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어른,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사람

  • 기획특집
  • 2025년 겨울호 (통권 98호)
어른,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사람

소설 『스토너』가 1965년 미국에서 출간됐을 때 반응은 심드렁했다. 대중의 사랑도 없고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평단도 없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21세기의 독자들은 달랐다. 이 책을 다시 꺼내 들었고, 좋아했고, 사랑했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이 책에 관해 하나같이 좋다해서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읽어봤다. 결론적으로 나도 이 책이 좋았고, 주인공 스토너를 사랑하게 됐다. 그런데 누군가 ‘이 소설이 왜 좋아?’, ‘그렇게 재밌어?’ 물어보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좋았지만, 재밌었지만, 다른 이에게 그 감상을 전하려고 하면 어려워진다. 자신도 이 책이 왜 좋은지, 인물의 매력이 무엇인지, 논리적·이성적으로 설명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책의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는 인생 전체를 요란한 사건 하나 없이 묵묵하게 살아간 인물이다.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문학을 만났고, 문학적 열정에 이끌려 평생을 평교수로 살아간다. 그의 결혼은 실패했고 인간관계도 좋지 않아 술 한잔 마실 친구도 없었다. 대단한 커리어를 쌓은 것도 아니고, 그의 열정과 무관하게 학문적 성공도 없었다. 끝. 이야기는 이게 다다. 이야기가 밋밋하면 인물이 견딜 수 없이 매력적인가. 그렇지도 않다. 스토너는 인상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다. 현실 세계에서 만난다면 세 마디 이상 대화를 나누기 어려운 사람. 재미없고, 매력 없고, 에너지까지 없는, 말 그대로 미스터 노바디. 그런데 좋다. 그래서 좋다. 

독자들이 스토너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가 자기 자신에게 집중했고, 스스로를 끝까지 감내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나는 누구인가. 이기를 추구하지만, 이기적인 존재는 되기 싫은 이타적인 존재. 욕구에 시달리고 욕망으로 마음은 부풀지만, 위선과 위악으로 속내를 감추고 살아가는 소위 사회적인 존재. 내 꿈을 추구하는 것은 철없는 일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비교와 경쟁 속에서만 성공을 확인받는 비정한 세상에서, 피곤하게 사는 ‘이 시대의 나’들의 눈에는 스토너의 삶은 그 자체로 자연인이자 자유인처럼 보인다. 진정한 나로 살고 싶은 마음, 되고 싶은 내가 되려고 계속 노력하는 나, 속도와 속력을 내가 정하고 누가 뭐래도 그저 내 갈 길 가는 진정한 현대인, 어쩌면 독자들은 소설 속에서 마음으로만 추구하고 꿈꾸던 이상적인 삶을 발견했는지 모른다. 되고 싶지만 될 수 없는 것, 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하지 않는 것, 말은 참 쉽지만 너무도 어려운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 스토너는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게 살아감으로 자기 자신이 됐다. 그 모습은 성공한 사람보다 성공한 사람처럼 보인다. 무리에서 배제되었지만, 무리를 배제함으로 고유해졌다. 돋보이지 않지만, 음각으로 새겨져 마모될 수 없는 이름처럼 읽는 이의 마음에 새겨진 이름이 됐다. 세상은 효율과 실용의 언어로 움직이지만, 그는 자신의 ‘사적인 열정’을 세상의 이익보다 우위에 뒀다. 언뜻 생각하면 그의 삶은 실패한 인생처럼 보인다. 시시한 삶을 일구다 쓸쓸히 생을 마친 꼬장꼬장하고 보잘것없는 학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내면의 중심을 버리지 않았다. 상대가 있는 싸움에서는 이겨도 자기 자신에게는 지는 사람이 있고, 경기에서는 져도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스토너는 패배하지 않았다. 어떤 이에게는 진정한 승리라고 해석될 수도 있는 삶. 세속적으로는 패배자지만, 정신적으로는 지지 않은 포기를 모르는 선수다.

그는 학생들의 논문을 묵묵히 읽고, 강의안을 매 학기 새로 고치며, 누구도 관심 두지 않는 고전 텍스트를 천천히 가르친다. 그가 학생들에게 전하려 한 것은 문학은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장 깊은 언어라는 믿음이었다. 그의 이런 태도는 때로 세상과의 불화로 돌아온다. 학문적 정직함을 위해 그는 부정한 학생을 옹호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학내 정치에서 고립된다. 그러나 그 선택은 스토너의 가장 인간적인 승리이기도 하다. 그는 타인의 눈치보다 진실과 윤리를 우선시하는 고독한 인간으로 남길 택했다. 일인칭 스토너의 세계에서 그의 이런 모습은 반전 없이 쓸쓸하게 마감된다. ‘자기 윤리를 지키고 정직한 삶을 살았더니 대기만성의 해피엔딩을 맞이했다.’ 이런 영화 같은 마무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 삶을 바라보는 삼인칭 독자의 세계에서는 그의 모습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고요한 견딤 속에 스민 어떤 품격이 독자의 마음을 두드린다. 스토너의 이런 태도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평범하고 표준적인 삶을 추구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이를 자극한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그런 삶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그의 삶을 대단하게 여기는 것이다. 일희일비 하지 않고 삶의 크고 작은 사건들에 호들갑 떨지 않는 이야기의 주인공.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고요히 존재하며 인간성을 지키는 우아함. “소셜이 싫어!”라고 말하면서도 그 세계에서 멀어질까 봐 원치 않은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동의할 수 없는 삶의 전시장을 돌고 또 돌며 ‘공감’ 버튼을 누르는 텅 빈 눈과 공허한 마음의 소유자들에게 스토너는 진짜 인간처럼 보인다. 억지로 웃고 억지로 가고 억지로 연대하며 억지로 소비하는 모든 얽힘에서 벗어나 고고히 홀로 항해하는 스토너는 어찌 보면 진정한 판타지의 주인공 아닐까? 

그렇다면 스토너는 처음부터 그렇게 살았던 것일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추구하고 또 무엇을 추구하지 않을지, 알고 그렇게 당당하고 덤덤하게 행동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에게도 그의 삶으로 이끌어 주었던 멘토가 있었다. 아처 슬론

  존 윌리엄스 장편소설 『스토너』 

교수는 문학 수업을 듣는 농과대 학생 스토너를 눈여겨본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 감상을 말할 때, 수업을 듣고 문학적인 생각과 기분으로 멍하게 고립되는 모습을 지켜본다. 슬론은 스토너에게 소네트를 읽어주고 그 의미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활력이 없고 집단 안에서 좀처럼 교류하지 못하는 스토너가 책과 문학 속에서 마음껏 숨 쉬고 존재하도록 사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묻는다.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나?” 

혼란 속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그쪽으로 가도 될지 확신하지 못하는) 스토너에게 한 마디를 더 건넨다. 

“이건 사랑일세.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 

슬론은 스토너에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줬다. 무엇을 보는 사람이지, 무엇을 더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 어디를 향해 가고 싶은지 말해줬다. 갈림길에 서서 갈팡질팡하는 청년의 몸을 돌려 분명한 방향을 제시했고 유쾌하고 담백하게 확신을 줬다. ‘넌 문학과 사랑에 빠졌잖아. 뭘 고민해. 가. 그쪽으로 쭉 걸어가.’ 

자기 인식은 무서운 것이다. 자기 언어를 갖게 하고 자기표현을 하게 한다. 인간은 가능성으로 가득한 존재다. 역설적으로 그 가능성 때문에 나침반은 쉼 없이 돌고 돈다. 사방에서 끌어당기는 자성. 끌어당기는 힘과 밀어내는 힘 사이에서 진동하고 흔들리며 몸과 눈을 빙빙 돌리지만 잔인한 가능성은 인간을 혼란에 빠트린다. 다 할 수 없고 다 될 수 없고 다 갈 수 없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될 수 없고 아무 곳에도 당도하지 못한다. 카오스는 뒤죽박죽이 아니다. 수많은 질서가 뒤엉켜있는 교차로 같은 것이다. 어둠은 물질이 아니고 빛의 부재이듯 카오스는 복잡함 그 자체가 아닌 ‘질서 없음’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혼란 속에서 길을 잃는다. 어둠을 상태로, 현상으로, 물질로, 인식한다. 그러나 빛 하나면 사라질 문제다. 실마리 하나를 잡으면 술술 풀어지는 혼란이다. 선생 슬론은 학생 스토너에게 말한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어른의 역할은 무엇일까? 아니, 애초에 어른이란 무엇일까?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몸이 커진다고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른에게는 어른스러운 태도가 필요하다. 어른스러운 어른은 어른의 역할을 한다. 앞선 경험으로 이후의 세대들에게 제언하고 조언한다. 성공담과 실패담을 통해 살아보지 못한 삶을 간접 체험하게 한다. 때로는 앞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필요하면 뒤에서 책임진다. 때로는 혼란과 갈등 속에서 공동체를 지켜내고 보호한다. 때로는 커다란 나무처럼 굳건히 서고 때로는 풀처럼 부드럽게 휘어진다. 필요할 땐 돌과 칼을 들고 사냥꾼이 되거나 군인이 되어야 할 때도 있다. 우는 아이를 위로하는 어른이 필요하다. 마음이 무너진 이를 일으키는 어른이 필요하고, 괜찮다고 어르고 달래주는 어른도 필요하다. 그 모든 어른 중에 가장 필요한 어른은 아직 아이인 내가, 하지만 어른이 될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어른이 아닐까? 자극을 삭제해 무해한 기분을 주는 어른도 필요하지만, 날카로운 질문과 무거운 현실 인식으로 각성시키는 어른도 필요하다. 무조건적인 안정보다는 왜 내가 불안한지 알려주는 어른도 필요하다. 초조한 오늘이 나아가고 싶은 저 너머의 내일을 제시하고 미래를 열어주며 필요하다면 거기까지 연결해 주는 어른도 필요하다. 자상하지 않아도, 포용력 있지 않아도, 자신을 껴안고 달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제시하는 어른. 어둠 속에서 섣불리 빛을 밝히는 게 아니라 어둠의 핵심을 발견하도록 시간을 허락하고 시력을 키워주는 어른. 불면의 밤에 자장가를 불러주고 동화를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불면을 이용해 글을 쓰고 사유하며 어둡고 깊은 자기 자신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도록 용기를 주는 어른. 필요할 땐 손을 집어넣어 잡아주고 꺼내어주는 어른. 삶의 크고 작은 욕구를 두둔하고 욕망을 응원하며 머뭇거릴 때 “뛰어!”라고 외쳐주는 어른. ‘그것은 사랑이란다. 아직도 모르겠니?’ 거울을 들어 열에 들뜬 나를 대면하게 해주는 어른. 

역주행의 상징 『스토너』 이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다는 현상은 의미심장하다. 스토너는 천재도 혁명가도 아니다. 유명인도 아니었고, 당대의 커리어 하이를 찍은 문학 전문가도 아니었다. 사실 소설이 아니었다면 발견되지도 말해지지도 않을 완전한 보통성을 지닌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단지 자기 일에 충실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하지 않았다. 억지로 하지 않았다. 마음을 다했고 사랑했고 그 안에서 완전했으며 안전함을 느꼈다. 그 단순함이 경건할 만큼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각자의 나’들이 무엇에 결핍되어 있는지 시사한다. 슬론은 책에서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슬론이 없었다면 스토너는 원치 않는 농가로 돌아갔을 것이다. 원치 않는 도구를 들고 원치 않는 열정으로 땅을 일구고 또 일구지만, 마음은 공허함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스토너가 자기 이야기를 쓰고 실제로 그 안에서 주인공으로 살 수 있게 도왔던 건 스토너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스토너를 어른으로 만들어준 어른이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런 어른을 만났다.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질문을 던지고 창문 앞에 세워 세상을 보게 하고 때로는 거울을 보여주며 자신을 돌아보게 했던 어른이 있었다. 어리석은 삶을 살 때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말해주는 쓴소리가 있었고 끝없는 자학과 열등감으로 모든 것에 주눅이 들었을 때 그건 잘한 거고 멋진 거고 대단한 거라고 말해줬던 응원이 있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문학 수업을 들을 때 열정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발견해 주고 적절한 책을 추천해 주고 서툰 문장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읽어주는 어른이 있었다. 지금은 엉망이지만 지금의 끝이 내일을 향해 솟아있는 작은 봉우리들을 발견해주고 그것이 언젠가는 언덕이 되고 산이 될 것이라고 말해줬던 어른이 있었다. 높아지는 만큼 깊어지는 골짜기도 있을 거라고 말해줬던 어른이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되고 싶은 삶을 직접 살며 몸소 보여줬던 어른이 있었다.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알아서 크지도 않았다. 좋은 책을 발견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눈. 생각으로만 가득했던 이야기를 꺼내어 실재하게 하는 부지런한 손. 그건 원래 있던 내 몸이 아니었다. 좋은 어른이 아니었다면 있는지도 몰랐던, 성장했기에 비로소 활성화된, 제2의 몸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스토너는 고민에 빠진다. 사회윤리와 자기윤리 사이에서 갈등한다. 주변 사람들은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 스토너를 비난하고 도덕적으로 매도한다. 그때 스토너의 마음을 두둔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스토너가 누군인지 알려줬던 그 사람, 슬론이었다. 학자는 자신이 평생 쌓아 올린 것을 파괴하라고 요구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해줬고, 문학은 더더욱 그런 것이 아니라고 알려줬다. 어른이 된 스토너가 위기에 빠졌을 때 스스로 나오지 못할 웅덩이에 발이 빠졌을 때 도와줬던 것은 어른 슬론이었다. 힘을 빌려준 것도 아니고 손을 잡아준 것도 아니다. 그냥 자기 생각을 말했다. 불확신으로 혼란을 겪는 아이 같은 어른에게, 지독한 딜레마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에게, 여전히 어른은 필요하다. 

정용준
소설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1년생
소설집 『가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선릉 산책』, 중편소설 『유령』 『세계의 호수』,
장편소설 『바벨』 『프롬 토니오』 『내가 말하고 있잖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