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소설 가르치는 일이 또 하나의 직업이 되어버렸다. 학기 초에 포스트잇을 나눠주며 소설 쓰기의 고민을 하나씩 적게 한다. 고민이 다양할 것 같지만 묶어보면 대부분 두 가지 중 하나에 해당한다. 문장에 관련된 고민과 주제에 관한 고민. 어떻게 하면 나만의 문장을 가질 수 있을까요?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좋은 묘사, 감각적인 묘사, 담백한 진술, 생동감 있는 대화, 그런 것들을 위해 쓰고 지우고 또 쓴다. 문장은 는다. 물론 안 느는 학생도 있지만 어쨌든 고치다 보면 좋아진다. 주제는 잠시 미뤄두라고 한다. 그 대신 내 안의 창고를 잘 들여다보라고. 암튼, 내가 보기에 이것보다 더 작가를 괴롭히는 것은 인과이다. 소설의 인과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 또 고민을 해도 어떻게 고민해야 하는지 모르는 학생들도 많다.
소설 창작 수업을 하는 어느 선생님께 — 그 선생님은 내가 학생 때 교과서처럼 읽었던 소설을 쓰신 분이다 — 나는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선생님은 어떻게 수업을 하세요? 저도 배우고 싶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아주 해맑게 이렇게 말해주셨다. “그냥, 나는 그게 말이 되는지 물어봐요” 말이 되는가. 맞다. 말이 되도록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 곧 인과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야기를 말이 되게 만드는 게 이렇게 힘들단 말인가.
소설은 시간을 역행해서 인물을 상상할 때가 많다. 즉, 현재 주인공 상태를 먼저 만들고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설득하기 위해 과거를 상상한다. 어느 편의점에서 팔에 멍이 든 아이를 보고 마음이 흔들린 인물이 있으면 그 사람이 어린 시절 학대를 당했다고 상상하는 식이다. 그러다 보면 그 인물의 어린 시절은 온통 불행으로 가득 차게 된다. ‘왜?’를 묻고 거기에 답해주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런 식의 구상 방법에는 뭔가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 정의로운 부모님 밑에서 자라서 멍이 든 아이를 외면하지 못하는 인물일 수도 있다. 아니면 평소에는 아동학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마침 전날 밤에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시사 프로그램을 보았을 수도 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막상 소설을 쓰면 그게 잘 안된다. 그걸 나는 상처의 블랙홀이라고 부른다. 작가가 만들어놓은 인물의 상처가 모든 걸 빨아들이는 것이다.
그럴 때 내가 하는 방법은 이렇다. 그 인물의 어린 시절부터 시간 순서대로 차근차근 상상해 보는 것. 누군가의 앨범을 몰래 본다는 느낌으로. 여섯 살 때는 어떤 만화영화를 좋아했나. 여덟 살 때는 무엇을 가장 무서워했나. 열다섯 살 때는 어떤 아이돌 노래를 좋아했나. 이런 식으로. 인물이 자라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다. 어떤 어른이 될지 미리 생각하지 않은 채로. 판단하지 않은 채로.
이렇게 인물을 두 번 상상한다. 한 번은 현재에서 시간을 역행해 가며 상상하고, 한 번은 태어날 때부터 순차적으로 상상해서 현재에 도착한다. 이런 두 번의 과정을 겪어야 비로소 인물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상처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렇게 상상하다 보면 얻는 것이 하나 있다. 과거는 아는 것이고, 현재는 사는 것이고, 미래는 모르는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 나는 인과란 질문이라 생각한다. 과거는 어땠니? 그렇구나. 현재 원하는 거는 뭐니? 그렇구나. 그럼 내가 잘 살게 해볼게. 하지만 미래는 모르는 일이니 걱정하지 말자. 나는 이 사실을, 무수히 실패한 학생들 소설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소설을 쓰는 모든 내 제자들이 인물을 현재에 잘 살게 만들고 그런 쓰기 과정에서 자신의 행복도 찾길 바라게 되었다. 그래야 모르는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고 기꺼이 기다리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