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에세이
이 땅 인문학자들과 예술가들의 분투가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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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년 여름호 (통권 100호)
이 땅 인문학자들과 예술가들의 분투가 요망된다

요즘 외국에서 공부하는 우리나라 유학생이나 외국을 여행하는 한국인은 참 행복한 편이다.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아무 염려나 주저 없이 한국인이라고 답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답하고 나면, 꽤 인정과 환대를 받으니까 말이다. 

국적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난처했던 한국인은, 내가 아는 한에서는, 아마도 이미륵 선생이 아니었을까 싶다. 경성의전(京城醫專) 학생으로서 1919년 3·1혁명에 가담했다가 일경에 쫓기는 몸이 되어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했고, 거기서 어렵게 중국 여권을 구해서 다시 독일로 망명한, 『압록강은 흐른다』의 작가 이미륵 선생 말인데. 그가 ‘Korea’에서 왔다고 했을 때, 당시 대부분의 독일인은 세계지도 상에서 사라지고 없는 나라 ‘Korea’가 어디 있는 어떤 나라인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문화민족의 후예로서 남다른 자긍심을 갖고 독일인들에게 한국의 역사, 철학 그리고 문화에 관해 성심을 다해 설명했고, 주위에 많은 독일인 이웃을 얻어, 나중에는 바이에른 지역 독일인들에게 서예를 보급하고 뮌헨대학에서 동양학을 강의함으로써 ‘동방에서 온 교양인’으로 크게 존경받았다.

1970년대 초반에 독일 본(Bonn)에 유학한 나는 이미륵 선생만큼 난처한 상황은 면했지만, 그가 겪은 ‘망국인의 설움’을 어느 정도 추체험할 수는 있었다. 그 당시 독일인 대다수는, 그들 초·중등학교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Korea’라는 나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으며, 나를 일본인으로 간주하기 일쑤였다. 한번은 내가 ‘Korea’에서 왔다고 분명히 말해 줬는데도, 그 이튿날 상대방은 내게 “베트남에서는 주로 무슨 음료를 마시느냐?”고 호의가 섞인 정보 질문을 했다. 음료 종류를 대답하기 전에 우선 나는 내가 베트남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다시 말해 줘야만 했다. 그는 금방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전쟁’이란 이미지 때문에 잠시 나라 이름을 혼동했었다고 고백했다. 1950년 ‘한국 전쟁’과 그 당시 진행 중이던 ‘베트남 전쟁’을 잠시 혼동한 결과라는 변명이었다.

나중에 한국에서 독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나는 꽤 많은 독일 학자들을 사귀고 손님으로 한국에 온 그들을 지극 정성으로 환대해서 보내곤 했다. 그런데 내가 연구차 독일 대학에 갔을 때, 유감스럽게도 그들 대부분은 나를, 한국에서의 나만큼, 성심껏 대접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아마도 그 당시 독일과 한국의 국력 차이가 알게 모르게 작용했던 점도 없지 않았던 듯하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근래에 우리 국민은 분단상황에서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하고, 오늘날에는 한류를 일으켜 BTS와 <케이팝 데몬 헌터스> 등 이 땅의 문화를 세계로 전파하는 한편, 지난 2024년 드디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면서, 김구 선생이 그렇게도 열망하던 ‘문화국가’가 이제 드디어 가시적 희망 사항으로 되었다.

오늘날 서울 명동 거리, 홍대 앞 거리, 강남 코엑스 광장 그리고 남산 타워 근처에 군집을 이루는 유럽인과 아시아인 여행객들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이 희한하고도 기쁜 광경들을 이미륵 선생께 보여드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더욱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러시아나 이란 전쟁의 보이지 않는 배후를 이루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 상황을 눈여겨보면서, 나는 우리 한국 국민이야말로 진실로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을 희망하는 새로운 ‘세계시민’(괴테의 개념)으로서, 앞으로 인류의 운명에 크게 공헌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으며, 우리 대한민국 민주시민들이 앞으로 지구촌의 새로운 리더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상서로운 예감에 휩싸이곤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미국 ≪포브스(Forbes)≫지 발표에 의하면, 우리 한국이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독일에 이어 세계 제6위 강국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가 제7위인 프랑스를 제쳤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또한, 세계적인 AI 기업가들도 우리 한국에서 반도체와 배터리 등 AI 관련 핵심 기술 산업이 융성하고 있는 데다가 기타 제조업들도 아직 살아 있기에, 미래 AI 강국으로 도약할 우리 한국을 주시·지목하여 자신들 주요 파트너로 끌어들이려는 상황이니,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나라가 그만한 저력을 갖추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더구나 AI 기술의 발달 잠재력으로 볼 때는, 우리 한국이 미국, 중국에 이어 정말로 세계 제3의 AI 강국으로 평가되고도 있는 듯하다. 물론, 이런 보도 자체를 다 믿을 것은 못 되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우리 사회 전체가 모두 아날로그적 여유를 잃고 AI 시대의 각박한 알고리듬에 휘둘리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되는 점도 없지 않다. 더구나, AI 시대가 앞으로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범용 인공지능) 시대, 또는 ASI(artificial superintelligence, 초인공지능) 시대로 바뀌어 갈 때, AI가 인류의 도구라는 현재 기능을 벗어나 범용 인공지능 시대에는 인류와 동격으로까지 격상된다든지, 초인공지능 시대에는 심지어는 인류 지배자로까지 표변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에 대해, 우리가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위험성에 대해 전(全) 인류가 공동 대처해 나갈 수 있을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한 전 인류적 대처 상황만 보더라도 도대체 지구인들이 단합하지도 못한 채 여러 갈등과 불협화음을 겪으며 효율적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제 AI 문제에 대한 공동 대처 방안까지 긴급 의제에 오른다면, 우리 인류는 지구 온난화 문제보다 더 심각한 곤란에 봉착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래서, 설령 우리 한국이 사실상 세계 제3의 AI 강국이라고 하더라도, 그에 따른 책임 또한 막중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 AI 자본가 일론 머스크(Elon Musk)의 낙관론적 예언에 의하면, AI 로봇이 외과 의사보다 수술을 더 잘하는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인데, 그때는 전 인류가 보편적 고소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며, 다만, 급격한 일자리 감소 등으로 3년에서 7년 정도 매우 혼란스러운 과도기는 겪겠지만, 그 후에는 ‘AI 천국’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설령 ‘AI 천국’이 정말 온다고 할지라도, 그 ‘혼란스러운 과도기’에 인류 사회의 수많은 약자가 어떤 고초를 겪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물론 일론 머스크는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는다.

이 다가오는 ‘혼란’에 대비해서 중국인들이라도 그들의 선성(先聖)인 공맹의 인의예지를 지킬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내 짐작에 미국과 중국은 오직 경쟁에만 몰입할 듯하다. 다가오는 AI 시대의 이런 도저한 급류에는 가장 취약해 보이지만, 그래도 그 강력한 혼란의 파고에 가장 용감하게 대처해서 분투해야 할 사람들 — 즉, 인류 공영과 세계 평화의 대표 전사들로서 선봉에 나서야 할 사람들 — 은 천만뜻밖에도 우리 한국 인문학자들과 예술가들이 될 듯하다. 왜냐하면, AI의 선두를 다투기 위해서 미국과 중국은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을 위험성이 있기에, 미국인들과 중국인들에게서 ‘AI의 인간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AI를 앞세운 권력과 자본의 모든 비인간적 월권에 대처하거나 대항해 싸워야 할 세력은 AI 제3 강국인 한국에서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 원동력이 한국 인문학자들과 예술가들한테서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점차로 자명해진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 한국 인문학자들이 더는 어느 선진국의 사례를 벤치마킹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이 제3의 AI 강국이기에 한국의 인문학자들이 자체적으로 외교적 규범을 제안하고, 두 ‘강국’을 설득해야 하며, AI의 불가피성을 빙자한 비인도적 권력과 자본의 힘을 효과적으로 규제하고 제어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우리 한국에는 계몽주의 이래 점점 더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해 온, 즉 승리와 쟁취를 최고 목표로 삼아 온 서양학이 아닌 동양적 학문 전통이 연면히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동학이든, 살림의 학문이든, 칠성님의 지혜든 간에 우리에게는 우리의 선한 사상,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을 추구하는 귀하고도 소중한 이 땅 고유의 사상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인문적 염려도 없이 국가 번영을 위해 AI 산업을 게임 체인저로서 추동하고 있는 한국 위정자들과, AI의 도도한 행진을 막을 수 없고 AI의 지배적 위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 AI 과학자들의 절박함과 다급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다. 우리 인문학자들과 예술가들도 AI의 도도한 행진을 실감하고는 있으니 말이다. 다만, 우리들은 알고리듬의 전능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오랜 인문학적 논의를 거쳐 ‘동학란’이란 개념이 ‘동학농민혁명’으로 바뀌고, ‘광주 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바뀌는 사실 등 수많은 인문학적 연구의 변혁 과정을 AI의 알고리듬에 물어서는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은 자명하다. 김소월과 윤동주 그리고 김수영과 신동엽의 시를 새로이 해석하는 데에 AI는 무력하다. AI가 시와 소설을 창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희대의 낙관론자들을 더러 보는데, 이것은 표피적 관찰일 뿐, 시인과 작가가 시와 소설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발현해 내고 있는 그 창조적 기운을 AI가(과거의 데이터를 갖고 연산하는 알고리듬의 AI가) 어떻게 불러올 수 있단 말인가! 초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했을 때 각국 외교관들이 어떤 의사소통을 해 나가야 할지 그것을 초인공지능에 묻고 맡길 수 있을까? 설령 그렇다손 치더라도, 혹시 어떤 희한한 유형의 인간 하나가 초인공지능을 그릇된 방향으로 잘못 작동시킬 가능성은 없을까?

여기서 잠시 괴테의 『파우스트』 제2부 제5막에 ‘행위자’로 나서서 민중들을 위해 간척사업을 일으키고 그 새로운 땅 위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 파우스트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자신이 이룩해 놓은 간척사업이란 ‘위대한 업적’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언덕을 차지하겠다는 실로 예견하지 못한 사소한 욕망 때문에 득죄(得罪)하게 된다. 그가 언덕 위 오막살이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노부부를 이주시킬 것을 명한 결과, 노부부는 결국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살해되고 만다.

 

내가 명령을 내릴 때 너와 너의 졸개들은 귀가 먹었더냐?

나는 대토(代土)를 원했지 강탈하려던 게 아니었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그의 부하들을 나무라지만, 이미 일은 저질러진 뒤였다. 얼마나 많은 ‘행위자’들이 자신의 본의는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부하들이 명령을 잘못 이행한 탓이라고 변명해 왔던가! 앞으로 초인공지능 시대에 이런 인간은 절대 없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AI에게서 국가 미래산업을 보고, AI 활용 속도를 앞당겨 미국과 중국을 따라잡으려는 한국 정치인들과 낙관적 AI 관련 과학자들은 부디 이런 구차한 변명을 하기 이전에, 이 땅 인문학자들과 예술가들과 협업해 가며 AI와 그 작동 기제를 인간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인문학자들과 예술가들을 지금보다 훨씬 더 존중해서 그들과 긴밀히 협력할 필요가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들이 지금까지 해 오던 방식 그대로(즉, 인문사회계 R&D 예산을 과학기술계 예산 대비 1% 남짓에 불과하도록 방치한 현재 상황 그대로) 국내 인문학자들의 연구 토대를 황폐화하고, 가용 자원 대부분을 스스로 독점하다시피 하는 관성으로써는 다가오는 한국 AI 산업이 필요로 하는 인문적 인재와 그들의 능력을 적시에 활용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인문학자들의 연구 상황을 초토화해 놓고서는 어느 날 갑자기 인문학적 인재를 급구하겠다는 어리석음을 부디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국 인문학자들과 예술가들도 앞으로 자신들이 짊어지게 될 우리 대한민국 운명, 아니, 인류 전체 운명을 미리 통찰하고, 지금까지보다 더 굳센 자긍심을 갖고 한층 더 분발하고 분투해야 한다. 인문학자들이 언제는 연구비 때문에 연구해 왔는가? 이 땅의 예술가들이 언제는 그 알량한 창작 지원금 때문에 창작을 했던가? 그들은 더는 자신들의 권한과 의무를 지키려는 소박한 이기심에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인류 전체의 운명이 좌우될지도 모른다는 소명감에서 분투해야 한다. 즉, 그들은 바로 그들 자신이 인류 공영과 세계 평화를 짊어진 역군이며 전사임을 자각해야 한단 말이다. 그러니, 현하 한국의 인문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시대적 소명을 자각하고 그것을 완수해 낼 태세를 갖추어야 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그들의 분투가 요망된다. 언제나 그렇지만, 위정자와 자본가는 늘 근시안적인 권력과 이익 추구에 매달릴 수밖에 없으며, 위험이 코앞에 다가와서야 그 위험을 인지하고 그때야 그 위험에 대처하려 할 것이다. 그들이 약간의 연구비를 미끼로 구원을 요청할 때는 이미 때가 늦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 지금 저 멀리 수평선에 AI 시대의 도래를 뜻하는 어떤 돛대의 깃발이 조금 나타나 보인다. 하지만, 곧 선체가 드러날 것이며, 그 배가 급속도로 항구를 향해 달려 들어올 것이다. 그 배가 몰고 올 파문을 우리는 아직 정확히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땅의, 아니, 이 세계의 모든 구성원은 그 배의 착륙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 하필이면, 이 한반도의 인문학자들과 예술가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분투가 요망되고 있다. 위정자나 자본가, 또는 과학자들이 던져주는 몇 푼의 연구비나 창작 지원금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서양의 온갖 이론들에 더는 한눈팔 겨를도 없다. 이제는 이 땅의, 우리 겨레의 전통적 지혜와 역량을 모아야 할 시점이다. 지금은 이미륵 선생처럼 서양으로 망명할 필요가 없는 것만 해도 다행일까! 드디어 이 땅의 주인인 우리들이 이제는 세계시민으로서, 이 세계와 인류의 미래를 위해 당당히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일에는 고(故) 이미륵 선생, 고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 그리고 고 여운형 대한민국 건국준비위원장의 명우(冥佑)가 함께할 것이다. 

안삼환
소설가,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 1943년생
저서 『괴테, 토마스 만 그리고 이청준』, 역서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외』, 장편소설 『도동 사람』 『바이마르에서 무슨 일이』 『역관 일지』 등