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작가 차범석 선생과의 대화
- 극작가 차범석 선생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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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석 희곡작가이자 연출가. 1924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귀향」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TV 드라마 『전원일기』 (1~49화) 및 「산불」을 비롯한 수많은 희곡작품들을 남겼다. 희곡집 『껍질이 째지는 아픔 없이는』 『대리인』 『환상여행』 『학이여 사랑일레라』 『산불』 『식민지의 아침』 『통곡의 땅』 『옥단어!』 등이 있으며, 방송대상 우수작품상, 동랑연극상, 대한민국예술원상(희곡 부문), 대한민국 문학상, 이해랑연극상, 금호예술상, 한림문학상, 동아연극상, 3·1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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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돌아오는 늦은 시간, 대학로에서 지하철을 타고 잠실역에 내렸다. 송파 집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서였다. 파리한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 버스 정류장에서 선생님과 자주 마주쳤다. 당시 선생님 댁은 가락동이라 선생님께서도 잠실역에서 버스를 갈아타셨기 때문이다. 대학로에서 보통 연극이 끝나는 시간은 비슷했고 선생님과 나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잠실역에 도착했다. 선생님은 연극계에서는 이미 존경받는 어른이신지라 어려워 감히 선생님께 인사를 하거나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 ‘선생님 계시네’ 하면서도 인사도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같으면 “선생님! 연극 뭐 보셨어요? 저도 연극 보고 오는 길인데…”라며 넉살 좋게 말을 걸고 막걸리 한잔 나누었을 텐데. 그때로부터 30년쯤 시간이 흐른 2025년 겨울 이렇게 선생님께 말을 건네 본다.
전성희 아마도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잠실역 버스 정류장, 그곳에서 버스를 기다리시던 선생님을 저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저는 연극평론가라는 타이틀로 연극 현장에 발을 디민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연극계의 대선배이시고 스승이셨던 선생님께 감히 인사조차 드리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들었지만 선생님께서는 평생 차를 소유하거나 운전한 적이 없으셨다고 하더라고요. 목포에서 차 부자네 땅을 밟지 않으면 걸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유복한 가정환경이었는데 선생님의 검소함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차범석 전성희 선생! 반갑습니다. 잠실역에서의 인연이 있었는데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인연이라는게 그래요. 때가 있지요. 시절 인연이라고나 할까요. 나는 목포의 천석지기 집안의 둘째 아들로 유복하게 자라났어요. 어머니는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로 할아버지가 가을걷이할 때 곡수(논밭에서 나오는 곡식의 양)치러 가셨다가 자태가 고와 며느리로 삼으셨다고 해요. 어머니는 부잣집 종가의 맏며느리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어 참기름 한 방울도 아까워하셨어요. 그런 어머니에게 나는 스스로 땀 흘려 번 것만이 진짜 자기 몫이고 많이 벌려고 말고 적게 쓰라는 가르침을 받았던 거죠. 그래서 나는 차도 없지만 신용카드도 없고 핸드폰도 없어요. No Car, No Credit card, No Celluar phone이죠. 그 신념으로 남의 돈을 탐내본 적이 없어요.
목포는 선생님의 태를 묻은 곳이기도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목포 이야기를 많이 하셨고 목포와 그 주변을 배경으로 한 희곡들, 「별은 밤마다」, 「밀주」, 「귀향」, 「산불」, 「갈매기떼」, 「학이여 사랑일레라」, 「옥단어!」 등을 창작하셨습니다. 선생님께 목포는 어떤 곳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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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나에게 네 문학세계의 뿌리는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합니다. 그 뿌리는 고향이라고. 내가 태어나서 중학 입학을 위해 광주로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목포. 고향에 관해서 나는 병적일 만큼 사소한 것까지도 깡그리 기억해요. 집 구조, 안채와 사랑채, 340평의 집, 너른 마당의 나무들과 화초, 그리고 가족들, 주위 환경과 음식은 물론 그곳에 드나들던 수많은 사람들이며 그들이 쏟아놓고 간 투박한 남도 사투리, 인간관계가 그래요.
내가 태어난 목포는 개항을 위해 준비된 곳이었어요. 목포는 당시 어느 도시보다 개방적이었고 일본 유학생의 수도 도내에서 최고였어요. 우리 아버지만 해도 19세기 사람(웃음)인데 메이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셨어요. 작은아버지 세 분도 모두 일본 유학생 출신이죠. 목포는 그런 곳이었지요.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거든요. 그래서인지 기질적으로 권위적이고, 봉건적인 것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문물과 문화에 일찌감치 눈뜰 수 있었어요. 목포에는 극장이 두 군데 있었어요. 그 중에 평화관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극장인데 거기서 최승희의 무용 공연을 보고 무대예술의 의미와 멋을 알게 되었고요. 조선인이 운영하던 목포극장과 평화관을 초등학교 3,4학년 무렵부터 프로그램이 바뀔 때마다 다녔어요. 목포는 내가 극이라는 세계와 무대에 대한 인식을 깨우쳐 준 곳이죠. 말년에는 건강이 허락된다면 고향 목포에 내려가 작품을 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선생님의 가정환경을 보면 선생님은 차남으로서 아버지께 상당한 소외감을 느끼셨어요. 그런 환경적인 요인이 성격 형성에도 영향을 미쳐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고착된 것 같은데 연희전문 입학 이후부터 선생님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굉장히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그런 성격의 변화는 연극 때문이었을까요?
네. 맞아요. 어려서부터 나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밖에서 노는 것보다는 어머니 치마폭 자락을 잡고 어머니 곁에 있는 것을 좋아했어요. 말수도 적고 착해서 시키는 일도 고분고분 잘 들었지요. 그래서 어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어요. 그리고 책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지요. 작은아버지들이 유학 떠나기 전에 읽었던 책들이 사랑방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읽게 됐던 거죠.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친구의 집에 놀러 가는 것보다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고요.
아버지는 가부장적이었던 분이라 장남인 형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어요. 그런 형이 내가 보통학교 5학년으로 진급했을 때 명문이었던 광주고등보통학교(일명 광주고보)에 입학했어요. 집안의 경사라 아버지는 진학 축하 잔치를 크게 벌이셨어요. 형이 아버지의 총애와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되자 소외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어요.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라고나 할까? 2년 뒤 나도 광주고보에 입학했지만 형이 받았던 환대 같은 것은 없었어요. 형은 가부장제 최대의 수혜자인 동시에 자기보다 약자인 사람들에게는 가해자였죠. 그 사이에서 내성적이고 조용한 내 성격은 안으로 응어리지기 시작했어요. 아버지와의 대화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아버지는 나에게 훈계와 명령, 지시만 하셨죠. 내 성격은 광주고보에 입학한 후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어요. 스스로를 외롭고 무능한 소년이라고 생각하고 혼자 생각하고 결정해야 하는 존재의 절대고독을 이미 중학교 2학년에 실감했어요. 나는 세상을 사는 것이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거죠. 그런데 나에게는 모순되게도 소극적인 성격과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 함께 있었던 것 같아요. 소극적인 성격은 집 안에서 차남이라는 자신의 위치와 집 안에서의 대우에서 연유되어 존재론적 문제에 빠진 조숙함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어요.
광주고보에 다니면서 미술반에도 가입하고 학교 음악제에서는 합창단 단원으로 출연도 했는데 심지어 음악 선생님은 나에게 성악가의 길을 권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나의 길은 문학에 있다고 확신했어요.
대학 진학을 아버지와 의논했어요.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차남수: 구주 대학 출신의 우리나라 최초의 외과 의사)처럼 의과를 가라고 권했던 아버지께서 ‘니 좋은 대로 해라’며 간섭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저에 대한 무관심이라 받아들여져 서운하기도 했죠.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한 것에 많이 외로움을 느꼈고 불편한 부자 관계는 끝내 풀리지 않았어요. 문학과 연극을 하기 위해 연희전문 문과를 진학하면서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문학 서클에 가입해서 활동도 하고 연극, 영화, 미술 전시회를 찾아다니고 무용연구소에서 무용을 배우기도 했었어요. 내 안에 그런 에너지가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물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랐기 때문이었겠지만. 연극 공연을 찾아 헤매고 유치진, 이해랑, 안영일, 이서향, 이화삼 선생 등을 모셔다 좌담회를 열기도 했어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 내부에서 솟아나는 열정 때문이었던 것이죠. 연극은 나에게는 여흥이나 오락이 아니었어요. 연극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세끼 밥보다도 입맛이 당기는 연극 무대의 마력이 나를 변혁으로 끌고’ 간 것이죠.
선생님께 여쭈어 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일제 강점기에 성장하셨는데 선생님의 성장 과정 중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나 저항 같은 것은 없으셨나요? 물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선생님께서 다니시던 학교가 군인 교육을 했고 1941년에는 미국에 대한 일본의 선전포고로 태평양 전쟁으로 확전되자 학교는 무기만 없는 병영으로 바뀌었고 그 상황에 선생님께서는 자유가 억압당한다고 느끼셨다고 하셨죠. 그런데 선생님께 더 중요했던 것은 함께 하숙했던 형이 휴학하면서 혼자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상황에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끼신 것으로 보여요. 선생님께서는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들으시는데 선생님께서는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을 언제쯤, 어떤 계기로 자각하게 되셨을까요?
학창 시절 나는 일본인 선생 밑에서 일본말로 교육을 받았고 일본어로 된 책을 읽었어요. 언젠가는 민족 해방과 조국 광복의 날이 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리자라는 말을 누구도 하지 않았어요. 이광수나 현진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불온한 일이었고 배후에 어떤 마수가 뻗친 것이라 보고 경찰에 불려 가는 일이 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내가 읽었던 책은 집의 사랑방, 서고처럼 쓰였던 거기서 작은아버지들께서 보시던 일본어로 된 책들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민족의식의 각성보다는 일본어로 된 책을 통해 지식 섭렵에 몰두했었던 것이죠. 당시 목포에 가등문성당(加藤文盛堂)이라는 일본인이 하는 서점이 있었어요. 이 책방에서는 일본어로 발행된 월간잡지, 문학, 과학, 철학, 심지어 만화며 소년 소녀 소설까지 폭넓게 취급했어요. 이 서점에 전화해서 일본어로 된 책들을 주문하기도 했죠.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광주고보로 진학하면서 2학년 때 조선어 과목이 없어졌어요. 광주고보는 광주학생사건을 일으킨 학교로 광주고보의 학생이라는 것만으로도 은근히 광주 지역에서 인정을 받았지만 나는 광주고보의 저항정신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알지 못했어요. 아직 “왜놈의 통치 하”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던 나는 민족정신 같은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지만 전시 상황의 학교는 병영과 같았고 일기까지 검사하는 일은 나를 억압했어요. 자유에 대한 갈망이 극도로 높아졌지요.
광주고보를 졸업하고 전쟁 중이었지만 일본에서 재수 생활을 했어요. 도쿄는 광주와는 달리 무척 자유로웠어요. 그때 나는 공부보다는 영화에 빠져 있었어요. 전황이 심상치 않아지자 집으로 돌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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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으로 징집되어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수송선에 실려 가면서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내 자신이 너무도 처참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배는 전쟁터인 남양군도까지 가지 않고 나를 제주도에 내려줬고 제주도에서 군대 생활을 했어요. 3개월 만에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해방이 되면서 아버지의 부역 문제로 집안이 어지러웠어요. 그렇지만 나는 포기했던 대학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1946년 9월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습니다. 일제 말기 재수생 시절부터 품어온 꿈인데 넓게 보면 연극이었고 좁게 보면 극작가였어요. 그래서 대학 생활의 낭만을 구가하기보다는 이 시기에 흡수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흡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었죠.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연희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고 연극 공연을 하고 기성 극단의 연극을 보러 다녔어요. 그러면서 문학서클 새마을 문학회에 가입했어요. 입학 당시 나는 문학이 리얼리즘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역사와 민족의 현실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조차도 몰랐어요. 이 문학회를 통해 이런 것들을 알게 되었죠. 일제 강점기 때 폐간이 되었던 잡지 《문장》을 구해서 읽었어요. 《문장》을 읽으면서 한국문학에 눈을 뜨게 되었어요. 늦게 시작한 대학생활에서야 비로소 사회적, 정치적으로 개안하고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었지요. 리얼리즘과 민족문학론의 논쟁에도 관심을 가졌어요.
그리고 리얼리스트였던 유치진 선생의 ‘희곡론’ 수업에서 로맹 롤랑의 『민중연극론』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리얼리즘은 제 희곡의 출발이 되었지요. 연극사학자 유민영 선생은 나를 누구보다도 사회성이 강한 작가라고 했어요. 리얼리즘을 기조로 삼고서 변천하는 현실을 희곡에 그대로 반영하는 자세를 지니고 있다는 거예요. 나는 드라마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초기에 썼던 「밀주」, 「귀향」, 「산불」, 「불모지」 등은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그렸고 「청기와집」, 「껍질이 째지는 아픔 없이는」, 「갈매기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등은 사회적 비리나 정치적 부패를 파헤쳤어요. 「전원일기」도 산업화 시대에 소외된 농촌의 현실을 그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전원일기」는 1980년 10월부터 MBC TV에서 방송되었는데 1회부터 49회까지 1년 동안 썼습니다. 나중에 「전원일기」는 2002년 1,088회로 막을 내렸어요. 우리나라 최장수 드라마였지요. 나는 유토피아로서 농촌을 그리기보다는 농약으로 인한 환경 오염의 문제나 이농, 양파 파동 등 농촌의 현실을 보여주려 했어요.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내가 볼 때 김수미 씨는 화려하고 모던한 외모의 배우이지만 촌노파의 역할을 하면 어울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일용 엄니 배역을 김수미 씨에게 맡긴 거죠. 김 회장은 최불암 씨가 맡았는데 원래 최불암은 본명이 최영한으로 연기를 잘하던 연극배우였어요. 그 역할로 국민 아버지가 되었죠. 김혜자 씨도 그렇고. 그때만 해도 도시 사람치고 농촌 출신이 아닌 경우가 드물었어요. 「전원일기」는 시청자들의 향수를 자극하였기 때문에 장수 드라마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의 희곡 중에는 시대를 앞서간 희곡들이 있습니다. 1960년대에 창작된 「장미의 성」, 「열대어」와 1990년대 창작된 「옥단어!」에서 선생님께서는 소수자의 삶에 주목하셨습니다. 이러한 희곡들의 창작 배경을 알고 싶습니다.
1996년 당시 국제펜클럽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뉴욕에서 열리는 국제펜클럽 회의에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했어요. 그때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때였지만 미국에는 꼭 가보고 싶었어요. 호기심도 있었지만 세계 문화의 중심이며 연극예술의 메카로 알려진 브로드웨이에는 꼭 가보고 싶었어요. 40여 일 간의 미국 여행은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어요. 지식을 확장하고 개안의 기회가 되었지요. 돌아와서 여행 중에 구상한 동성애를 소재로 한 희곡 「장미의 성」을 완성했어요. 그동안 내가 관심 갖고 있었던 역사와 사회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개인의 욕망, 가정과 사회 안에 은폐되어 있던 성적 담론, 동성애와 여성의 욕망을 소재로 삼았어요. 이 연극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금기였던 소재를 다루었지만 흥행과 예술성에서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열대어」는 강효실의 이국적 용모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죠. 문득 강효실을 흑인으로 설정하면 어떨까 하는 발상에서 출발했어요. 미국 유학 중 흑인 여성 글로리아와 결혼한 젊은 의사가 아내 글로리아와 함께 돌아오면서 생기는 일을 그렸어요.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 집안인데도 글로리아를 며느리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어요. 가족들의 멸시와 몰이해로 글로리아는 점점 미쳐가고 반 발광 상태에서 무대 중앙에 있었던 열대어가 담긴 어항을 깨부수지요. 그러자 어항의 물이 무대로 콸콸 쏟아지는데 마지막 그 장면은 열대어가 살 수 없는 어항의 절망적 상황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어요. 기독교 가정의 위선과 우리 사회에 도사리고 있는 타 인종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옥단어!」는 2003년 내 나이가 80이 되던 해에 공연되었고 8번째 희곡집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옥단어라고 하니 무슨 물고기 이름으로 이해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전라도에서는 옥단이를 부를 때 ‘옥단아!’라고 부르지 않고 ‘옥단어!’라 부릅니다. 이 희곡은 극단 산하의 단원으로 의리가 있었던 배우 강부자 - 우리극단 산하 공연에는 빠지지 않는다고 ‘깨소금’이라고 했던 - 의 연기 생활 40주년을 기념해서 썼어요. 옥단이는 1930년대 초반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목포에 살았던 실존 인물입니다. 목포 사람 누구도 옥단이의 사연을 알지 못했어요. 옥단이는 날품팔이꾼으로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허드렛일도 해주고 수돗물도 길어주고 동네 애경사 때는 빠지지 않았어요. 그악스럽게 노동의 대가를 챙기려 하지도 않았고 낙천적인 성격에 곱지 않은 얼굴이지만 지분을 바르고 붉은 댕기를 물려 쪽을 지고 싸구려 옥비녀를 꽂아 멋을 부렸어요. 그런데 지능 발달이 지진한 데다가 늘 싱글싱글 웃는, 누구에게나 친근감이 있었던 인물이죠. 옥단이 같은 인물이 목포에만 있었을까요? 조금은 모자라고 천덕꾸러기 옥단이를 모두들 챙겨주고 옥단이는 끈질기게 버티며 남에게 베풀다 살아간 사람이었어요. 옥단이는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난 소수자였지만 그와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인정 덕분에 그 시대를 함께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죠.
많은 옥단이들, 동성애자, 타 인종 등 소수자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이들을 무대 중심으로 올려 억압되었던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진짜 연극은 그늘진 삶을 부축하는 것이죠. 특히 옥단이에게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더불어 사는 모습에서 새삼 연대의 힘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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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을 대표하는 희곡은 「산불」이라고 합니다. 「산불」은 지금도 활발히 공연이 되고 있고 창극, 무지컬, 영화 등과 같은 매체 전환을 통해 원 소스 멀티유즈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산불」은 어떤 의미의 작품일까요?
영광스럽게도 「산불」은 ‘해방 후 리얼리즘 연극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죠. 지리산 자락 산골마을을 배경으로 한국 전쟁의 비극을 그렸어요. 이 마을의 남자들은 모두 전쟁에 나가 죽거나 돌아오지 않고 이 마을에 남자라고는 노망든 할아버지 뿐이예요. 과부만 살고 있는 마을에 한 남자, 공비가 내려오면서 이야기는 비극적 결말을 향해서 갑니다. 어떤 평론가는 “내려온 한 젊은 공비의 얘기를 소재로 전쟁과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한 서민들의 상처와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의 원시적 애욕을 아기자기한 극적 구성과 생동감 있는 인물 묘사로 그려낸 수작”이라고도 했습니다. 1962년 초연 당시 마지막 날, 현관 유리문이 깨질 지경으로 관객이 많이 들어와 기마순경이 출동까지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었어요. 「산불」의 성공으로 작품만 좋으면 관객은 들어온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연극의 직업화와 대중화, 전문화를 표방했던 극단 산하를 창단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산불」은 초연 이후 국립극단의 제204회 정기 공연, 2007년 국립극단의 특별 공연으로 국립극단에서만 총 3번 공연되었어요. 국립창극단에서는 「산불」을 창극으로 제작해 2007년과 2008년, 2017년에 공연했지요. 국립오페라단에서는 2002년 오페라 「산불」을 국립극장 대무대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신시뮤지컬컴퍼니에서는 「산불」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댄싱 섀도우」를 만들기도 했지요. 김수용 감독님이 영화로 제작했고 TV 문학관에서 드라마로 방송되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이 작품을 사랑해 주셔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전집과 평전을 출판하고 차범석학회 회장 등을 하면서 저는 선생님과 늘 함께 있었어요. 선생님 덕분에 세상에 흔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운 선생님! 선생님께 묻고 싶은 이야기가 제 가슴에 한가득 있지만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선생님과 다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전 선생! 이런 시간으로 함께 할 수 있어서 나도 기뻤습니다. 진짜 연극은 그늘진 삶을 부축하는 일이라는 것, 즉 연대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있는 곳은 달라도 마음으로 응원할게요. 전 선생도 평안한 날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