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어른의 세계

  • 기획특집
  • 2025년 겨울호 (통권 98호)
어른의 세계

어른’이라는 말은 어렵다. 어른은 다 성장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지만, 어른다움을 갖춘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모호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미성년의 어린아이에게도 ‘어른 같다’는 말을 칭찬으로 쓰는가 하면 성인에게 ‘어른답지 못하다’라는 타박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영화를 비롯한 예술 작품들에서는 흔히 ‘어른답지 못한 어른’을 흔히 다룬다. 한 사람의 몫을 해내는 성인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야 말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있다면 나이를 먹고 법적 성인이 될 수 있지만, 무엇이 그를 ‘어른’으로 만드는 것일까. 영화들은 그런 어른의 세계를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돈 벌어서 남 주는 일을 제일 많이 했기 때문에 특별히 재미난 게 없어요”라는 <어른 김장하> 속 주인공의 한 마디는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제목부터 당당하게 ‘어른’ 김장하라고 밝힌 영화는 놀랍고도 당연하게도 다큐멘터리다. 흔히 말하는, 극영화로 만들었다면 사람들이 과장이라고 외면할 정도인 선행의 주인공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낸 경우다. <어른 김장하>는 MBC경남의 2부작 다큐멘터리로 방영돼 큰 호응을 얻었고, 제59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지역 방송사 프로그램으로는 최초로 교양작품상을 받았다. 

독지가 김장하 선생은 경남 진주에서 60여 년간 남성당 한약방을 운영하며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어 온 인물이다. 과시하지 않는 선행이었다. 답변이 본인의 자랑일 수밖에 없는 질문을 던지면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하는 김장하 선생의 평생에 걸친 선행을 이야기하기 위해, 카메라는 주변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영화에는, 김장하 선생은 인터뷰하지 않을 것이라며 웃는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과시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이 선행이 칭송받은 이유였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이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인사청문회를 하던 영상은 아주 오랫동안 회자했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은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고등학교 2학년 때 김장하 선생의 장학생이 되어 대학교 졸업까지 장학금을 받았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김장하 선생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런 말을 들었다.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갚아라.” 이렇게 설명하면 뛰어난 인재를 발탁해 후원하는 장학사업가라고 그를 오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장하 선생은 여성 인권, 환경, 문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후원해 왔고, 일명 ‘김장하 키즈’라 불리는 그의 장학생들은 장학금을 받는 과정이 자신을 위축시키지 않았다고 말한다. 성적을 증명한다든가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돼 죄송하다는 이에게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라고 말했다는 말의 울림은 각별하다. 

어른다움이란 때로 사회에서 요구하는 성공의 공식을 거부하고 꿋꿋하게 소신을 지키는 이타적인 태도와 연관된다. <어른 김장하>의 경우가 그렇고, <죽은 시인의 사회>의 경우 또한 그렇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미국의 입시 명문 고등학교인 웰튼 아카데미를 무대로 한다. 이곳의 학생들은 공부가 인생의 전부다. 아이비리그 진학이 지상 최대의 목표이며, 학교 선생들은 학생들이 그 목표에서 눈을 돌리지 않도록 지도한다. 십 대의 나이에 가질 법한 상상력에서 비롯한 엉뚱한 생각들, 행동들은 모두 제거해야 하는 무언가다. 이 학교에 영어를 가르치는 키팅 선생이 부임한다. 자신을 선생님이 아니라 ‘캡틴’이라고 불러도 좋다는 키팅은 문학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을 문학으로 만나는 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이상한 선생님을 만난 학생들은 (같은 학교 선배이기도 한) 키팅 선생님의 졸업사진을 통해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모임을 알게 되고 자기들끼리 같은 이름의 모임을 만든다. <죽은시인의 사회>에서 학생들이 현재를 즐기고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행동은 학부모와 더불어 보수적인 동료 교사들의 반대를 불러일으킨다. 학생들에게 어른다운 어른이었던 키팅은 어른들의 사회에서는 추방당한다(학교에서 떠나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 어른답다는 게 어떤 것일지 궁금해진다. 어른은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아이들이 정말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독려하는 사람일까. 그 두 가지가 함께 갈 수 있기를 우리는 늘 원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은 법이다. 

 

 

 

 

 

‘어른 됨’을 고민하는 이야기는 십 대인 주인공이 함께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아마도 어른이 어른다움을 보여주는 순간은 아이와 함께할 때의 성숙한 태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큐멘터리 <파편들의 집>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인 우크라이나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에바·사샤·알리나·콜랴라는 네 아이는 임시 쉼터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부모의 알코올중독과 가정폭력 때문에 부모와 분리되어 생활하게 된 아이들은 사회복지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 쉼터의 생활도 여유롭지 않다. 아이들은 종종 부모와 전화 통화를 한다. 엄마는 연하의 애인을 만난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를 데려와 함께 잘 지낼 수 있다는 희망을 내비치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은 부모의 약속이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고 있다. 엄마가 데리러 왔으면 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지만, 엄마와 함께 지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직감하는 아이들의 바스러질 것 같은 얼굴을, 영화는 섬세하게 잡아낸다. 이들의 곁에 한결같이 있어 주는 사람들은 쉼터의 사회복지사들이다. 쉼터의 원장은 긴 시간 시설을 운영하며 패턴을 보아왔다. 아동을 보호하지 못하는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이 쉼터에 입소한다. 부모는 친권을 박탈당하고, 아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라난다. 그리고 성인이 된 그들은 알코올중독에 빠지고, 다시 쉼터를 찾는다. 이번에는 그들의 아이가 쉼터에 입소한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동안, 아이들이 쉴 수 있는 곳을 제공하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그 자리에 머무는 어른의 존재는 마치 등대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등대는 집이 아니다. 점점 가까워지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아이들은 아슬아슬하게 자라난다.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전쟁이 한창인 우크라이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김려령 작가의 소설을 영화화한 <완득이>에서 고등학생 완득이는 아버지와 삼촌과 함께 살고 있다. 가난보다 완득이를 괴롭히는 사람은 옆집 옥탑방에 사는 담임 ‘똥주’다. 담임인 동주는 사사건건 완득이의 일에 간섭하는 데다 학교에서는 숨기고 싶은 가족사를 폭로해서 완득이를 괴롭게 만든다. 그러던 어느 날, ‘똥주’는 완득이에게 친엄마를 만나보라는 이야기를 건넨다. <완득이>는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아버지도 삼촌도 선생님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완득이를 돌본다. 베풀 수 있는 금전적인 여유가 없고, 아이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도 못하지만, 완득이가 좌충우돌할 수 있는 너른 여지를 준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일의 값어치를 느끼게 하는 어른들의 역할은 이 이야기가 온전히 아이의 성장담이 될 수 있도록 돕는다.

아이의 세계를 충실히 그림으로써 어른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로 따지자면 영화 <우리들>·<우리집>·<세계의 주인>의 윤가은 감독을 빼놓을 수 없다. 배우 장혜진은 윤가은 감독의 장편영화 전편에 출연했다. <우리들>과 <세계의 주인>에서 엄마를 연기했는데, 이 두 역할은 한 감독과 한 배우의 연이은 협업이라는 점 말고도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감독이 특정 배우를 반복해서 영화의 중요한 배역으로 캐스팅할 때 그를 ‘페르소나’라고 부르곤 한다. 감독이 좋아하는 마음으로 보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투영해 표현하는 배우라는 뜻으로 말이다. 이 표현은 흔히 특정 배우가 특정 감독의 여러 작품에서 반복해 주인공을 연기할 때 쓰이는데, 윤가은-장혜진 배우의 특수성은 장혜진 배우의 역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데 있다. 많은 영화에서 엄마의 자리는 주인공의 옆이나 뒤에 서게 되어 있고, 윤가은 감독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린이나 청소년이 주인공인 윤가은 감독의 영화에서 엄마의 자리는 다른 영화에서보다 각별한 데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장혜진의 엄마(들)는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느낌을 준다. 영화 속에서 그리고 영화 밖에서 어른의 자리, 어른의 역할을 감독이 어떻게 상정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에서 장혜진 배우가 연기하는 엄마는 크든 작든 주인공이 경험하는 어려움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이 가정 내에서 어른과 아이가 맺는 관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아이가 겪는 어려움은 유전적으로든 환경 측면으로든 어른이 만들어낸 자장 안에 있다. <우리들>의 선은 학교에서 늘 외톨이로 지낸다. 선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는 데 있다. 여름방학 기간에 전학을 와서 선이 따돌림을 당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선과 친구가 된 지아는 하필이면 집이 잘살아서, 지아와 어울리기 위한 돈을 마련하는 일이 만만치 않아 선은 괴롭다. 선이 지아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돈이 들지 않는 것들이다. 손가락에 봉숭아 물을 들여 주거나 며칠 집에서 지낼 수 있게 엄마를 설득하는 일. 선은 돈을 버느라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을 돌보기도 해야 한다. 엄마는 해주겠다고 약속한 오이 김밥을 잊어버리고, 이런 일은 ‘어른의 세계’에서는 흔히 있을 만한 일이다. 바빠서 잊어버린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다음에 하자고 약속한다. 어른에게는 작은 일이 아이에게는 태산처럼 크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어른은 어쩔 도리가 없다. 어른에게는 어른의 사정이 있으니까. 고단한 부모와 자기보다 어린 동생 사이에서 선은 더 빨리 어른이 되어간다. 엄마는 선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어려운 상황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장소로서의 집, 가족, 엄마의 품이 여기 있다. 한발 앞서 알아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어른의 자리가 여기 있다. 

<세계의 주인>에서 주인의 엄마는 좀 더 복잡한 상황에 있다. 주인이 겪은 큰 트라우마에 대해 엄마는 오랫동안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주인의 부모 모두가 그렇다. 삼촌이 가해자라는 점에서, 그 상황을 부모가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어른들은 어른 실격이다. 주인이 경험한 일 때문에 엄마와 아빠는 별거 중이고, 아빠는 가족을 회피하며 지내고 있다. 엄마는 그 자리를 온전히 메운다. 어린 딸이 겪은 상처는 제때 발견하지 못한 엄마가 하는 일이 어린이집 원장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아무렇지 않게 지내던 주인은 학교에서 있었던 사건 때문에 폭발한다. <세계의 주인>은 기계 세차를 하는 자동차 안에서 감정이 폭발하는 조수석의 주인과 운전석의 엄마를 뒷좌석에 앉아 찍었다. 엄마는 울지도 못하고 그저 묵묵히 앉아만 있다. 아마도 엄마는 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비슷한 상황은 수없이 반복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엄마는 지금 가해자보다 더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중 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주인>이 마련한 ‘어른다운 어른’ 됨은 변명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 아이가 주 인공인 순간을 빼앗지 않는 자세에서 나온다. 장혜진 배우는 <세계의 주인>을 준비하면서 윤가은 감독에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라도 내가 잘하려는 욕심을 부리는 신이 있다면 다 잘라줘. 현장에서 그러거든 말려줘.” 기계 세차를 하는 장면에서도, 원래 감독의 요구는 엄마 태선이 주인과 함께 가슴 아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혜진 배우의 해석은 달랐고, 그 결과가 영화에 담겼다. 아이 앞에서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는다는 일의 어려움을 이 영화의 엄마는 보여준다. <세계의 주인>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어른은 태권도장의 사범이다. 아이들이 편하게 와서 몸을 쓰고, 놀고, 먹을 수 있는 장소로서의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그는 기다려줄 줄 아는 사람이다. 아이가 더 먼 곳으로 뚜벅뚜벅 나아갈 수 있도록.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자기가 충분히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직 어른이 뭔지도 모르겠는데 어른을 연기하며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고 말이다. ‘좋은 어른’이라고 믿었던 사람과 가까워진 뒤 그가 ‘좋은’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 일이 얼마나 자주 있던가. 이것은 정답을 맞힐 수 없는 게임. 하지만 우리는 어른이 되는 일로부터 도망칠 수 없고, 세계는 우리의 어깨 위에 있으며, 미래를 다음 세대에 온전히 건네는 일은 어른의 책임이다. 언제나. 

이다혜
씨네21 기자, 1977년생
저서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출근길의 주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