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순례
차별의 역사를 이야기로 승화하다

- 나카가미 겐지 연작 단편집 『천년의 즐거움』

  • 명작순례
  • 2026년 봄호 (통권 99호)
차별의 역사를 이야기로 승화하다

- 나카가미 겐지 연작 단편집 『천년의 즐거움』

 

『천년의 즐거움』은 일본의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을 논할 때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작품 중 하나다. 제목부터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의 패러디이며, 작가 나카가미 겐지는 “마르케스가 백 년이면 나는 천 년이다”라고 농담조로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읽어 보면 마르케스의 영향이 크게 엿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천년의 즐거움』은 어떤 작품일까? 또 나카가미 겐지는 어떤 작가였을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피차별 부락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피차별 부락이란 일본에서 주로 에도 시대(1603~1867년)에 천민들이 거주했던 역사가 있는 마을 또는 지역을 가리킨다. 19세기 후반 천민에 대한 법적인 차별은 사라졌으나 그 후로도 사회적인 차별은 남아 있었기에, 천민들이 살던 땅이 여전히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뜻에서 그곳을 피차별 부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심지어 현대에도 피차별 부락의 집안이라는 이유로 고용이나 결혼을 거부당하는 사례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 때문에 피차별 부락 출신이거나 그 후손인 사람들은 대부분 그 사실을 숨기고 살아간다.

나카가미 겐지는 자신이 피차별 부락에서 태어나 자랐음을 밝힌 극소수의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뿐만 아니라 숨겨져 있던 피차별 부락과 피차별민의 문화유산을 발굴하는 일을 생애의 과제로 삼았다. 나카가미의 소설에는 로지(路地)가 꾸준히 등장한다. 로지는 원래 일본어로 골목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이지만 여기서는 피차별 부락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다만 초기 작품들에서는 도시 외곽의 슬럼일 뿐이고 피차별 부락과 직접적으로 연결할 만한 단서는 그다지 없었다. 그러다 『천년의 즐거움』을 연재하기 시작한 1980년부터 나카가미는 로지가 피차별 부락임을 명시하기 시작한다.

『천년의 즐거움』의 무대인 로지는 가난하고 소외된 곳이라는 점에서 현실의 피차별 부락을 반영한다. 그러나 나카가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먼 옛날 저주받은 귀족들이 찾아와 이룬 마을이라는 허구의 설정을 덧붙여서 로지를 마술적인 공간으로 재탄생시킨다. 그리고 그 귀족들의 고귀하고도 더러운 피를 물려받은 탓에 파멸할 운명을 타고난 여섯 젊은이의 이야기를 엮어낸다. 이 젊은이들은 마치 고대 신화의 등장인물처럼 방종하면서도 매혹적이며, 여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나카가미는 이러한 즐거움의 장면들을 꽤 대담한 필치로 묘사했다.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오류노 오바라는 인물의 입을 거쳐 독자에게 전달된다. 로지의 유일한 산파인 오류노 오바는 글을 모르는 대신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보거나 듣지 못한 부분은 상상력으로 채운다. 그리고 시간 순서, 시점, 사실성에 구애되지 않고, 때로는 노래와 같은 리듬마저 섞어서 그 내용을 사설 조로 늘어놓는다. 글을 통한 서사적인 기록과 대비되는 구비문학의 의인화와도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소설의 종말을 예감했던 나카가미는 근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의 요소를 가져옴으로써 근대소설의 정체(停滯)를 타파하고자 했다.

나카가미는 한국에 잘 알려진 작가는 아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출생한 작가 중 최초로 아쿠타가와상(일본의 순문학 신인상 중 최고 권위를 가진 상)을 수상했으며, 이후로도 대체 불가능한 작품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일본의 전후(戰後)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나카가미의 개성이 응축된 신비로운 작품 『천년의 즐거움』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할 수 있어 기쁘다.    

 

※  『천년의 즐거움』은 대산문화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필자의 번역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97번으로 출간되었다.

 

이정미
번역가,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강사, 1986년생
역서 『천년의 즐거움』 『코스모스 씽킹』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 『배움의 습관』 『패권의 법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