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초대석
천국이었던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 소설가 윤대녕 선생과의 만남

  • 대산초대석
  • 2025년 겨울호 (통권 98호)
천국이었던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 소설가 윤대녕 선생과의 만남

 

윤대녕

소설가,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전공 교수, 1962년생

소설집 『은어낚시통신』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누가 걸어간다』 『대설주의보』 『누가 고양이를 죽였나』,

장편소설 『피에로들의 집』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산문집 『칼과 입술』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등

 

김형중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한 10년여 만인 듯한데, 꽤 긴 시간 뵙지 못했으니 결국 관례적이나마 안부와 근황을 묻는 걸로 대담을 시작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누가 고양이를 죽였나』(2019)를 출간한 지도 벌써 다섯 해 넘게 지났습니다. 그간 어찌 지내셨는지요?

 

윤대녕 그땐 그래도 머리숱 많은 50대였는데, 이제 60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네요(웃음). 그책이 나오기 불과 한 달 전에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이후 2년 가까이는 전혀 글을 못 쓴 것 같아요. 글을 쓸 의욕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곧바로 코로나 정국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그 여파가 좀 길어졌습니다. 결국 이리저리 알아보다 강원도 고성에 있는 작은 펜션을 얻어 다시 더듬더듬 소설을 쓰는데, 그게 결국 추모사 식의 어머님 이야기가 되더라고요. 그렇게 조용히 시간이 흘러갔고, 늘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지금껏 별다를 것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작가가 책을 내지 않으면 근황이랄 게 없는 거죠.

요즘은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유년의 기억이 자주 떠오르곤 합니다. 그중 되풀이되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아마 6살 무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시 저는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는데, 계절에 한 번꼴로 집에 거지(낭인)가 찾아왔습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부엌에 들어가 바가지에 밥과 반찬을 담아와 그에게 내주었죠. 그는 말없이 마루 끝에 앉아 꾸역꾸역 밥을 먹고는 또한 아무 말 없이 대문 밖으로 사라지곤 했습니다. 그의 얼굴을 아직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표정도 드러나 있지 않은, 말하자면 고통도 슬픔도 분노도 아픔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저 무연한 얼굴. 어느 날 혼자 들판을 쏘다니다 저녁참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가 저수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노을이 비친 물빛을 바라보면서 말이죠. 그 모습 역시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근래 그에 대한 기억이 자주 되풀이되는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게 지금 저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장은 제 근황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말은 생각나지 않는군요. 나이 60이 넘으니 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그러한 시간대를 살아오면서 이제는 삶의 전체성에 대한 명상과 사유에 들어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쓸쓸하다면 쓸쓸할 수도, 알차다면 알차다고도 할 만한 근황입니다. 오늘 제가 본 바로는 예전이나 다름없이 젊고 건강해 보이십니다(웃음). 이제 본격적으로 몇 가지 독자들을 염두에 둔 질문들을 던져보겠습니다. 1990년에 등단하셨고, 윤대녕이란 이름을 독자와 문학사의 뇌리에 깊이 새긴 첫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이 나온 게 1994년 일입니다. 벌써 30년이나 지났군요. 

 

어제 마침 증쇄본이 와서 들춰보니까, 초판 출간일이 94년 3월 28일로 되어 있더군요. 저는 4월로 기억하는데, 출판사에서 보내온 책을 4월에 받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정확하게 기억하시네요. 하긴 워낙에 본인한테는 의미가 남다른 책이니까요. 제 기억이 맞다면 그 책 이후 선배님의 글쓰기를 두고 작고한 김윤식 선생님이 이런 취지의 발언을 하셨던 걸로 압니다. “윤대녕 소설은 1990년대 한국문학 전체와 맞먹는다.” 저로서는 평생 도대체가 그런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만(웃음). 도대체 1990년대는 선배님께 어떤 연대였습니까? 『은어낚시통신』은 어떻게 1990년대 한복판에서 탄생했던 건가요?

 

저는 81학번, 재수하지 않았더라면 80학번으로 대학에 다녔겠죠. 그리고 군에서 제대한 뒤 복학한 해 6월항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저의 20대는 광주민주화항쟁으로 시작해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소련연방 해체라든가 베를린 장벽 붕괴 같은 세계사적 변화의 시대가 이어졌고요. 그리고 막 90년대로 접어드는 시점에 저는 소설가로 등단했습니다. 이 모든 시대적 변화와 분위기가 직간접적으로 저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등단하던 해 저는 기업체 홍보실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남들 눈에 띌 리 없는 그저 평범한 젊은이에 불과했습니다. 

 

윤대녕 소설가(오른쪽)와 김형중 평론가    

 

첫 책을 낸 직후 저는 직장을 그만두었고 몹시 불안한 상태에서 소위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그 책이 주목받게 되면서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이 달라졌죠. 그러니까 김형중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사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80년대에 20대를 관통하면서 저는 저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과, 그리고 세계와 늘 불화했고 매 순간 화염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살았습니다. 군에서 제대하고 곧바로 절에 들어가 일 년 정도 머물면서 아예 출가할까, 마음먹은 적도 있었죠. 아무튼 어찌어찌 대학을 졸업하고 기업체 홍보실과 출판사에서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밤마다 늘 소설이 북소리처럼 저를 부르더군요. 그러니 항상 직장을 떠날 궁리를 했죠. 저의 내성은 언제나 고요와 적막에 대한 열렬한 희구였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늘 소란스러웠고, 타인과 세계와의 틈바구니에서 숨조차 크게 쉴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90년대로 접어들고 소설가가 된 이후에야 저는 제가 대학 때 그토록 몰두했던 신화라든가 인류학, 선불교 그리고 롤랑 바르트와 바슐라르와 엘리아데 등에게서 영향받았던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첫 책이 주목받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걸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한국문학은 리얼리즘 전통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고 그건 하나의 당위였으니까요. 다만 1990년대라는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서사를 독자들이 요구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저 또한 독자로서 그러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은어낚시통신』이 과분한 환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런 맥락 때문이지 싶습니다.

 

그랬군요. 대체로 현실과 무관해 보이는 선배님의 작품 배면에서 정치적 상황에 대한 환멸 같은 걸 감지하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였던가 봅니다. 그러고 보면 사실 『은어낚시통신』은 좀 이질적인 텍스트였습니다. 가령 「눈과 화살」 같은 작품은 「국화 옆에서」 계열의 작품과는 많이 다른 유형에 속하잖아요? 이른바 미시 권력에 관한 탐구랄까? 언젠가 제가 쓴 글에서 저는 그런 상황을 ‘두 갈래 길’이라고 언급한 적도 있습니다만….

 

그 시절에는 사회에 대한 정치적 윤리와 책임이라는 게 일종의 무의식처럼 작가들을 사로잡고 있었지요. 저 역시 초기에는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등단 초기의 몇몇 작품도 그런 사회적 상상력의 문맥에서 썼던 거고요. 그러나 글을 쓸수록 『은어낚시통신』 계열의 작품 쪽으로 저도 모르게 이끌렸습니다. 말하자면 김 선생님이 말한 그 ‘두 갈래 길’ 중 후자가 저의 내성에 맞았다고나 할까요? 변화가 찾아온 시대에 전통적 리얼리즘 소설이 신인 작가였던 제가 구축해 나갈 세계는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이미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선배 작가들에 의해 발표된 리얼리즘 계열의 수많은 명작이 한국 문학사를 구성하고 있었고요. 아까 말씀드렸듯 무엇보다 1990년대라는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서사가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네, 궁금증이 많이 풀렸습니다. 그런데 『은어낚시통신』에 실린 「국화 옆에서」란 작품에는 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선배님의 초기 작품 세계를 관통할 만한 흥미로운 용어가 둘 등장합니다. “이방강박”과 “근원결락강박”이 그것인데, 비평가 남진우가 선배님의 초기 작품 세계를 ‘존재의 시원을 찾아서’(이후 이 말은 작가 윤대녕을 지시하는 트레이드마크가 됩니다만)란 말로 요약할 때, 중요하게 거론했던 것도 저 두 낱말입니다.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의 주인공 백부의 역마, 어딘가 신경증의 명칭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운명적 역마를 떠올리게도 하는 저 낱말들 =은 선배님께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거기엔 가족력이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유년기에 실제로 저에게 큰 영향을 미친 역마살의 백부가 있었고, 저의 선친조차도 가족을 이끌고 일 년에 한 번꼴로 이사하며 살았어요. 그 때문에 저는 늘 마음이 불안한 상태였죠. 초등학교 때만 전학을 6번이나 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자신도 고등학교 때부터 가출을 감행하더라고요. 그때는 역마라는 개념을 잘 몰랐고 단지 집에 붙들려 있는 게 고통스러워 밤마다 늘 대문 밖을 훔쳐보며 살았습니다. 오히려 여기저기 떠돌아다닐 때 숨통이 트이고 마음이 홀연해지고 고요했다고 할까, 아무튼 그랬습니다. 아까도 언급했습니다만, 제 내성은 이제나 그제나 고요함과 적막함 속에 홀로 머무는 것입니다. 제 근원이나 본성이 거기에 있다고 믿는 거죠. 그래서 제대 후에 절로 들어갔고요. 절에 머물며 불경이나 법전, 영어 교재 등 잡다한 책들을 읽어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의 부름을 받고 고무신을 신은 채 속세로 내려왔고, 세계와 끊임없이 불화하고 갈등하면서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을 이방인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어디에 가더라도 고요 적막과 만나지 못했기에 그 후에도 빈 밥그릇을 바랑에 넣고 만행하듯 참으로 많이 떠돌아다녔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말씀드리자면, 마음의 고요는 이제 어느 정도 체념한 상태입니다. 삶 자체가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고, 생명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낸다는 일이 곧 아픔이자 고통이라는 걸 벌써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웃음). 「국화 옆에서」 이야기가 나왔으니 내처 여쭙겠습니다. 「신라의 푸른 길」과 이 작품은 확실히 미당에 대한 오마주로 읽힙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발표된 「상춘곡」에는 잠깐이지만 미당이 직접 등장하기도 합니다. 미당은 선배님께 어떤 존재인가요? 혹은 어떤 존재였나요?

 

 

 

 

 

고등학교 때 처음 미당 선생의 시를 읽고 저는 그만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가 스무 살 때 처음 발표한 「벽」(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작)으로부터 「자화상」·「화사」·「설국암 관세음의 노래」·「귀촉도」로 이어지는 시의 세계에 빠져 있을 때 저는 마치 화염에 휩싸인 것처럼 몸과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생명·신화·불교가 동시다발적으로 상응하는 그의 시를 저는 지금도 마음에 깊이 품고 삽니다. 그의 이름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를 때마다, 저는 혼자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시인 서정주는 비판받는 개인일 수 있으나, 미당의 시는 우리 민족의 집단무의식이 잉태한 이를 데 없이 영롱한 문화재라고 말입니다. 사실 미당의 시를 비워두고 어찌 한국의 현대시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참고로 「신라의 푸른 길」은 이어령 선생과 정병욱 선생이 우리 고전 작품들을 두고 대담한 내용을 엮은 『고전의 바다』(현암사)라는 책을 읽다 신라시대의 향가 「헌화가」를 두 분이 해석한 내용을 보고 영감을 얻어 쓴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국화 옆에서」는 미당 시에 대한 오마주가 맞고, 「신라의 푸른 길」은 동해 7번 국도에 바치는 헌사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저는 종종 윤대녕 소설 세계의 원동력은 떠나려는 원심력과 돌아오려는 구심력 간 길항 작용의 산물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왕래하는 자’라 해도 좋겠고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길 떠나는 인간)’라고 해도 좋을 인물들이 항상 윤대녕 소설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입니다. 낭만적이면서도 어딘가 허무하고, 그러나 정갈해서 고전주의적이기도 한 이 인물들의 매력은 뭐라 말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특정 시점에 어떤 변화가 눈에 띄기도 하는데, 「국화 옆에서」·「상춘곡」·「말발굽 소리를 듣는다」·「빛의 걸음걸이」 같은 초기작들(참 아름다운 작품들이죠)이 구심력에 비해 원심력이 강한 작품들이었다면, 2004년에 출간한 『누가 걸어간다』에 실린 작품들은 그와 좀 달라 보입니다. 점점 구심력이 강해진다고나 할까요? 말하자면 떠나기 위해 돌아오던 인물들이 (어쩔 수 없이)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고나 할까? 「낯선 이와 거리에서 서로 고함」의 화자가 무더운 여름에도 밤새 배낭을 메고 도시의 한복판을 걷는 것은 떠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걷는 것은 돌아오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작품 「올빼미와의 대화」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대등하게 작용하는 그 시기 윤대녕 소설의 역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이 작품은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지난날의 이방강박을 종용하는 자아와 그 시절을 옛 시절로 돌리고 정주하려는 자아 간의 갈등에 대한 기록입니다(제가 맞게 읽었는지 모르겠군요). 이후 『제비를 기르다』, 『대설주의보』에서도 그런 경향은 지속됩니다. 아니 더 강화됩니다. 비평가 신형철은 『대설주의보』 해설에서 그런 변화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시스템과의 낭만적 긴장 대신, ‘생’이라는 불가항력이 소설을 이끈다. 무언가를 바꾸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체념이 소설 곳곳에 자욱하다. 귀소의 모티프가 있되 그것은 신생을 예감하는 영원회귀의 귀소가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는 수구초심의 귀소다. … 남녀를 불문하고 윤대녕의 인물들은 이제 병들어 견디고, 견디며 죽어간다.” 여쭙고 싶습니다. 그즈음에 선배님의 소설에 혹은 선배님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건가요?

 

대략 2000년 전후였던 것 같습니다. 1999년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를 출간한 후 슬럼프가 너무 길게 이어져 결국 2003년 제주도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사하던 봄날은 비가 많이 왔는데, 배로 짐을 실어 보내고 나서 다음 날 제주도 집에 도착해 보니 비에 젖은 책들이 아무렇게나 현관에 쌓여 있거나 무너져 있더군요. 그 책더미 사이에 아내가 아이를 업고 심란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을 본 순간 저는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 그동안 내가 허구 속에서 헤매며 살아왔구나. 그러다 서울을 사랑해 마지않는 아내를 억지로 끌고 여기까지 자발적 유배를 오게 됐구나, 하고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아까 언급하신 ‘길항 작용’이 발생한 게 아닐지 역시 사후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제주도 체류 당시 ‘삶에 대한 실제적인 감각’이라는 말을 자주 되뇌곤 했습니다. 삶과 글쓰기의 상관관계에 대한 사유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방금 언급하신 작품들 대부분이 이 제주도 체류 시기에 쓴 것들인데, 그래서 그런 흔적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 일산으로 돌아오고 나서 『제비를 기르다』(2007)를 출간했는데, 역시 제주도 이전과 이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책을 내고 나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 봄에 학교로 가면서 대략 15년 만에 현실 세계의 일원으로 재편입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설주의보』(2010)는 시민이자 작가로서 다시 출간한 첫 책이 되는 셈이죠. 아무튼 2000년으로 접어든 시점부터 약 십 년 동안 저에게는 많은 변화가 발생했던 시기였습니다. 더불어 왕래하는 자로서의 떠나오는 자 혹은 돌아오는 자의 마음이 좀 조금씩 수그러든 것 같습니다. 특히나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지금, 바로, 여기에 함께 존재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무하며 살려는 기특한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후에야 차후 다시 떠날 수 있다는 식으로 마음이 변한 거죠. 

 

최근작 해설을 쓴 비평가로서 제가 보기에 작가 윤대녕에게 변화는 한 번 더 찾아옵니다. 『피에로들의 집』(2016) 후기에서 저는 이런 문장을 읽었습니다. “계간지 연재가 시작될 즈음 세월호 사고가 발생했다.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후 만성적인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며 쓰다, 말다를 반복하면서 작가임을 스스로 한탄하기도 했다. 결국 연재가 한 차례 중단된 뒤, 나는 미완의 원고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뒤 제가 해설을 쓴 『누가 고양이를 죽였나』에 실린 여러 단편을 읽었습니다. 호모 비아토르가 호모 타나토스로 변모했다는 느낌이랄까? 아시다시피 타나토스는 죽음 충동입니다. 죽은 자의 흔적을 좇는 여행, 죽고자 떠나는 여행,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부터 기원한 여행으로 가득한 소설집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죽음들은 모두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죽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변모를 ‘사회적인 것의 귀환’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선배님을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지요? 그리고 선배님 작품으로서는 예외적인 작품 「총」에서 보이는 분노의 정념을 독자들이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자연사와 병사를 제외한 죽음을 저는 대부분 ‘사회적 죽음’이라고 해석합니다. 고독사, 자살이 또한 그렇듯이 말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단순히 ‘사고’로 부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요. 사고 당일 강의실에 들어가니 모든 학생이 고개를 숙이고 무거운 침묵 속에 앉아 있더군요. 그때 제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왜 우리는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나중에 알았는데, 그 학생 중에는 사촌 여동생을 세월호 사고로 잃은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 학생의 얼굴을 볼 때마다 기성세대의 일원으로서 자괴감에 시달리며 고통을 느끼곤 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모든 가족을 잃고 극적으로 생존한 작가 엘리 비젤의 말, “어린아이들의 죽음은 신의 죽음”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생때같은 아이들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그날의 참사는 명백히 사회적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많은 죽음이 잇따라 제 주변에서 발생했고 아닌 게 아니라 ‘죽음 충동’에 자주 시달려 약물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어 부모님을 삼 년 간격으로 잃고 나서는 마음이 급격히 늙어가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60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여기인지도 모르겠군요.

단편 「총」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는데, 그 소설은 60년대 이후 독점적 경제개발 시대를 살아온 아비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자식 세대가 갈등하는 내용입니다. 저 역시 세대 간 불화를 겪으며 살아왔는데, 그 갈등을 해소하는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여전히 우리 현실의 내부에서 불화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오늘, 여기라. 네, 오늘 여기까지 이야기가 도달했으니 이제 끝내자는 말씀처럼 들리는군요(웃음). 네, 얼추 선배님의 소설 세계 전체를 짧게나마 통시적으로 일별한 느낌입니다. 독자들에게 선생님의 소설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기 바랍니다. 아쉽지만 마무리해야 할 시간인 듯하군요. 최근 워낙에 과작이긴 하지만 『누가 고양이를 죽였나』 이후 꽤 시간이 지났으니 진행 중이거나 마무리해야 할 작업이 제법 쌓여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를 포함한 독자들이 기대할 만한 소식은 없을까요? 

 

그동안 일 년에 한 편꼴로 단편소설을 쓰기는 했습니다. 『누가 고양이를 죽였나』 이후 여섯 편쯤 쓴 것 같습니다. 앞으로 두세 편 더 쓰게 되면 9번째 소설집을 낼 생각입니다. 정년 후에는 미뤄둔 장편도 써볼까 합니다. 어떤 내용인지는 아직 영업 비밀입니다(웃음). 그리고 제 천국이 었던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 처음 성묘하러 갔을 때 그분께 마음으로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 10권까지는 소설집을 내겠노라고. 그리고 어머니를 뵈러 가겠노라고 말이죠. 네, 제 나이에 맞는 작품을 그때마다 온 힘을 기울여 계속 써내고 싶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김형중
평론가,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68년생 저서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무서운 극장』 『제복과 수갑』 『시절과 형식』,산문집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