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후기
『난설헌집』을 시작하며 : 허난설헌의 첫 번째 시를 번역하는 여정

- 영역 허난설헌 시선집 『난설헌집』

  • 번역후기
  • 2026년 봄호 (통권 99호)
『난설헌집』을 시작하며 : 허난설헌의 첫 번째 시를 번역하는 여정

- 영역 허난설헌 시선집 『난설헌집』

 

허난설헌의 시 전집인 『난설헌집(Spring Mountain : The Complete Poems of Hŏ Nansŏrhŏn)』을 펴내며, 최종 원고를 완성하기까지 나를 가장 괴롭혔던 번역의 난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집의 문을 여는 첫 번째 작품,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 白玉樓 上樑文)」이었다. 허난설헌이 단 여덟 살의 나이에 쓴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궁궐의 누각을 세우는 것을 축하하는 헌정시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시적 역량을 자각하고 이를 마음껏 펼쳐 보인 천재성의 산물이다. 여덟 살의 어린 아이가 이미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선언문과도 같았던 셈이다.

한문으로 쓰인 이 시는 영어로 옮겼을 때 무려 14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허난설헌은 고대 중국 도교 신화에서 모티프를 빌려와, 아직 세워지지도 않은 가상의 누각이 얼마나 찬란하고 칭송받을 만한 것인지 환상적인 비유를 통해 그려낸다. 시는 이 누각의 주인인 천상계 신선의 삶—그의 관직과 판결, 천상에서의 추방과 지상 유배 생활, 그리고 마침내 다시 하늘로 복귀하는 과정—을 서사적으로 훑는다. 이어 천계의 도구와 재료, 정령들이 동원된 건축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고, 완공 후 그곳에 모여들 신과 반신반인, 황제와 신선들, 그리고 역사 속 시인들의 화려한 연회를 상상한다. 시는 누각의 완공을 축하하는 가상의 상량식으로 끝을 맺지만, 사실 이 모든 풍경의 주인공인 누각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오직 시적 상상력 속에만 있는 공간이다.

이 시를 번역하며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벽은 ‘동사의 시제’였다. 한문은 시제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오직 문맥을 통해서만 그 시간대를 짐작하게 한다. 더욱이 한문 특유의 장르적 관습은 선형적인 서사보다는 이미지의 층을 겹겹이 쌓아 올리며 의미를 구축한다. 이러한 특성은 번역가에게는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의 도입부에서부터 이러한 도전을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원문의 첫번째 세 단락에서 발췌한 구절을 살펴보자. 

 

銀樓耀日。/ 霞楹出迷塵之壺。// 翠蜃吹霧。/ 噓成玉樹之宮。/ 靑城丈人。// 玉帳之術斯殫。

(은루요일。/ 하영출미진지호。// 취신취무。/ 허성옥수지궁。/ 청성장인。// 옥장지술사탄。)

 

원문의 한자들을 시구로 다듬은 나의 번역 초안은 다음과 같다.

 

A pavilion, silver, shines in the sun— / pillars the color of purple sunset mist: beyond the dusty illusions of this bottled world. // An azure serpent blows fog— / after the spout, a jade tree of the palace / within the Blue Castle lives an Immortal of Heaven // Here, finished with the art of the jade screens.

(누각, 은빛, 태양 아래 빛나고— / 기둥들의 색깔은 자주색 노을 안개의 색 : 병 속에 담긴 이 세상의 먼지 같은 환상 너머에. // 푸른 뱀이 안개를 내뿜고— / 그 분출이 있은 뒤, 궁전의 옥 나무가 나타나며 / 청성 안에는 하늘의 신선이 산다. // 여기, 옥 병풍의 재주가 마무리된 곳.) 

 

도입부의 누각은 이미 완공된 상태인가? 언어적 표현만 보면 그런 듯하다. 그렇다면 신비로운 안개를 내뿜는 저 신령스러운 존재나, '청성(靑城)'이라 불리는 천상의 궁궐은 어떻게 배치해야 할까? 시적 병렬 구조 속에서 신선과 이 신비로운 존재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상량식은 기둥을 세우거나 기초를 닦을 때 거행된다. 하지만 한문 원문은 시제에 관해 어떤 명확한 실마리도 주지 않는다. 결국 나는 시의 제목이 지닌 함의와 역사적 관습을 나침반 삼아 결단을 내렸다. 이 시의 지배적인 맥락은 누각의 기둥과 기초를 막 세우는 시점에서 거행되는 ‘봉헌 의식’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을 설정하고 나면, 두 번째와 세 번째 단락의 이미지들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가 더 까다로워진다. 서구의 독자들은 대개 문장의 의미가 순차적으로 연결되기를 기대하며 글을 읽는다. 물론 이 시도 그렇게 읽혀야 마땅하지만, 의미를 만들어 내는 구문들은 문자 그대로의 언어라기보다 의미의 집합이 패치워크처럼 덧대어진 것에 가깝다.

예를 들어 ‘청성(靑城)’은 궁궐의 이름이 아니라 신선의 이름이다. 그는 비단 장막을 걷어 올리는 마술을 부려 사물을 창조해 내는 능력을 지녔다. 또한 문맥에 따라 ‘뱀’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으나, ‘조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비로운 연기를 내뿜고 그 연기가 걷히면 환상적인 사물이 나타나는 거대한 조개의 전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가 도교 신화 속의 이러한 인물과 상징들을 알고 있어야만 비로소 이 이미지들이 누각의 경이로운 신비감을 강조하기 위한 비교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 지식은 한문의 문자적 표현 뒤에 숨어 있다. 결국 현대의 독자에게 작가의 의도와 언어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시제를 포함한 번역가의 세밀한 색채 입히기 — 즉, 기능적 언어의 보충 — 가 필수적이었다. 그 고민의 결과로 완성된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If constructed on Earth, this silvery structure would shine in sunlight— / its columns the color of sundown’s misty mauve; / and yet, this summery abode / will not be of the dusty illusions / within a bottled cosmos. // This royal edifice will manifest / as if the azure mussel opened its shell, / blew a mystical smoke, / and after the spout clears, / a palatial residence of exotic timber. // Or Blue Castle, an immortal of Heaven’s fifth level, / will practice his magical art of lifting brocaded curtains, / and from behind them: / a complex of viewing platforms.

(지상에 세워졌다면 햇살 아래 은빛으로 빛났을 구조물— /기둥마다 안개 낀 황혼의 연보랏빛이 감돌겠지 / 하지만 여름날의 처소는 / 작은 병 속에 갇힌 / 먼지 같은 환상이 아니야. // 푸른 홍합이 입을 벌려 / 신비로운 연기 한 줄기 뿜어 올린 듯, / 자욱한 숨결이 걷히고 나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 귀한 향나무로 지은 고결한 궁전. // 어쩌면 하늘 제5층의 신선, 청성이 / 수놓은 비단 커튼을 걷어 올리는 마법을 부린 걸까. / 그 뒤로 펼쳐지는 / 은하수를 바라보는 누각의 풍경.)

 

이것은 14페이지에 달하는 대장정의 시작일 뿐이었다. 물론 다른 독자나 번역가라면 원문을 보고 나와는 또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허난설헌이 구사한 한문의 묘미이자 번역이라는 과정이 지닌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 시의 서사를 현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강렬한 울림을 주는 영어로 변주해내는 것. 그것은 이 책을 작업하며 마주한 가장 큰 난관이었으며, 동시에 우리 번역이 끝내 도달하고자 했던 지향점이었다.    

 

*번역 : 대산문화재단 이지현

 

※ 영역 『난설헌집(Spring Mountain : The Complete Poems of Hŏ Nansŏrhŏn)』은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을 받아 필자와 허태영의 공역으로 미국 화이트파인(White Pine Press) 출판사에서 2025년 출간되었다. 

 

이안 해이트
시인, 번역가
시집 『Celadon』, 역서 『Homage to Green Tea』 『Magnolia and Lotus: Selected Poems of Hyesim』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