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뷔작
“내가 그 사람이라는 걸, 문학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 시 「흑백사진」

  • 나의 데뷔작
  • 2026년 봄호 (통권 99호)
“내가 그 사람이라는 걸, 문학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 시 「흑백사진」

1.

‘나의 데뷔작’, 처음 글을 쓰게 된 계기와 데뷔 당시의 에피소드, 그리고 지금까지의 소회를 자유로운 형식으로 써 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살짝’ 사양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데뷔작은 기록으로 남아 있으니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기억된다. 하지만 그에 얽힌 에피소드는 — 나이 탓도 있겠지만 —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무엇보다 어쭙잖게 시와 소설, 희곡이라는 장르를 옮겨 다니며 등단을 세 번이나 했으니, 기억이 뒤죽박죽인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니,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고? 글쎄, 왜일까. 그 당시 등단에 얽힌 간절한 감정들에 비춰볼 때, 지금 문학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부끄럽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원고 청탁을 거부하지 못한 채 — 무엇보다 ‘자유로운 형식’이라는 말에 —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데뷔 당시의 에피소드와 글을 처음 쓰게 된 계기를 쓰자니, 먼저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왜 시인이나 작가 같은,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며 평생 밥을 먹고 살게 되었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짧은 지면이지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데뷔라는 특정한 순간만을 이야기해서는 부족할 것 같다. 글을 쓰게 된 ‘계기’라기보다, 글로 흘러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을 함께 돌아봐야 할 것 같다.

 

2.

몇 년 전부터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짧은 메모를 하는 버릇이 생겼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해 가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적당한 1막과 지루한 2막을 지나, 너무도 급작스럽게 결말로 치닫는 3막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적어 둔 메모는 이렇다.

 

내가 어렸을 때, 하늘은 소리 한 점 없이 고요하고 파랬다. 가끔 양떼구름이 지나가면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들리곤 했다. 이윽고, 하얀 양떼구름들이 사라지면 흰 접시들이 날아다녔다. 사실 그것은 어머니가 담장 뒤편으로 힘껏 내던진, 이 빠진 접시들이었다. 짧지 않은 유년을 보내는 동안 몇 개의 이빨이 빠지고 자랐다. 양떼구름은 지나가고, 흰 접시는 쉬지 않고 날아다녔다. 소리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가끔 누군가 담장 뒤편의 깨진 접시들을 주워 가곤 했다. 그런 날 밤이면 어김없이 거대한 비행접시들이 꿈속에서 날아다녔다. 비행접시 안에서 누군가는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고, 알 수 없는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멀리 던져야 생은 거짓말처럼 다시 되돌아오는가?”

 

반쯤은 사실이고, 반쯤은 꾸며낸 이야기다. 결국 거짓말이다. 하지만 모든 거짓말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엉뚱한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3.

초등학교, 그때는 국민학교라고 불렀는데, 어린 나이에도 나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인생은 기니까, 잠시라도 — 아주 짧게라도 — 다르게 살고 싶었다. 텅 빈 운동장, 흙먼지, 철봉, 거꾸로 매달린 정오의 태양. 구멍 난 운동화, 터진 핸드볼 공, 체육관에서 간간이 들려오던 고함 소리들. 그리고 매미 소리. 사람들은 내가 운동을 했다는 사실에 흥미를 보인다. 하지만 운동을 하지 않았던 그들을, 내가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모를 것이다.

결국 ‘잠시 짧게 다른 삶’이 아니라, 나는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꽤 오랫동안 운동을 하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86아시안게임이 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88서울올림픽이 있었다. 내가 그 무대 위에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대다수 국민처럼, 나는 관객으로서 그 장면들을 지켜봤을 뿐이다.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80년대, 서울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영등포역에는 거지들이 많았다. 그 당시 거지들은 서울 도처에 하수구 맨홀 뚜껑처럼 널려 있었지만, 어린 내가 보기에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한 운동선수들 같았다. 그 거지들이 사라진 건 내가 열일곱 살쯤이었을까, 86아시안게임과 그 뒤에 치러진 88서울올림픽 무렵이었다. 국가대표 선수들을 관리하듯, 거지들은 국가의 ‘특별 관리 대상’이 되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들은 올림픽 경기장의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이 되어 넘을 수 없는 가난과 생을 향해 도약하고 있었다. 몇몇은 실패했고, 몇몇은 성공했다. 성공할수록 장대를 짚고 넘어야 할 바의 높이는 더 올라갔다. 그렇게 하늘 저편, 먼 곳까지 올라간 그들은 시커멓게 때 낀 늘어진 목에, 신이 하사하신 꽃다발을 걸고 신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다시는 지상 따위로 내려오지 않았다, 모든 성자가 그러하듯이.

 

나는 더 이상, 내가 없는 무대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추리닝을 벗기로 했다.

 

4.

당시 우리 집은 영등포와 인접한, 구로공단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광명시에 있었다. ‘광명’이라니 —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공장 굴뚝의 매연을 떠올리면 어처구니없는 이름이기도 하다.

추리닝을 벗은 나는 운동선수로서의 대학 진로를 포기하고, 공장에 다니며 재수를 하기로 했다. 이른바 ‘일반인’으로서의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지금 내게 기억에 남는 것은 공장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공장 안이 어떠했는지보다 공단의 중심 상권이었던 가리봉 오거리의 가리봉 시장이다.   

지금은 구로공단이 구로디지털단지로 바뀌어 공장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가리봉 오거리와 시장은 아직 남아 있다. 다만 풍경은 달라졌다. 그때는 거의 모두가 한국인 노동자들이었지만, 지금은 이주노동자들 — 특히 중국 교포와 중국인들 — 이 다수를 이루며 하나의 중국인 거리처럼 변해 있다.

내 기억 속 가리봉 오거리는 시장 귀퉁이로 들어가면 보이는, 비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다세대 주택들이다. 일명 ‘닭장’이라 불리던 노동자 숙소들. 노동자들이 모두 출근하고 없는 텅 빈 골목에서, 홀로 바람을 타고 춤추듯 골목 끝으로 사라지던 검은 비닐봉지들. 그리고 담벼락에 붙어 있던 구인 광고 앞에, 영원토록 멈춰 서 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머리 위, 저편으로 여기저기 불쑥불쑥 솟아 있던 공장의 굴뚝들. 그때 나는 그 굴뚝들이 그들의 잘린 손가락처럼 보였다.  

왜였을까.

  

5.

필자의 등단작이 수록된 시집    

그리고 많은 일이 지나고, 군대를 제대한 뒤였다. 우연찮게 예전에 구인 광고가 붙어 있던 바로 그 담벼락에서 문학 동인 모집 전단지를 보게 되었다. 그때 내 안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먼 곳에서 왔군요. 하지만 더 먼 곳으로 가야 할 거예요.” 

더 먼 곳. 다른 삶. 용기를 내 문학 동인에 들어갔다. 문학은 많은 사이를 준다. 잠시 멈추고, 생각하고, 기다리게 한다. 때론 불필요한 문장처럼 그러나 끝내 지우고 싶지 않은 문장처럼 말이다.  

잠시, 문학 동인에 불필요한 문장처럼 끼어 있다가 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그 뒤로, 어찌어찌 문예창작과에 입학을 했고, 창신동 산꼭대기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창신동은 그때나 지금이나 봉제공장이 밀집한 지역이다. 비탈진 골목을 올라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들리던 미싱 소리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귀에 박혀 있다. 2평 남짓한 자취방에서 쓰고, 읽고, 또 쓰고, 다시 읽었다. 하루 8시간, 코트를 달리듯, 벚꽃이 만개한 봄날 밤 잔업을 하듯. 그 부지런함이 멈추지 않는 미싱 소리처럼 숭고하길 바랐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아,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했다. 등단작은 구로공단의 기억을 바탕으로 쓴 「흑백사진」이라는 시였다. 노동자의 잘린 손가락에 관한 시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기억 속에서 검은 비닐봉지처럼 나풀거리며 나타난 그 시절의 감정들은 분명코 시가 준 선물이었다. 그래서 시는 내게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특별한 선물이 아닐까 싶다. 오해가 될 것 같아 밝혀 두자면, 나는 손가락이 잘린 적은 없다. 그래서인지 등단한 뒤 한동안, 버릇처럼 내 손가락을 들여다보곤 했다.

이후 소설로도 등단했는데, 그 작품 역시 광부들의 이야기였다. 이어서, 너무나 과분하게도 희곡으로도 등단했다. 아마도 그것은 창신동 산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려가면 대학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연극은 ‘업’이 쌓이지 않는 작용과 반작용이라서 좋은 것 같다. 무엇보다 희곡의 언어는 다른 서사 장르의 언어보다 더 많은, 빛나는 장점들을 지니고 있다. 부연하자면, 희곡의 언어가 별빛처럼 발광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별빛처럼 어둠 속에서 발광하는 ‘인간의 말’. 

 

6.

나는 요즘도 가끔 대학로에서 비탈진 골목길을 따라 창신동 산꼭대기에 올라가 보곤 한다. 그곳도 많이 변했다. 미싱 소리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무엇보다도 구멍가게들이 번듯한 편의점으로 바뀌어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제는 없는 구멍가게 앞을 지나간다. 그 옛날 늙은 구멍가게 주인은 외계에서 잘못 불시착한 사람처럼 따분한 얼굴로, 어디 한 점도 없는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허공에 구멍을 뚫겠다는 각오 같은 것, 그 구멍으로 자신이 온 외계, 어디쯤, 비행접시를 타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듯. 구멍가게들이 사라졌다. 사라진 구멍가게 자리에는 24시간 편의점이 들어섰고, 그 안에는 젊은 친구들이 있다. 그들 역시 외계에서 지구로 잘못 불시착한 듯, 시큰둥한 얼굴로 어디 한 점 없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그 따분함이 나에게는 왜 분함으로 보이는지 나도 알 수 없다. 어릴 적 비행접시 안에서 누군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얼마나 멀리 던져야 생은 거짓말처럼 다시 되돌아오는가?”

 

7.

급작스럽게 결말로 치닫는 3막처럼 이제 글을 끝내야겠다. 글을 끝내려 하니 문득, 내 삶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그걸 알고 싶어서 나는 여전히 문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해도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풍경은 반복되고, 그 풍경 속에서 우리는 결국 자신의 삶과 마주하게 된다.

더 나은 삶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더 나은 삶은 없고, 다만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삶만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유년 시절의 엉뚱함으로, 지금도 나의 무대를 찾기 위해 미싱 소리 같은 숭고함을 좇으며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대학로에서 연극을 연출하며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니, 살아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데뷔작에 얽힌 에피소드란 결국 데뷔에 이르기까지의 삶 전체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데뷔를 하게 되면, 누구라도 이런 문장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그 사람이라는 걸, 문학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최치언
시인, 극작가, 1970년생
시집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장편소설 『색다른 이야기 읽기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게』, 희곡집 『미친극』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