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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된 뒤 가장 먼저 반복해서 연습했던 건 타인의 죽음을 기사로 다루는 방법이었다. 뉴스에는 틀이 있다. ‘단신 기사’나 ‘스트레이트 기사’라고 불리는 보통 세 문장 정도 되는 기사를 구성하는데는 역피라미드의 원칙을 적용한다. 육하원칙에 따라 건조하게 사실 관계를 전달하는 기사다. 취재하다 보면 긁어모을 수 있는 정보가 꽤 많다. 사람의 이름도 그 일부다. 잘 알려진 공인이거나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이름을 공개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사건·사고 기사에서 이름은 가리는 게 일반적이다. 죽은 이의 신상에 대한 거의 최소한의 정보, 공식적으로 확인한 사실만 나열한다.
간신히 식별할 수 있도록, 성 정도만 남겨두고 이름을 지우는 일. 익명으로 만드는 일. 모 씨라는 말 아래 개별성을 감추는 일. 익명화는 비교적 안전한 하나의 사회적 케이스로서 독자에게 타인의 고통이 전달되도록 했다. 동시에, 이름을 하나하나 ‘모’ 씨로 바꾸고 있노라면 방어막과도 같은 어떤 감각이 생겼다. 한 사람에 관해 쓰고 있다기보다, 세상이 돌아가는 과정에서 일정한 통계의 일부로 꾸준히 나타나는 구조적인 고통을 말하기 위해, 그들의 사례를 예로 삼고있다는 감각이었다. 아무리 안타까운 일이더라도 정확한 수치와 정보를 빠르게 확인해서 단정히 정리하다 보면 기사 공식 안으로 들어온 아픔이 규격화되었다.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닌 ‘다루는’ 아픔은 규모가 커도 대체로 감당할 수 있었다.
참사 현장에서도 대개 그랬다. 기사를 제작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허용되거나 용인되는 것이 있었다. 이를테면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불길이 번져갈 때도 기자의 일을 하고 부상자와 사망자 숫자를 셌다. 상황판 앞으로 달려가 소방본부의 입을 확인하고, 슬픔과 충격으로 쓰러지는 사람을 촬영했다. 마이크를 들고 숨소리와 울음소리까지 녹음했다. 감정이 전염되어 눈물이 흐를 때도 감정을 분리할 수 있도록 썩 간단히 애쓸 수 있었다. 타인의 고통이므로. 목격하고 기록해 전달한다는 위치는 하는 일을 정당화하는 데만이 아니라, 슬픔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며 거리를 두는 데에도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2024년 12월, 12·29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있었다. 나는 나와 관련된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한동안 참사 뉴스를 보았다. 만 하루가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좋아요’가 계속해서 눌리는 한 리플 덕분에. 친구의 인스타그램에 아주 오래전 리플로 달아둔 나의 농담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찍고 지나가고 있었다. 언젠가 친구에게 건넨 허튼소리에 스스로 다시 웃으며 들어가 본 게시물에는 고인의 명복을 비는 리플이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머리가 마비되는 듯한 몇 초 이후에 알았다. 그 비행기에 친구가 타고 있었다. 친구의 배우자가 타고 있었다. 친구의 아이가 타고 있었다. 평정을 유지하도록 훈련했던 얼굴은 쉽게 무너졌다.
당시엔 미디어가 이 참사를 다루는 걸 보면서 위로와 해소는커녕 마음이 조금씩 망가지는 기분이 되었다. 차가운 무관심만 이어졌다면 더 힘들었을 게 뻔한데도, 가끔은 친구의 슬픔을 구경하고 가는 듯한 사람들이 야속했다. 내 기준에 부정확해 보이는 애도가 미웠다. 사람들의 관심이 휘발될 것 같아 무서웠는데, 공포를 통제하려고 내 무력감을 다른 이들에게 투사해 원망했다. 그간 정돈된 얼굴로 적잖은 확신을 가지고 말해왔던 ‘공적 애도’의 세부를 내가 지켜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적 애도’와 ‘공적 애도’를 구분해서 말해왔지만, 그게 포개어지는 순간에 대해서 내가 진실로 이해하고 있었던가? 아마 현장 기자로 투입됐다면 내가 똑같이 확보했을지도 모를 사고 당시 영상 하나가 끝내 머릿속 잔상으로 남아 끝나지 않고 되풀이됐다. 그건 한 방송사 속보 뉴스가 사고 당시 화면을 보여주던 방식과도 닮아있었다.
고통을 바라보는 일에 관한 책을 써낸 뒤, 독자들은 참사 현장을 지켜보는 일이 괴롭지 않았냐고 걱정스레 내게 물어오곤 했다. 나는 주로, 괜찮았다고 씩씩하게 답했다. 유족만큼은 괴로울 수 없으므로. 전달자로서 역할에 수반되는 고통은 견딜 수 있는 종류였다고. 바람직한, 기자의 답변이었다. 객관을 유지할 수 없는 참사를 지나면서야 나는 그 ‘괜찮음’이 그저 공감의 미흡함이 아니었는지를 의심한다. 어떤 사안에 빠르게 의견을 보태는 일도, 친구에 대한 애도의 글을 쓰는 일도 하지 않은 채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그저 사고 당시 영상을 머릿속으로 ‘거꾸로 감기’ 해서 비행기를 온전한 상태로 돌려두거나, 친구가 살면서 내린 결정 하나하나를 말리러 다니는 헛된 상상을 했다.
6월에야 무안에 갔다. 책 관련 강연이라는 틀을 빌렸지만, 내심 내 방식의 애도라고 치고 있었다. 이런저런 말을 빠르게 늘어놓았다. 다 함께 힘을 모아 변화를 만들고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우리가 본 ‘타인의 고통’에 대한 트라우마가 잦아든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고. 있는 힘껏 강연안을 준비하고 자료를 만들었지만 어쩌면 그런 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강연이 끝난 뒤에 일어난 일에 비하면.
한 여성이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때 그 일이 있은 뒤로 뭐라도 하고 싶어서 무안공항에서 자원봉사를 했고,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해왔지만 여전히 슬픔을 이겨내기 힘들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단상에서 뛰어 내려가 그 사람을 안아주고 싶었다. 조각난 댓글들에 차가워졌던 마음이 단박에 녹았다. 애도의 불완전함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따뜻한 마음과 체온을 지닌 존재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게 내게 오래 고여있던 차가운 슬픔을 녹여버렸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분명 우리가 만났다. 더운 체온으로 공간의 온도를 높였다. 이 애도를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는 게, 서로의 곁에서 인내심을 발휘해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느껴졌다.
친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쓰기를 오래 망설인다. 그를 대신해서 그가 누구인지 말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어떤 기억은 너무나 소중해서 입 밖에 꺼내고 싶지 않고, 그러면서도 우리가 주고받은 순간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즐거웠는지 아냐며 누구든 붙잡고 얘기하고 싶다. 때로 그가 확인할 수 없는 메시지를 보낸다. 생일을 축하하고, 탄핵을 알려주고, 그가 좋아하던 야구에 관해 이야기한다. 무안에 다녀온 걸 어떻게 알고 꿈에 와줬는지 묻는다. 한겨울, 입김이 나오는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어깨를 툭툭 치며 헤어지곤 다음 날 당연히 기자실에서 만날 걸 알던 날을, 기종과 색깔까지 같은 차를 타고 취재 현장으로 향하다 도로에서 서로 발견하고 신이 나서 경적을 울려대던 순간을 그리워한다.
방어막 없이 마주한 이 죽음은 내게 익명일 수 없고, 나는 이번에는 고통을 다루는 대신 느낀다. 고통을 기록하고 옮긴다는 근사한 말이 고통 자체에서 얼마나 유리된 것처럼 느껴지는지를 본다. 애도와 연대, 행동이라는 말을 나를 주어로 서술해보려 할 때, 얼마나 껄끄럽고 온전치 못하게만 느껴지는지를 본다. 곁에 서지 못한 채로 쓸 때, 쓰기가 슬퍼하는 이들을 더 외롭게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재현의 필연적인 모자람을 가지고도 ‘곁에 서는 쓰기’를 할 수 있을까? 지금의 시간은 내가 참사를 바라보는 방식과 글을 쓰는 방식을 바꾸어놓고 있는 것일까? 아직은 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한때 사람들의 얼굴에 능숙하게 익명의 베일을 씌우던 펜을 고쳐 잡는다. 얼굴을 또렷하게 떠올리는 글을, 곁에 서는 쓰기를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