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병모식 소네트 - 구병모 장편소설 『절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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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총이 나왔다면, 그 총은 반드시 발사돼야 한다. 유명한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말로 알려진 이 창작 원칙은 나에게 ‘쓰기’보다는 ‘읽기’에 더 좋은 조언으로 다가왔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이런 이들 때문이었으리라. 이브는 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고, 판도라는 열지 말라는 상자를 여는 것인가. 빅터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끝내 실험을 멈추지 않고 괴물을 창조해 냈으며, 푸른 수염의 아내는 그리스 신화라는 좋은 선례를 몰랐던 것인지 끝내 불쾌한 진실을 문 너머로 마주하기에 이른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의 선택을 보고 있노라면, 결국 ‘읽기’는 나에게 ‘질문’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와 상자와 문이 바로 그들이 있는 ‘거기’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되니 『절창』 속 주요 화자 중 하나인 독서교사가 작품 서두부터 “하지 말라는 걸 해야만 비로소 세상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이치”(11쪽)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 역시 앞선 원칙과 같은 결로 다가온다. 이후 소설은 입주 독서교사와 저택에 감춰진 아가씨가 번갈아 가며 이 둘의 만남이 어떻게 성사된 것인지 독자에게 들려주는 것으로 전개된다. 이 만남의 처음은 “‘읽는’ 데에서 비롯했기에”(15쪽) 이 작품은 결국 ‘읽기’에 대한 은유로도 볼 수 있을진대, 그렇다면 “어떤 사태와 사람에 닿아 있다 할지라도, 본질적인 오독을 전제하지 않고는 생각하기가 어렵”(15쪽)다는 저 당부는 어떻게 읽어야 하나.
사십 대 여성인 독서교사는 남편을 잃고, 대행업체를 통해 입주 교사 일자리를 소개받아 저택의 비밀스런 이야기 속 한 페이지에 진입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가 처음 본 풍경은 이 저택의 주인, 보스인 문오언이 실장들을 시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 그리고 진상을 파악하기도 전에 문오언의 딸이나 혈연으로는 보이지 않는 스물 중반의 아가씨가 등장한다. 아가씨는 엉망진창이 된 이들의 상처를 만지며 그의 생각을 읽어내 보스에게 들려준다. 문오언과 아가씨가 만나게 된 경로에 대해 독서교사는 노골적으로 정보를 취사선택하여 전달하는 등 진실을 “영원한 암실 속”(64쪽)으로 숨겨둔다.
다 큰 성인 여성의 행동반경을 감시하고, 절창을 통해 누군가의 삶을 진창으로 밀어 넣는 문오언의 행동을 보고 그와 아가씨와의 관계를 범박하게 가스라이팅이라거나 그루밍 범죄로 일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읽음의 행위 끝에 도출된 결론이 틀렸을 가능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14쪽) 할 뿐 아니라 이에 “마음의 복잡성과 가변성”(15쪽)이 더해진다면 어떠한가. 아가씨는 텍스트 너머로 이렇게 묻는다. “평소 낭패스러운 상황과 맞닥뜨리면 그것에 대해 자기 마음을 온전한 한 줄의 문장으로 갖추어가며 생각하는 타입이야?”(99쪽). 누군가의 상처를 거쳐 문장으로 구사되기 이전, 맹렬하고도 직관적인 감각과 정보를 읽어낼 수 있는 그녀 앞에서 ‘읽기’ 행위를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읽기’의 행위를 경유하여 쓰인 이 글이 본격적인 오독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만 하겠다.
그러나 오독 역시 읽기이니 질문을 수반하게 되는 저 예견된 아이러니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을 읽어주길 바라는 문오언을 “열람을 거절당한 한 권의 책”(75쪽)으로 남겨두고 끝난 이야기. 그렇게 이 소설은 아가씨의 죽을 때까지 다른 모든 이를 읽어도 문오언, 당신만큼은 절대로 읽지 않겠다는 선언에 작가의 의도가 더해져 독자에게 영원한 “질문”(64쪽)으로 남게 됐다. 다시 말해 아가씨와 작가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해야만 비로소 이 이야기는 가능해졌다. 남편의 죽음이 문오언과 아가씨의 ‘읽기’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안 독서교사가 끝내 대행업체의 금기를 어겨서 이 저택에 들어오게 된 것처럼. 그러니 “진술 가능한 언어의 지배력 너머”(100쪽)에 “시계가 표시하는 눈금과 무관한 서사 구조 바깥에 존재”(100쪽)하는 취사 선택된 이 이야기들에 대해 오독하는 당연한 실례를 범해보는 것 외에는 우리에겐 다른 방도가 없거니와 마땅한 순리이지 싶다.
아가씨는 문오언을 사랑했고, 읽었다. 지금 이 문장은 분명 다소 성급한 곡해다. 또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당연한 독해를 왜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이냐고 내게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작품 말미에 이르러 이 장면을 읽었을 것이다. 독서교사는 남편의 유품인 총으로 아가씨를 겨눈다. 이에 문오언은 그간의 행적을 시인하고 자수하라는 겁박에 순순히 응하며 둘을 태우고 차를 몬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햄릿 속 구절을 인용하며, 자신을 죽음으로 모는 방향으로 조타한다.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 아가씨가 문오언의 상처에 직접 손을 대고 그에게 무어라 속삭이는 장면을 나도, 당신도 보았다. 그녀가 읽지 않기로 선언했기에 읽을 수밖에 없는 결론을 직면하게 됐다는 빤한 논지를 되풀이하려는 것은 아니다.
작중 빈번히 인용되는 희곡의 저자인 셰익스피어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규칙적인 운율을 지닌 정형시인 ‘소네트’ 또한 그의 희극/비극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 많다. 셰익스피어를 논한다면 셰익스피어로 응수하는 것도 제격이지 싶다. 읽지 않음으로써 가능해지는 읽기도 있다고. 그녀는 이미 한차례 그를 완벽하게 읽어낸 적이 있다. 독서교사의 남편이자 위장 기타 선생이었던 그를 문오언에게서 살리기 위해 뭐든지 한다고 하던 그 때, 문오언의 상처가 아닌 얼굴을 본 바로 그 순간에.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악의로 충만한 미소가 얼굴에 떠올라 있었지만 거기 왠지 모르게 슬픔마저 배색되어 있었고 나는 그 빛깔의 농도를 감지하여 언어로 형상화마저 할 수 있었지. 너는 만난 지도 얼마 안되고 심지어 누군지도 모른다는 이놈을 위해서는 뭐든 한다고 그러는구나.
(...)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지. 너 내가 뭘 시킬 줄 알고.”(249쪽)
그러나 문오언은 끝내 그녀가 오랫동안 예상해온 “그거”(185쪽), 그 일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원하는 그때, 그 일을 한다고 했으므로. 독서교사와 그녀의 남편은 물론 독자 또한 그 둘이 “당신이 생각하는 그 일”(185쪽)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문오언은 그녀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러지 않겠다고 했으며, 그녀는 아님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토록 온전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그거”는 어째서 조금도 오독되지 않는가. 이러한 텍스트는 구병모식 서술을 통해 독자에게 ‘읽기’와 ‘오독’의 차이에 대하여, 더 나아가 무엇이 ‘읽기’이고 ‘오독’인지 고심하게 만드는 언어적이고 서사적인 장치로 독자 앞에 당도한다. ‘읽기’와 ‘오독’은 과연 다르기는 한 것인지, 이에 대한 의문은 잠시 제쳐둔다.
이번에는 사랑 차례다. 문오언과 “같은 진창에 발을 담가놓고”(192쪽) 있음을 인지하고,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잔을 기울여 그가 기다리는 대답을 누설하겠다”(258쪽)는 아가씨의 독백은 충분히 자신의 감정에 대한 시인으로 보일만 하다. 그러나 그녀의 감정에 확신을 주는 문장은 오히려 이쪽이다. “아니지 않더라도, 아니기를 선택한다면”(268쪽). 그녀는 아니기를 선택해서, 아니지 않은 게 아님을 알게 되어 그를 읽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렇기에 오언(烏焉)을 읽는 것은 가능해졌다. 서로 모양이 지나치게 비슷한 까닭에 틀리기 쉬운 글자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을 보고 있자니, 그가 언젠가 언급했던 “진심”과 “진실”을 떠올리게 되고 만다.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죽어버릴 때까지, 필요하다면 세상 모든 인간을 읽어줄 수도 있”지만, “당신만은 절대로 안 읽”(268쪽)겠다는 말에서 어느 쪽이 진심이고 어느 쪽이 진실일까.
어쩌면 작가는 윤리적 이유로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않고자 문오언의 시점은 생략한 채 두 여성의 발화로만 작품을 전개해 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아가씨처럼 “세상에는 어떤 이야기도 부여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다고”(286쪽) 믿었던 걸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윤리적 차원이 전부라면 자신을 읽어줌으로써 이 진창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누군가의 몸에 절창을 내는 것에 동모한 아가씨의 서사를 『파과』의 작가가 이토록 길게 서술했을 리는 만무하지 않나. 그녀의 말마따나 세상에는 어떤 사연과 말도 허용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아닌 소설이라면 그의 이야기를 용인해볼 수도 있지 않나. 이미 “하지 말라는 걸 해야만 비로소 세상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이치”(11쪽)에 대해 수긍하지 않았던가. 다르게 말하자면, 여기 총이 있기에 겨누었을 뿐이다.
독서교사는 본분을 잊고 아가씨와 텍스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내 ‘읽기’의 행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읽는 것은 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용하다고 해서 그만둘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읽는 행위를 지속해 왔기에 살지 않았느냐고. 그렇다면 읽기의 행위에 살기를 대신 기입하는 것은 어떠냐고 말이다. 여기에 “한 명의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는 오랜 은유”(206쪽)라거나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인간들과 혹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 자신과 필연적으로 상종하거나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삶”(302쪽)이라는 진실을 구태여 나까지 다시금 거들 필요는 없겠다.
차라리 아니, 처음부터 내가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에게 주어진 텍스트는 타인의 상처이자 서사일 뿐, 애석하게도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건 문학이지, 타인이 아니다. 타인을 우리는 결코 이해할 수도, 읽을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무력한 진실과 우리가 맞바꿔 가진 게 진심은 아닐까. 삶이란 진실과 진심으로 기워진 소네트라서 우리는 어쩌면 타인의 진심을 오랫동안 헤아려 보고야 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저 불편한 사실이 조금은 위로가 되는 것도 같다. 그냥 이렇게 끝내도 좋으련만, 모든 비극과 희극은 인생을 감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짓말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구태여 적는다.
그렇다면 ‘소설’이란 작가가 독자에게 건네는 심심한 위로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이 구병모식 위로가 마냥 윤리적이거나 다정하지 않아서 더욱 미쁘다. 불편한 사실을 남기고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에 당신이 있다. 이제 다음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