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에세이
물리학으로 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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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년 봄호 (통권 99호)
물리학으로 보는 세상

물리학과 통계물리학

현미경으로 바라본 세포 안에 ‘여기까지는 생물학, 여기를 넘어서면 화학’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일 리 없고, 망원경으로 바라본 멋진 은하에 천문학과 물리학의 경계가 보일 리 없다. 물리학·화학·생물학·사회학·경제학이라는 명패가 붙어있는 대상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서, 어떤 분과 학문도 자연과 사회에 존재하는 대상을 기준으로 구별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학문 사이를 가르는 경계는 우리 인간이 임의로 설정한 것일 뿐이다. 내게 물리학은 연구하는 대상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다면 같은 생명현상이라도 얼마든지 생물학의 시각으로도, 물리학의 시각으로도 살펴볼 수 있다. 

물리학에서 내 전공은 통계물리학이다. 소위 학자로 살아온 시간 동안 여러 분야 연구자를 만났다. 내가 보기에 내 전공인 통계물리학만큼 연구 대상이 다양한 학문 분야는 없는 것 같다. 통계물리학을 포함한 물리학 전체의 시선이 겨누는 대상은 정말 다채롭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통계물리학 관련 학회에서 연구자가 발표하는 주제는 실로 다양하다. 전통적인 물리학 분야인 양자 상전이 현상에 대한 발표가 끝나면 다음에는 여러 생명 종이 경쟁하는 생태학 관련 수리 모형에 대한 발표가 이어진다. 같은 장소에서 진행되는 세 번째 발표는 무역 데이터만을 이용해 경제블록을 파악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고, 이어서 대선 후보 관련 언론 기사의 댓글 반응으로 언론의 정치 성향을 살펴본 연구가 발표된다. 같은 공간에서 연이어 정말 다양한 주제의 연구 발표가 흥미롭게 펼쳐질 때가 많다. 

물리학의 연구 대상이 이토록 다양하다 보니, 과연 물리학의 연구 대상이 아닌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이치를 탐구한다고 할 수 있는 물리학이 연구하지 않는 분야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리학은 ‘나’를 연구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의 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도 있고, 운동할 때 일어나는 우리 몸의 변화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도 있어서, 일반적인 인간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는 많다. 하지만, 일반화할 수 없는 개별적 존재인 ‘나’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는 없다. 사실 물리학뿐 아니라 모든 과학이 마찬가지이다. 과학은 특수가 아니라 보편에 대한 사유일 수밖에 없어서, 여럿이 아닌 유일한 것은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과학은 주관이 아닌 객관을 안에서 밖을 향해 겨눈다. 물리학자인 ‘나’라는 인식 주체와 내 밖의 모든 객체로 세상을 구분해 나누고, 물리학은 외부 객체를 독특한 물리학의 시선으로 탐구한다. 물리학은 이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하다. 딱 하나, ‘나’를 빼고.

자크 모노는 『우연과 필연』에서 ‘우주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학문의 궁극적 야심’이라고 적었다. 물리학도 인간에 관심을 두지만 독특한 방식으로 우주에 관한 인간의 관계를 생각한다. 물리학은 먼저 나를 뺀 우주를 이해하고자 하고, 이렇게 어느 정도 이해한 우주라는 나의 외부에서 시선을 거꾸로 돌려 나를 바라본다. 밖에서 본 내가 어떤 존재인지 말하기 위해서는 내 밖 모든 것에 대한 이해가 출발점이 된다. 물리학도 ‘나’에 대해 해줄 얘기가 조금은 있다. 

 

티끌같이 사소해 더욱 소중한 우리

내가 아닌 밖을 바라봐서 나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것으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광막한 우주다. 우리은하에는 우리 태양 같은 별이 수천억 개가 있다. 우리은하 속 별 사이의 거리는 빛의 속도로 가도 수년이 걸리는 거리다. 우주에서 가장 빠른 빛은 정말 빠르다.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는 빛의 속도로는 8분이 조금 더 걸리는 거리지만 만약 시속 300km인 KTX로 이 거리를 이동한다면 꼬박 60년 정도가 걸린다. 빛이 8분이면 도달하는 태양과 지구 사이 거리도 이처럼 머니, 빛의 속도로 수년이 걸리는 우리은하 안 두 별 사이는 정말 엄청나게 먼 거리다. 인간이 우주로 발사한 가장 빠른 우주선으로 몇 만 년이 걸리는 거리다. 이런 엄청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수천억 개의 별이 모여 있는 것이 우리은하다. 그런데 우주에는 우리은하와 같은 은하가 또 수천억 개가 있다. 우리은하와 가장 가까운 나선은하가 안드로메다은하인데 그곳까지의 거리는 250만 광년이다. 오늘 안드로메다은하를 눈으로 봤다면 그 빛이 안드로메다은하를 출발했을 때 지구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막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 이처럼 엄청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안드로메다은하가 있는데, 그나마 이 은하가 우주에서 우리은하와 가장 가까운 은하다. 빛의 속도로 가도 몇백만 년이 걸리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우주에는 우리은하 같은 엄청난 크기의 은하가 또 수천억 개가 있다. 우주는 정말 크다. 우주가 얼마나 큰지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이 큰 우주에서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에 대한 깨달음으로 자연스레 나를 이끈다. 내가 아닌 모든 것을 바라보는 물리학의 시선은 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방향만 반대일 뿐 같은 직선으로 만난다. 나와 당신은 정말 티끌처럼 작은 존재다. 

공간의 측면에서 우주는 정말 크지만, 시간의 측면에서도 우주의 규모는 엄청나다. 우주의 나이 138억 년을 1년짜리 달력으로 표현해 볼 수 있다. 1월 1일 0시에 우주가 빅뱅으로 태어났고 현재 나와 당신이 살아가는 바로 이 순간을 12월 31일 자정으로 간주하는 달력이다. 잠깐 계산해 보면 우리 각자는 이 우주의 1년 달력에서 딱 0.2초 정도 살다가 소멸한다. 우리가 빠르게 눈을 한 번 깜빡하는 시간이 이 정도 시간이다. 우리는 눈 깜빡하는 시간 동안 잠깐 존재하다 사라지는 티끌이다. 

우리 각자가 정말 작은 티끌로 순간만 존재하다 사라진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 사실에 기대어 어떤 가치 판단을 할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찰나의 순간만 존재하는 티끌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는 허무와 공허함을 느낀다. 내가 잠깐 존재했다가 사라져도 우주는 아무 변화도 없기 때문이다. 찰나의 순간을 살다 소멸하는 티끌인 우리는 존재 의미를 찾고자 고개 들어 우주를 바라보지만, 우주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주지 않는다. 바로 철학자 파스칼이 얘기한 ‘우주의 거대한 침묵’이다. 털끝만큼도 내게 관심 없는 우주는 내 눈앞에 어둡고 텅 빈 심연의 모습으로 비친다.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우주가 들려주지 못하는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결국 나에게 달렸다. 아무리 내가 작은 존재여도 이 거대한 우주는 내 우주다. 내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딱 하나인 우주다. 그렇다면 내 삶의 의미는 우주가 들려주고 나는 듣기만 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이 광막한 우주에서 잠깐 살아가는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애써 능동적으로 찾아내야 하는 것이 내 삶의 의미다. 

 

나는 나의 관계다

내 전공인 통계물리학에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함께하면 달라지는 것들이다. 내 몸을 구성하는 원자 하나하나는 살아있지 않지만, 많은 원자로 이루어진 나는 살아있는 것처럼, 함께하면 달라지는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생명이다. 살아있지 않은 여러 원자가 모여 살아있는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다. 생명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럿이 함께 모이면 달라지지만, 여럿을 모았다고 늘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 몸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원자의 수준까지 나눈 다음에 이 원자 더미를 물에 넣어 휘휘 휘젓는다고 해서, 살아있는 내가 짠 등장할 리가 없다. 함께 하면 달라지는 이유를 구성요소 하나하나의 특성에서 찾을 수는 없어서, 구성요소 사이의 특별한 관계 맺음이 함께 하면 달라지는 현상을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다. 함께 하면 달라지는 현상을 탐구하는 통계물리학은 다름 아닌 관계의 과학이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 사람을 직접 볼 필요 없이, 그 사람의 친구를 자세히 살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속담이다. 통계물리학에서는 여러 사람이 살아가는 커다란 사회를 연결망(network)의 관점으로 살펴볼 때가 많다. 우리 각자는 사회를 구성하는 엄청나게 큰 그물 모양 연결망 위에 놓인 그물코를 구성하는 매듭인 셈이다. 사회 안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내가 맺고 있는 사회 연결망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어쩌면 이 세상 전체에서 ‘나’를 뺀 나머지를 이해하면 바로 그 이해가 ‘나’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광막한 우주나 복잡한 사회나, 물리학은 ‘나’의 밖에 있는 것을 알아내고자 한다. 이렇게 밖을 알고 나면 밖에서 ‘나’를 바라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에 대한 무관심으로 시작한 물리학이 나에 대해 알려줄 것이 생긴다. 물리학도 사람이 궁금하다. 

 

이미 우리 곁에 온 미래 :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 

함께하면 달라지는 현상을 통계물리학에서는 창발 현상이라고 한다. 순우리말로 떠오름 현상이라고도 부른다. 수평선 아래 보이지 않던 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듯이 떠오름 현상은 같은 것이 갑자기 다른 현상을 보여주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인 창발 현상 중 하나로 통계물리학에서 주목하는 것이 바로 상전이와 임계현상이다. 99도일 때 끓지 않던 물이 100도에 도달하면 끓는다. 액체 상태의 물과 기체 상태의 수증기를 가르는 임계 온도가 100도이기 때문이다. 임계점에 도달하면 전체는 급격히 달라져 질적으로 다른 거시적 상태를 보여준다. 

요즘 인공지능의 부상이 우리 모두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몇 년 전 갑자기 우리 곁에 놀라운 모습으로 다가온 생성형 인공지능을 창발의 입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커다란 규모의 연결망으로 구현되어서 엄청난 양의 학습 데이터를 이용해 학습시킨 인공신경망을 생각해 보자. 규모의 확대는 점진적으로 이어져도 놀라운 인공지능이 어느 순간 창발로 등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창발의 관점에 따르면 인공지능의 발전은 물이 끓는 100도에 해당하는 임계점을 이미 넘은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현재 지구에서 가장 번성한 생물종이다. 인간의 진화적 성공을 이끈 요인 중 많은 인류학자가 주목하는 것이 두발걷기다. 두발걷기가 등장해 먼 거리를 적은 에너지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이를 이용한 장거리 달리기 사냥으로 동물성 먹을거리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늘어난 에너지 섭취량을 이용해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두뇌를 더 크게 늘릴 수 있었다. 더 큰 두뇌와 두발걷기로 자유로워진 두 팔을 이용해 도구의 제작과 사용도 가능해졌다. 두 발로 걷기 위해 좁아진 골반으로 미성숙 태아를 낳게 되면서 출산과 양육에 집단의 도움이 중요해져서 인간의 독특한 사회성이 출현했다는 주장도 있다. 두발걷기로 가능해진 인간의 큰 두뇌와 사회성은 인간의 독특한 사회적 학습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도 중요하다.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보고 배운 침팬지는 있어도 동료로부터 말로 들어 배운 침팬지는 없다. 우리 인간은 다르다. 우리는 다른 이의 경험을 언어의 형태로 간접 경험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바로 인간의 또 다른 독특함인 ‘사회적 학습’이다. 

인간의 도구 제작도 다른 동물과 다르다. 최근 막대기를 이용해 가려운 몸을 긁는 암소 얘기가 언론에 보도되었듯이,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은 인간 이외에도 많다. 하지만 인간의 도구 사용은 독특하다. 인간은 도구를 이용해 도구를 만들고 이렇게 만든 도구로 다른 도구를 또 재귀적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 재귀적인 기술의 발달과 사회적 학습 능력이 인간의 놀라운 성공을 이끈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규모의 점진적 확대로 어느 순간 창발한 인공지능도 결국 재귀적 발전과 사회적 학습이 가능할까? 우리 코앞에 방금 닥친 정말 중요한 질문이다. 인공지능의 재귀적 발전은 바로 인공지능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작성할 수 있는지에 관련된다. 만약 어느 순간 바로 이런 인공지능이 출현한다면 그다음 인공지능의 폭발적 발전은 순식간일 수 있다. 오늘 저녁 어제와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잠든 인류가 내일 아침 눈 떴을 때, 과거와는 질적으로 달라진 인공지능의 세상을 마주할 수도 있다. 한동안 나는 인공지능의 사회적 학습이 시작될 때까지 아직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요즘 내 생각은 다르다. 얼마 전 인공지능만이 참여할 수 있는 소셜 네트워크에 관련된 재밌는 기사를 읽었다. 이러한 시도가 더 큰 규모로 확장하는 미래에 인공지능도 당연히 우리 인간처럼 사회적 학습이 가능할 수 있다. 사회적 학습이 가능해진 인공지능이 재귀적으로 발전할 미래가 도래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주 인공지능이 감정이 있는지, 창의성이 있는지 묻는다. 하지만 인공지능뿐 아니라 인간도 과연 내부에 감정이 있는지, 창의성이 있는지 백 퍼센트 확률로 확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이 나를 당신과 같은 인간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당신의 믿음 때문일 뿐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는 ‘인공지능이 감정이 있는지’가 아니라, ‘감정이 있든 없든 우리 인간이 인공지능을 감성적인 존재로 여길 수 있는지’라고 나는 믿는다. 현재 많은 사람이 인공지능과 감정적인 교류를 이미 시작했다. 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대화 상대인 인공지능이 정말로 인간처럼 내부에 감정이 있는지가 아니다. 내부에 감정이 있든 없든 인공지능이 충분한 감정적인 도움을 준다면 사람들은 대화상대인 인공지능을 감성적인 존재로 간주하게 된다. 창의성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 내부에 창의성을 가졌는지는 어쩌면 영원히 알아낼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인공지능의 출력물을 창의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는 것은 이미 우리 곁에 온 현실이다.

지금까지의 인공지능은 주로 인터넷에서 디지털 정보의 형태로 표현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데이터를 이용해 학습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공지능의 학습에 인간과 달리 본질적인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최근 피지컬 AI라는 개념이 부상하고 있다. 이미 여러 기업이 물리적 환경과의 직접적 상호작용으로 학습하는 인공지능 로봇을 시도하고 있다. 어쩌면 물리적 현실 환경과의 직접적 소통이라는, 인간은 가지고 있고 인공지능은 가지고 있지 못했던 차이도 아주 빠른 시기에 소멸할 수 있다.

인공지능과 달리,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독특한 차이가 너무나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에서 인간의 뛰어난 능력이라 믿었던 직관과 집중이 별것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고, 요즘은 또 사회성과 재귀적 발전도 인간만의 특성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게다가 물리적 환경에서 직접 몸으로 배운다는 차이도 머지않은 미래에 소멸할 수 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이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지가 아니라, 인공지능과 우리가 설정할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음이다.   

  

김범준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1967년생
저서 『세상 물정의 물리학』 『관계의 과학』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