀』, 1979년 세 번째 시집 『백발의 꽃대궁』을 펴냈다. 1980년에 한국문학사(韓國文學社)가 제정한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했다. |
![]() 박용래 시인(1978년) |
아버지, 저는 지금 탁자 앞에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있습니다. 마음은 침묵 속에 고요히 잠겨 있습니다. 일곱 살 무렵이었을까요. 잠결에 눈을 떠보니, 저는 아버지의 왼팔을 베고 누워 있었고, 첫째 여동생은 오른팔을 베고 누워 있었습니다. 둘째 여동생이 보이지 않아 놀란 눈으로 살펴보니, 아버지의 배 위에서 곤히 자고 있더군요. 아버지가 숨을 쉬기 어렵지 않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숨은 쉴 수 있으시냐?”라고 물었더니, “하나도 안 무겁구나”라며 웃으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 장면은 제 기억 속 아버지와의 첫 추억으로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 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필자(노아), 아버지(박용래), 넷째(진아), 어머니(이태준), 셋째(수명), 둘째(연)(1968년) |
유년 시절 청시사의 낡은 분홍색 기와집이 어느 영화 속 장면처럼 또렷이 떠오릅니다. 봄이 오면 앞 렸습니다. 수돗가 옆 앵두나무 열매가 빨갛게 익으면 어머니는 바지런한 손놀림으로 앵두를 씻어 그릇에 담아두셨습니다. 그 새콤달콤한 맛이 아직도 혀끝에 맴도는군요마당 화단에는 수선화가 가장 먼저 고개를 내밀고, 이어서 황매화와 흰 매화가 봄바람에 눈이 되어 휘날렸습니다. 수돗가 옆 앵두나무 열매가 빨갛게 익으면 어머니는 바지런한 손놀림으로 앵두를 씻어 그릇에 담아두셨습니다. 그 새콤달콤한 맛이 아직도 혀끝에 맴도는군요.
매년 봄이면 의식처럼 하는 저만의 일이 있었습니다. 갓 움튼 수선화 새순을 발견한 날, 아버지께 달려가 그 소식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침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화단으로 달려갔고, 눈을 비비며 웅크린 새싹을 찾곤 했습니다. 그 어린 봄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의 가슴 벅찬 순간과 아버지께 달려가던 설렘은 지금도 봄이 되면 그리움의 물결로 반짝입니다.
청시사 마당으로 제비들이 찾아와 처마 밑에 흙집을 짓고 새끼를 키우던 모습도 잊을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국어 시험에 ‘집에서 키우는 동물’을 묻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골똘히 생각한 끝에 강아지와 제비 중 제비를 적었고,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아이고!” 하시며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의 아버지는 제 어린 선택에 미소 짓던 따뜻한 시인이셨습니다.
시인의 집에서는 어떤 일들이 펼쳐졌을까요. 뜰 앞 파초잎에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잠이 깨고, 멀리 서대전역에서 기적 소리가 울리곤 했습니다. 하얀 수탉은 마루 위로 올라와 연신 날갯짓을 했고, 뒷마당 작은 텃밭에는 화초와 푸성귀가 옹기종기 자라고 있었습니다. 부엌 옆으로는 붉은 양귀비가 무리를 지었는데, 마치 타오르는 촛불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제 마음에 아름다운 동화를 읽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훗날, 아버지가 남긴 수첩에서 곱게 마른 양귀비꽃을 보았는데 여간 애틋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실 때면 아버지는 잠든 저를 깨워 코트 주머니에서 부스러진 땅콩과 지렁이 과자를 꺼내 주시곤 했습니다. 반대편 주머니에는 초록색 소주병이 살짝 보였는데, 그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스쳤습니다. 주말 심야, 명화극장이 방영되면 아버지는 저희를 깨워 함께 영화를 보시곤 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술병이 엎어지는 장면이 나오면 “어이쿠, 아까워서 어쩌냐. 술은 피란다” 하시다가, 잠시 후 나지막이 “술을 모르는 건 인생을 모르는 거지”라고 혼잣말을 하시곤 했습니다. 그 말씀은 어린 제게 이해하기 어려운, 그러나 깊은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어느 날 잠결에 들려온 아버지의 목소리는 유난히 떨렸습니다.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에서, 다음 날 박목월 선생님 내외가 집에 방문하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이튿날, 저는 아버지와 함께 대문 옆에 앉아 목월 선생님을 기다렸습니다. 커다란 걸음걸이로 다가오신 선생님은 청년같이 짧은 머리를 하고 계셨습니다. 저를 번쩍 들어 목말을 태워주시며, “노마야, 노마야!”1) 다정히 불러주시던 그 음성은 지금도 귓가에 맴돕니다. 뒤이어 쪽 찐 머리로 걸어오시던 단아한 사모님의 모습도 눈앞에 선합니다.
![]() 플라터너스와 아버지, 달려오는 필자의 모습을 담은 퀼트 |
가을 햇볕이 담요처럼 늘어진 어느 날, 아버지는 마루 끝에 앉아 책을 읽으시다 낮은 목소리로 저를 부르셨습니다. “노아야, 나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하지만 시인이란 명예는 줄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씀이 제 가슴 깊이 새겨져 잊히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수업을 마치고 1시간 남짓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 선화동 사거리 플라타너스 아래에서 아버지가 기다리시던 모습은 그림처럼 남아있습니다. 멀리서 아버지를 발견하면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습니다. 어떤 날은 나무 뒤에 숨으셨다가 깜짝 나타나 웃으시며 “뭐 먹고 싶은 거 없니?”라며 묻곤 하셨지요. 그 순간들은 가을이 오면 되살아나는 즐거운 추억입니다.
겨울을 앞두고 어두워지는 하늘로 적막이 내리던 늦은 오후, 아버지의 방은 오랫동안 고요했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니, 아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공허한 눈동자로 눈물을 머금고 계셨습니다. 그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이 아니었을까요. 그 순간, 저는 아버지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시사 마당에 오동잎과 감나무 잎이 쌓이면 “낙엽을 쓸지 말라” 하시던 아버지.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기도하듯 글을 쓰시던 아버지.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기도로 빚어낸 것이 시였음을.
1) 편집자 주 : 경상도 출신이었던 박목월 선생은 필자를 부를 때 경상도 억양으로 “노마야” 라고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