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김기택 선생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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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시인,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1957년생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갈라진다 갈라진다』 『울음소리만 놔두고 개는 어디로 갔나』 『낫이라는 칼』 등 |
남승원 며칠 동안 추웠던 날씨가 오늘은 좀 풀렸습니다. 좋은 봄 날씨였다면 선생님과 같이 거리도 걸으면서 이야기 나누었으면 좋았을 텐데, 마주하고 대담하려니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네요. 사실 선생님과 길다면 긴 시간의 인연이 있었는데요, 그래도 작년에 자주 뵙는 기회가 자연스럽게 있었던 것 같아요. 늦게까지 술자리도 함께했었지요, 신년에 이렇게 뵈니까 더 반갑습니다. 올해도 더 자주 뵐 수 있는, 첫걸음이 되는 자리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해가 붉은 말의 해라고 하더라고요, 새로운 해를 맞아서 선생님 근황과 독자들에게는 덕담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김기택 지난해 이쯤에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무얼 해도 손에 잡히지 않고 조마조마했어요. 새해에는 모든 게 제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그래서 게으름 부리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하지 않아도 이미 복을 받은 것 같습니다.
지금 게으름 부린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저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게으름이 저한테는 아마 굉장히 빡빡한 일정일 것 같아요(웃음). 제가 보기에 선생님은 공부하고 시 쓰기만 하시는 분 같아서 시 창작을 제외한 취미 같은 사생활이 궁금했었어요.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시 쓰는 일 말고 취미라고 할 만한 게 없어요. 왜 취미가 없을까 생각해 보니,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느라 다른 데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 고아로 자라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육원에서 보냈고, 맨몸으로 자립해야 했기 때문에 열심히 밥벌이해서 제 앞가림할 정도의 경제적인 기반을 다져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밥벌이하는 동안 틈틈이 대학 공부하고 시를 쓴 것이 유일한 일탈이었어요. 우리 세대는 열심히 일만 하다가 막상 은퇴하면 놀 줄을 모른다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나도 그런 사람입니다.
선생님께서 보육원에서 지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네요. 그러면 언제부터 시를 써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요?
공업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안양에 남자 고등학교는 안양공고가 유일해서 안양에서 중학교 졸업한 남학생은 거의 다 그 학교를 다녔어요. 수업이 재미없는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문학 활동을 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그 친구들과 어울리지는 않았는데 졸업 후에 친구가 그 모임에 들어오라고 해서 함께 어울리면서 습작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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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는 흔히 하는 말로 돈이 안 되는 일이라고 하잖아요. 선생님의 시 쓰기 여정을 보면 전공으로는 영문학을 하셨고, 또 직장 생활과 병행하시기도 했고요. 또 시를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셨잖아요. 서로 달라 보이는 두 가지 일을 평생 같이 하는 놀라운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곧 선생님의 시 세계인 것처럼 다가오기도 하고요.
직장 생활과 시 쓰기를 병행하는 게 힘들었어요. 책상 앞에 앉아서 시 쓰는 것은 못 해요. 당시에는 다 퇴근이 늦고 회식도 잦아서 집에서 쓸 여유도 없었어요. 회사에서는 써지지도 않았지만 쓰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길에서 시를 썼어요. 걷거나,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혼자 밖에서 움직이면 자유로워지고 숨도 쉬어지고 내 안에 뭔가 꿈틀거리는 어떤 움직임이 느껴졌어요. 길에서는 주변이 아무리 시끄럽고 복잡해도 ‘나’에게 집중이 됐어요. 자투리 시간이나 바쁜 시간의 틈에서 급하게 메모하곤 했습니다. 걸으면서 되새김질하듯이 머리에서 시를 꺼내서 퇴고하기도 하고요. 일과 시 쓰기 사이의 균형 감각이라기보다 그 상황이 그렇게 하도록 나를 밀어낸 것 같아요.
저는 선생님이 책상에 가만히 앉으신 채 고요 속에서 시를 쓰실 거라고 상상했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그 반대라는 점이 저한테는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이제 선생님 시집을 따라가면서 질문을 드려볼게요. 대담을 앞두고 선생님 시집을 다시 꺼내서 읽었는데 시적 대상을 향하는 선생님 특유의 세밀하고도 변함없는 시선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의 시적 변화를 놓칠 수는 없는데요. 두 번째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이 ‘소’에 보다 주목하고 있다면, 네 번째 시집 『소』(2005)에서 ‘소’와 관계 맺는 ‘나’가 등장하면서 시적 사유의 구체적 대상이 조금은 확장됩니다. 선생님의 시적 시선은 한결같으면서도 변화를 보여주고 있어요. 무려 10여 년 동안이나 ‘소’를 관찰하시다니요.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대상을 관찰하고 사유하는 선생님만의 비결이라고 할까요. 시인을 지망하고 있는 문학청년들도 무척이나 궁금하지 않을까 싶어요.
대상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시적 방법이 『소』에 조금 보이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은 소에 관한 시라기보다는 소를 보는 느낌을 쓴 것입니다. 소를 똑같이 그린다면 단순한 재연이 되겠죠. 똑같은 대상이라도 보는 사람마다 느낌은 다 다르잖아요. 중요한 것은 대상이 보는 자의 몸으로 들어와 결합하면서 일어난 일이에요. 보는 사람의 내면과 그 대상이 교차하고 얽히면서 생기는 심리적 사건, 감정적 사건, 그것이 관찰과 묘사의 대상이죠.
느낌은 아무리 정교하게 그린다고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잖아요. 느낌은 이름 붙여지지도 않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언어 이전의 영역에 있으니까요. 언어를 쓰면 사물이나 현상을 제한하고 고정하게 되는데 그 사물이나 현상은 언어 이전으로 돌아가서 계속 움직이잖아요. 그러니 느낌을 다 그릴 수는 없죠. 묘사는 의미를 만들거나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여줄 뿐입니다. 사물이나 사건 현장 앞에 서 있게 하고 경험하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독자 내부에 있는 감정·욕망·감각 같은 에너지가 깨어나도록 자극할 뿐입니다.
말씀해 주신 그 묘사의 과정에서 제가 선생님 시의 매력이라고 느끼는 것이 있어요. 지금 선생님께서 ‘그림을 그린다’라고 표현해 주셨는데, 실제 회화 역사를 보면 대상에 대한 집중이 추상으로의 변화를 이끌게 되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의 시는 추상으로 흘러가지 않으면서도 시인의 시선이 뒤로 빠지면서 대상과 독자를 마주하게 만드는 구체적 정황으로 집중시킵니다. 이것은 우리 시에서도 드물게 발견할 수 있는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말씀 듣다 보니까 독자들을 끌어들인다는 선생님만의 목표가 더 잘 느껴집니다.
소가 자신이 겪는 부조리나 슬픔을 말할 수 없는 무능력자라면, 나는 그 느낌을 말할 수 없는 무능력자죠. 말하지 못하는 무능력과 알아듣지 못하는 무능력의 만남이죠. 이렇게 소통이 단절된 지점, 언어가 실패하는 지점에서 시가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아무리 읽으려고 해도 읽을 수 없는 소의 눈이 말이 아닌 다른 에너지를 불러오는 거죠. 김종삼의 시 「묵화」를 보면 소와 함께 고된 노동을 끝낸 할머니가 물 먹는 소의 목덜미에 손을 얹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 순간의 촉감 말고는 어떤 말도 없어요. 말이 방해하지 않으니까 감각이나 감정, 이런 에너지가 살아나는 것 같아요. 그렇게 그 침묵은 언어가 아닌 다른 소통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에서 고아나 과부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얼굴이 윤리적 호소이고, 상처받을 가능성이며, 무저항에서 오는 힘이라고 말해요. 연약한 얼굴이 윤리적 명령을 한다는 거죠. 소의 눈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지만 강력한 윤리적 호소가 있습니다. 소의 눈이 레비나스가 말한 ‘얼굴의 현현’의 동물적 버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관찰과 묘사는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고 약자의 얼굴 앞에, 소의 눈앞에 독자를 데리고 갑니다. 그러면 독자 내면에서 다른 에너지가 나와서 들리지 않는 말을 스스로 듣게 하지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자니 공감 차원에서 시가 수행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기존 동물 소재를 다루셨던 것과 비교하면 선생님의 최근작들에서 동물이 더 구체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일상 속 동물로 향하는 조금 다른 방향성이 생긴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낫이라는 칼』(2022)에 수록된 「강아지는 산책을 좋아한다」 같은 작품을 예로 들 수 있겠죠?
등단 후에 많이 쓴 작품이 동물 시였어요. 동물을 길러본 적도 없고 반려견과 함께 사는 것도 아닌데 동물 시가 나와서 이상했죠. 초기에는 소가 여러 편 나왔는데 근래에는 개나 고양이가 많이 나오네요. 산책하다 보면 걷는 시간보다 냄새 맡는 시간이 긴 개를 보게 돼요. 저 콧속으로 들어가는 냄새의 비밀은 무엇일까, 개를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저 본능적인 힘은 무엇일까, 나도 저 광활한 야생의 세계로 들어가 보고 싶다, 저 냄새 같은 미지의 신천지를 내 안에서도 탐험하고 싶다, 그런 호기심과 욕망이 이 시에 있는 것 같습니다. 동물은 내 안에 있는,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나이면서도 내가 아닌 이상한 타자를 느끼게 하죠. 내 안에 본래 있었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것 같은 어떤 존재, 가끔 내 안에서 나오려고 하는 원초적인 존재가 나오도록 자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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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만큼 흥미로운 말씀이네요. 사실 선생님이 의도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아지에 대한 시들은 정말 귀엽게 느껴지거든요. 제가 선생님께 예전에 강아지를 키우시냐고 질문했던 적이 있었는데, 저도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키워본 사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 이 작품에 담겨 있기 때문이었어요. 반려인으로서 선생님의 귀여운(?) 시들을 따라 읽다가 2022년도 겨울에 발표했던 「하교 시간」이라는 시를 만났을 때, 선생님께서 왜 강아지 같은 반려동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에 관한 답을 저 혼자 찾은 듯한 느낌을 받은 적도 있어요. 하교하는 아이가 엄마와 만나는 장면을 다룬 이 시가 마치 강아지가 냄새를 탐색하는 것처럼 원초적이고 순수하게 그려지고 있더라고요.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사랑 같은 것들을 말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시게 된 걸까요?
밝고 유쾌하고 웃음을 유발하는 시를 더 쓰고 싶은데 그런 시 쓰기가 더 어렵고 많이 쓰지도 못했어요. 이런 시가 가끔 나오는 이유는 내 안에 있는 다양한 목소리를 꺼내고 싶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 몸은 여러 유형의 배우가 등장하는 드라마니까요. 시집에 그런 여러 목소리를 배치하고 싶기도 하겠지요.
선생님께서는 동시나 동화도 쓰셨는데요, 드라마 속 다양한 인물을 이야기하신 것처럼 특히 어린아이의 세계나 목소리가 선생님께 더 각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시를 쓸 때 가끔 내 안에 어린이의 시선이 있다는 게 느껴지거든요. 어린이는 관념적 사고가 발달하지 않은, 그러나 감각 발달과 에너지 활동이 활발한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과 동물 중간에 있는 것 같아요. 어린이 감각은 언어와 관념으로 굳어지기 전의 말랑말랑한 상태이지요. 그래서 어른이 별것 아니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도 어린이에게는 다 새롭고 신비로운 것이죠. 어린이는 어른이 사소하고 당연해서 재미없어하는 것들을 신기하게 보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린이가 보면 평범한 것들이 지금 막 처음 태어난 것처럼 생생하게 바뀌죠. 이 능력은 우리도 한때 갖고 있었으나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거예요.
「소」에서 시작해서 최근 관심사까지 질문드렸습니다만, 제 개인적 생각으로 만일 선생님께 하나의 질문만 해야 한다면 『사무원』(1999)과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하나의 작품으로 고정되길 원하지 않는 시인께는 싫은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지만요. 그런데 사실 제가 시집 『사무원』을 좋아하는 건 이전 시집과 다르게 선생님이 뭔가 내면적인 것들을 터뜨리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솔직한 모습이 드러나는 게 좋게 느껴졌거든요.
회사 생활을 20년간 했어요, 늘 목표 달성이나 수익성 극대화 같은 압력에 눌리면서 같은 말, 같은 생각,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내 사고나 감각이 마비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무원」에 등장하는 사람은 이 마비가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이른 사람이죠. 「사무원」은 내 시 쓰기 스타일에서는 조금 비껴간 시인데, 그때는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아요. 마비되지 않도록 시가 나를 자극하고 깨우는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겠죠. 이 시는 자본주의 체제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대신 몸과 마음이 기형적으로 왜곡된 한 개인을 보여주고 있어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대신 습관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 그래서 의자—인간이 되어버린 사무원을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냉소적으로 조롱한 거죠. 「직선과 원」(『소』)에 말뚝과 목줄에 매여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던 개가 나오는데, 거기에 적응해서 나중에 목줄을 풀어주어도 말뚝 주변만 빙빙 돕니다. 그 개의 망가진 몸은 말뚝과 목줄의 폭력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이지요. 사무원의 몸도 그렇습니다.
‘사무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 번 더 말씀드리자면, 여섯 번째 시집인 『갈라진다 갈라진다』(2012)에 있는 「넥타이」라는 시가 있는데 저는 이 작품이 마치 ‘사무원’의 슬픈 결말처럼 느껴졌어요. 선생님의 전체 시력에서도 그렇고 한 편의 시 작품에 한정해 봐도 작은 것들을 놓치지 않는 선생님만의 방식이 슬픔 속에서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 「넥타이」의 배경은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계시던 분의 자살이었어요. 직접 본 게 아닌데도 ‘넥타이’에 목맨 몸이 발버둥 치며 빙글빙글 돌고 긴 혀를 빼문 장면이 자꾸 떠올랐어요. 시를 쓸 때 그런 숨 막히는 고통을 극단적으로 몰아간 것 같아요. 내가 상상으로 보았던 그 영상으로 독자들을 데려가서 눈앞에서 보게 해주고 구역질 날 것 같은 반응이 나오도록 썼어요. 그럴 때는 악역을 맡은 배우처럼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오로지 ‘넥타이’만 보면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냉혹한 포커페이스가 되는 것 같아요.
초기 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관찰과 묘사에 관한 얘기였어요. ‘세부적인, 현미경적인, 해부학적인, 투시적인’ 이런 수식어들이 따라다녔지요. 나도 궁금해서 알아보려 하다가 체질이겠거니 막연히 생각했어요. 근래에 템플 그랜딘의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동물과의 대화』·『어느 자폐인 이야기』 등을 읽고 힌트를 좀 얻었어요.
템플 그랜딘은 중증 자폐인이에요, 본인의 노력으로 자폐증을 극복하고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고 북미에 있는 소 축산시설의 절반 이상을 설계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에요. 그에 의하면 자폐증은 정신질환이 아니라 뇌가 좀 다르게 생긴 거랍니다. 자폐인의 특징 중 하나가 추상적·관념적 사고를 못 하고 그림이나 영상으로 사고한다는 거예요. 그들은 보이는 그대로 세상을 이루는 요소 하나하나를 본다고 합니다. 템플 그랜딘이 어릴 적에 바닷가에 가서 모래를 손가락으로 흘려보내는 놀이를 혼자 하곤 했는데 그 모래알 하나하나가 다 다르게 보였다는 거죠. 마치 자신이 현미경으로 모래알을 연구하는 과학자 같았다고 해요. 자폐인은 인간이 보지 못하는 세밀한 것들을 보는데 동물도 그렇게 본다는 거예요. 둘 다 미세 지향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어요. 템플 그랜딘이 소와 마법적으로 소통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된 것도 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소의 심리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비(非)자폐인의 눈에는 그 작은 것 하나하나가 흐릿한 덩어리가 되어서 일반화된 개념으로 보인다고 해요. 세상의 기초 데이터를 모아서 일반화된 개념으로 바꾸기 위해 비자폐인의 뇌는 사소하고 구체적인 것을 자동으로 걸러낸다고 합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템플 그랜딘의 사고방식이 내 시의 사고방식과 너무 닮아서 놀랍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어요.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나한테 자폐적인 성향이 있나? 그랜딘이 책에서 밝힌 중증 자폐증 증상이 나에게는 없어요. 자폐증은 범주가 워낙 넓어서 공식 명칭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입니다. 그 스펙트럼에는 비자폐인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정도의 자폐증도 포함됩니다. 나도 거기 포함될지 모르지만, 그런 자폐증은 흔해서 진단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자폐증에 대한 실증적인 미국의 역사를 그린 책 『뉴로트라이브』의 저자 스티브 실버만은 과학과 예술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약간의 자폐증적인 성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성향에는 일상적인 세상이나 실용적인 것에서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는 능력이 있고 또 아무도 시도해 보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창조하기 위해서 대상을 독창적으로 다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선생님의 시 쓰기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자신의 시 쓰기 방식에 대한 것마저 세밀하게 탐구해 가시는군요(웃음). ‘타인의 얼굴’부터, ‘동물’을 거치고 또 ‘장애’로 나아가는 선생님의 시 작업이 아주 자연스럽게 사유의 흐름과 일치하는 지점들이 있어서 깊이감이 더해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앞서 말씀하셨듯 직장 생활을 하시면서는 출퇴근 시간이나 회사를 잠깐 벗어난 시간을 활용하셨잖아요. 최근에는 시를 주로 언제 쓰세요?
![]() 남승원 |
요새는 생산량이 많이 줄었어요. 세포도 줄어들고, 뉴런도 줄어들고, 수분도 줄어드니까 당연히 그렇겠지요. 여전히 길에서도 쓰지만, 카페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딴생각하다가 시가 나오기도 해요.
선생님의 시처럼 좀 더 세밀한 질문들을 드려보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선생님 시집들을 꺼내놓고 보면서 사실 저는 좀 뭉클한 감정이 들었어요. 저는 앞으로도 선생님의 또 다른 시집을 기다리는 독자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시집 발간 소식이랄지, 최근의 관심사 등에 대해 여쭤보는 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시집 낸 지 3년이 넘었는데 생산량이 줄어서 다음 시집은 엄두를 못 내고 있어요. 새해 다이어리에 ‘투 두 리스트(To do list)’를 적었는데 다 ‘줄이기’에요. 책도 줄이고 인터넷 보는 시간도 줄이고 원고나 강연도 줄여야겠다. 대신에 나한테 더 많은 시간을 줘야겠다. 특별히 무엇을 한다기보다 더 빈둥거릴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은 거죠.
그럼 선생님의 ‘빈둥거리는 시간’에 가끔 저도 불러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대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