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후기
재밌게 써보겠습니다

시집 『없어질 행성에서 씁니다』

  • 창작후기
  • 2026년 여름호 (통권 100호)
재밌게 써보겠습니다

시집 『없어질 행성에서 씁니다』



먼저 사과부터 해야겠다. 글의 재미를 중시하는 사람으로서, 또 지금부터 내가 늘어놓을 얘기가 얼마나 재미없을지 뻔히 알면서, 사과 한마디조차 하지 않는 건 뭐랄까, 좀 비겁한 일 같다. 솔직히 그럭저럭 재밌는 내용을 꾸며내서 써볼까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이건 시가 아니라 창작 후기니까. 창작 후기를 그런 식으로 쓰는 것도 내 기준에는 좀 비겁한 일이다.

죄송합니다.

사과해도 그다지 마음이 편해지지 않으니 되도록 빠르게 넘어가겠다. 흔하고 뻔한 얘기다. 나도 한때는 시가 세계를 구원해 줄 거라 믿었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그래도 나 하나는 구원해 줄 수 있을 거라 타협해서(?) 믿기로 했고, 더 지나선 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 후에는 시가 너무 미워졌고, 그래서 안 썼다. 다른 얘기지만 시가 만약 사람이었다면 날 보고 “뭐지? 미친놈인가?” 했을 것 같다. 저 혼자서 막 떠받들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동안 날 속인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따지더니 절연하자는 꼴이 참…. 시가 사람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시를 미워하는 마음은 ‘고작’ 몇 년에 걸쳐 점차로 옅어지다 결국 완전히 사그라질 정도의 것이었고, 한 줌 미움까지 전부 사라지고 나자 내게 남은 건 몇 년‘씩이나’ 되는 시간을 도 넘은 자의식 과잉 상태로 보냈다는 사실에 대한 창피함뿐이었다. 창피함 끝에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맞나? 아마도. 근데, 시만 그런가? 다른 모든 것들도 ‘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세상에, 왜 이 생각을 진작 못 한 거지?

물론 내 대단찮은 깨달음이 시를 다시 써야만 하는 이유가 된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러나 반대로, 시를 굳이 쓰지 말아야 할 이유도 더는 없었기에(따지고 보면 원래부터 없었던 거지만) 나는 시 혹은 시라고 우기며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뭔가 재밌는 것’을 쓰고 싶은 욕망에 늦게나마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간의 아집을 인정하고 내려놓는다고 해서 시가 자동으로 써지지는 않았고, 나는 문자 그대로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그냥 노화의 시기와 적당히 겹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쓰고 지우고 다시 쓰길 반복했다. 괴로웠고, 괴로워서 즐거웠다. 다른 자리를 통해서도 밝혔지만 괴로움과 즐거움을 견디며 ‘하고 싶은 이야기’들 중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씩 골라 담다 보니 어느새 내게는 길게 늘여 쓴 단 하나의 이야기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얼추 시집으로 묶을 만한 모양새를 갖춘 듯했고, 나는 누구든 내가 쓴 것을 읽고 ‘재미가 전혀 없진 않네’라고 생각해 주길 기대하며, 그 기대가 실망으로 끝이 났을 때는 자신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고민하며 이곳저곳에 원고를 보냈다.

감사하게도 대산문화재단과 문학동네에서 손을 내밀어주셨고,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아 (특히 담당 편집자 선생님과 아내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와 사과를 전한다. 정말 징글징글하게 괴롭혀드렸다.) 첫 시집이 나올 수 있었다. 실물 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 내 최선이라는 게 아쉽다’였고, 기쁨보다는 심란함이 훨씬 더 컸다. 이제 수개월이 지나 심란함도 누그러져서인지 욕심이 슬슬 생긴다. 누구든 내 시를 읽고 ‘그럭저럭 재밌네’ 하고 생각 해줬으면.

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으면서 시집은 재밌게 읽어달라니 내가 생각해도 앞뒤가 안맞고 어이없긴 하다. 그래도 염치를 무릅쓰고 부탁드린다. 억지로 꾸며 쓰지 않으려 노력하다 보면 간혹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글이 나오기도 한다는 것을, 이 창작 후기는 사과의 말로 시작했다는 것을 부디 너른 마음으로 참작해 주시기를. 만약 기회가 된다면, 다음번에는 내가 봐도 재밌는 시와 창작 후기로 다시 인사를 건네고 싶다. 

 

필자의 시집 『없어질 행성에서 씁니다』는 대산문화재단의 대산창작기금을 받아 2025년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신진용
시인
시집 『없어질 행성에서 씁니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