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역 박정대 시집 『체 게바라 만세』
- 영역 박정대 시집 『체 게바라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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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대의 『체 게바라 만세』(2014)의 영문 번역서가 나왔으니 서평 글을 써 달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사양하면 될 청탁이라고 즉시 판단했다. 내가 원작을 읽었던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화를 한 분은 내가 그렇게 쉽게 거절할 수 없는 강력한 이유를 제시했다. 내가 대산문화재단 번역지원 심사에 관여하던 시절, 이 시집의 이 번역 샘플 원고를 내가 추천했다고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이제 추천했던 번역이 완성되어 책으로 나왔으니, 추천자인 당신이 당연히 그것을 평가해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만약 내가 이 번역 원고의 미덕을 칭송한 것이 사실이라면, 또한 아마도 그렇게 한 것에 대한 객관적 증거를 들고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과연 그때 그렇게 했었는지는 전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는 아니겠으나, 사람과 책, 문학과 역사를 대하는 나의 태도와 정서가 그때와는 사뭇 많이 달라져 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는 있을 듯하다. 그러한 달라짐 중 하나는 한국문학의 영어 번역에 대한 태도도 포함된다. 당시에는 원작의 생김새를, 잘났으면 잘난 대로, 못났으면 못난 대로, 그대로 영어로 재현해야 한다는 번역의 충실성을 잣대로 휘둘렀다. 원작의 높은 수준을 끌어내리는 덤덤한 생활 영어 번역을 걸러내는 데는 매우 유용한 기준이었다. 그러나 원작보다 더 훌륭한 번역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이러한 기준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원작의 한국어 못지않게 정교한 영어로 전환시켜 놓았다. 스미스의 번역을 한강의 원작과 나란히 놓고 원문과 일치하지 않는 대목을 나열하는 비판자들이 여기저기 등장했었다. 한국어도 제대로 모르는 번역자라는 비난을 공석 사석에서 해대는 이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스의 번역을 토대로 한강은 국제적 작가가 되었고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박정대의 『체 게바라 만세』를 옮긴 『Hail, Che!』는 스미스의 『The Vegetarian』(2015)을 연상시킨다. 원작의 잠재적 국제성을 맘껏 부각시켜, 원작이 하고 싶었던 말을 더 잘 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스미스가 한강에게서 끌어낸 것은 채식주의와 여성주의 등 유통이 확보된 국제 코드였다. 반면에, 『Hail, Che!』는, 제목에서 큰소리로 선포하듯이, 반자본주의 좌익운동을 국제 독자와의 소통 코드로 삼는다. 그러한 이념이나 정서에 동조하는 영어권 독자들은 일단 제목만 보고도 군침을 흘릴 법하다. 게다가 원작은 국제 독자를 염두에 둔 대목들이 넘쳐난다. 번역자들(애드 복 리와 양은미)은 원작에 자주 등장하는 외국어 고유명사들(지명, 인명)을 다시 원래의 모습인 영어나 프랑스어 등으로 복원시켜 놓기만 해도 국제성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원작자의 한국어 문장에 함축되어있는 국제성을 예리하고 꼼꼼히 끄집어낸다. 한국어에 없는 구두점들인 세미콜론과 콜론을 적절히 집어넣고, 한국어 원작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언어의 음악성을 영어의 자연스러운 리듬으로 구현하고, 영어 시제와 구문의 미세한 장치들로 원문의 의도를 더 뚜렷이 대변한다. 여전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들의 번역 작업 지원을 내가 추천한 것은 나쁜 판단은 아니었던 것 같다.
※ 영역 『체 게바라 만세(Hail,Che!)』는 대산문화재단의 번역·연구·출판지원을 받아 에드 복 리와 양은미의 공역으로 2025년 미국 블랙오션(Black Ocean)에서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