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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에세이 『먼저 온 미래』는 2016년 이세돌 9단과 알파고와의 대국 이후 완전히 뒤바뀐 바둑계의 변화를 추적하며 AI 이후 예술을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 일어날 어마어마한 미래를 헤아린다. 책이 전하는 예술의 변화와 관련한 내용의 일부를 요약하면 이렇다. 바둑이란 본디 예술과 스포츠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 문화 양식이었다.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경우의 수를 지닌 반상 위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부딪치는 양식이었기에 바둑은 예술로 성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을 아득히 상회하는 연산을 통해 승리에 가까운 답을 도출하는 AI가 등장한 이후, 바둑은 두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으로서 예술의 성격을 상실하고야 말았다. 이는 바둑에 ‘먼저 온 미래’일 뿐, 이러한 변화 자체는 머지않아 우리 사회 전체에 찾아올 것이라는 게 작가의 이야기다.
위의 분석에서 주목할 점은 다가올 예술의 위기가 AI가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보다는 정답을 찾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전제가 있기에 성립되었던 예술의 여러 특징과 성격들이, AI 등장 이래 그 전제가 깨져버렸다는 데서 예술의 위기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책에서 작가가 우려하듯, AI가 하루에 수십 권씩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가 쓴 것과 같은 수준의 걸작들을 써낼 수 있게 된다면, 그때 좋은 문학 작품의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혹자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다. 예술에 정답 같은 것은 없다고 말이다. 본디 예술이란 소통의 양식이며, 그 소통 과정을 통해 의미를 발견하고 또 찾아내는 일이기에 정답을 도출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의미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점에 대해 작가는 또 다른 예시를 든다. AI의 소설 집필은 결국 수천수만 가지 버전의 『폭풍의 언덕』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독자의 기호에 맞춰, 히스클리프가 여성인 레즈비언 버전 『폭풍의 언덕』 또한 가능하며, 지루한 부분이 생략되고 공포가 강조되는 서스펜스 버전 또한 가능하다. 그것들이 모두 크게 다르지 않은 품질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독자의 기호를 충족하는 방식으로 쓰인다면, 그때 문학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읽는 이의 마음에 쏙 들어와 다른 의견 따위는 찾기 어려운, 그러므로 예술 감상 행위가 소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비와 섭취에 가까운 것이 된다면, 그때 예술은 무엇이 될까?
정답을 도출한다는 것은 거기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예술에 정답이 없다는 것은 거기에 언제나 이론의 여지가 남겨져 있다는 뜻이고, 그 소통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며, 정답이 무엇인지 혹은 무엇이어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것은 비단 예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술을 포함한 모든 소통에서 이뤄지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앞의 예시처럼, 만약 우리가 소통을 통해 정답을 도출해 내는 일이 쉬워진다면, 그때 소통의 의미는, 예술의 기능은 어떻게 변화할까?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리라.
정답이 없는 문제이니, 여기서는 미래에 대한 어쭙잖은 상상을 제시하는 대신 얼마 전 있었던 나의 경험을 한 가지 전하며 글을 끝맺고 싶다. 지도 앱이 생긴 이후, 이제 나는 길을 묻지 않는다. 최적의 경로와 이동 수단을 안내해 주는 지도 앱이 있으니 초행길의 어려움을 느낀 적이 언제인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다. 이제 나에게 길 찾기란 목적지를 향하는 길을 찾는 일이 아니라, 지도 앱이 제시한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는 일이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누군가 내게 길을 물었다. 어느 학교로 가는 길이 여기가 맞냐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저도 여긴 처음이라 모르겠어요. 그는 나와는 다른 방향으로 떠나갔고,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그 학교가 내 목적지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처음 가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